24. 비자금 강탈 (2)
건기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옐로우 클랜의 아지트는 59층.
그러나 거기 말고도 몇 군데 더 보조 아지트가 있었다.
그 중 딕이 관리하는 곳은 52층.
딕이 지금처럼 비밀리에 자금을 긁어모으고 있다면 그곳에 쌓여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일반적으로 돈과 물건은 인벤토리에 넣어 두는 게 가장 안전하다.
그러나 현금 80억의 무게는,
5만 원권으로 약 155kg.
제한인 200kg에 가까웠다.
딕 정도의 위치가 되는 간부라면 분명 어딘가에 돈과 물자를 쌓아 둘 것이었다.
“거길 털면 되겠군.”
큰돈을 벌기 위한 밑천.
건기는 옐로우 클랜 2인자의 비자금을 털기로 작정했다.
리텐밍으로부터 얻은 장부에는 그가 상납한 돈이 어디로 향하는지 모두 적혀 있었다.
“잘됐네. 어차피 52층으로 가려면 50층을 지나야 하니까…….”
건기는 즉시 길드 건물로 들어가 아틀라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거주 구역 내 계단탑에 깔린 전선은 전파가 통하지 않는 마탑에선 유일한 장거리 통신수단이었다.
[아틀라스짱짱.]
[50층 길드에서 대기할 것.]
[이건기.]
길드를 통해 보낸 메시지는 전화기의 음성사서함처럼 특정인의 계좌에 보관됐다.
물론 아틀라스가 확인하기도 전에 일행이 먼저 50층에 도착할 가능성도 있었다.
일행은 길드를 나와 거주 구역 내 계단탑으로 향했다.
거주 구역 내 계단탑 앞에는 검문소 대신 요금소가 있었다.
흔히들 고속도로의 ‘톨게이트’라 부르는 그것이었다.
“잠깐!”
요금관들이 일행을 멈춰 세웠다.
건기는 인벤토리에서 임시 통행증을 꺼내 그들에게 내밀었다.
“이봐. 이건 임시 통행증이잖아? 거주 구역 내 계단탑을 이용하려면 정식 통행증을 보여 주든가, 아님 통행세를 내야 하는 거 몰라?”
‘깜빡했다.’
건기는 어색하게 웃으며 물었다.
“얼마죠?”
“1인당, 40만 원.”
셋이니까, 120만 원.
이래서 건기가 가급적 황야의 계단탑으로만 다닌 것이었다.
건기는 군말 없이 돈을 꺼내 요금관에게 건넸다.
돈을 받은 요금관들은 요금소의 차단목을 열어 주었다.
일행은 빠르게 층을 올랐다.
황야의 흙먼지 가득한 계단탑과 달리 거주 구역 계단탑은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계단 위 천장에는 각 층의 거주 구역을 연결해 주는 전선과 케이블이 이어져 있었다.
일행은 50층에 도착할 때까지,
무려 8번이나 더 돈을 냈다.
41층부터 50층까지 오는데,
쓴 돈은 다 해서 1080만 원.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래서 건기가 황야를 선호하는 것이었다.
반나절, 또는 몇 시간 뒤.
그리고 마탑 50층.
일행은 우선 길드로 향했다.
그러나 어디에도 아틀라스의 모습은 없었다.
“역시 우리가 너무 빨리 왔네.”
일행은 일단 길드 근처 여관 주점에 숙소를 잡았다.
그리고 세 사람이 돌아가면서 아틀라스를 기다리기로 했다.
“이건 또 무슨 해괴한 짓이야?”
태구의 차례.
그는 투덜거리면서 미지근한 캔맥주를 홀짝였다.
대낮부터 길드에 찾아와선 소파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주정뱅이였다.
길드원들은 그를 보며 쫓아내야 할지, 구경해야 할지 망설였다.
몇 시간 후 윌리와 교대.
윌리는 아예 길드 건물 바닥에 자리를 펴고 마총을 분해, 정비하기 시작했다.
길드원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아까 그 주정뱅이 아들인가?”
“아주 교대로 민폐구먼.”
“그냥 끌어낼까?”
밤낮이 없는 마탑의 특성상,
각 층의 길드는 24시간 영업.
찾아오는 이들을 절대 거부하지 않는 게 원칙이었다.
그렇다 보니 길드원들은 갖가지 진상들에 이골이 난 상태였다.
실제로 MGF뿐만 아니라 길드에서도 사적으로 현상금을 내거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마지막으로 건기와 교대.
길드원들은 소파에 앉은 건기를 알아보진 못했지만,
겉모습에서 풍겨오는 위압감에 함부로 다가가지 않았다.
“올 때까지 기다려나 하나.”
건기는 종이컵에 담긴 미지근한 물을 홀짝였다.
사실 그도 자신을 쳐다보는 길드원들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긴 했다.
하지만 뻔뻔함을 무릅쓰지 않으면 아틀라스를 만날 수 없었다.
건기 일행은 교대로 계속 아틀라스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다시 한 바퀴를 돌아 건기 차례.
길드원처럼 보이는 사내가 건기가 교대하는 타이밍에 맞춰 그의 옆에 섰다.
건기는 길드원들 또한 한 사람씩 교대로 자신들을 감시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완전 진상으로 찍혔네.”
건기 일행이 8시간씩 교대를 한다면, 길드원들은 1시간씩 교대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몇 번 그들의 얼굴과 체형이 눈에 익자,
건기는 한 가지 의아스러워졌다.
“설마…….”
기다리는 사람과 교대하는 사람이 직접 만나서 교대하는 건기 일행과 달리,
길드원들은 한 사람이 있다가 나가면 다른 사람이 들어오는 형식이었다.
즉, 건기 일행은 그들이 교대하는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건기는 거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아틀라스, 이 자식.”
건기는 길드원에게 다가가 냅다 그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자 주변의 무장한 경비원들이 우르르 그에게 달려왔다.
“뭐 하는 거야? 손 놔!”
멱살이 잡힌 길드원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건기는 냉정히 그에게 말했다.
“아틀라스. 변신 풀어. 아니면 외눈 껴 볼까?”
아틀라스라 불린 길드원은 경비원의 눈치를 살피며 대꾸했다.
“무슨 소리야! 난 아틀라스가 아니야. 난 그냥 길드원이라고!”
건기는 주변의 이목을 살피며 길드원의 귀에 무어라 속삭였다.
그러자 길드원의 표정이 한순간에 바뀌며 양팔을 들어 올렸다.
“항복하지. 네가 이겼어.”
아틀라스의 항복.
건기는 즉시 그의 멱살을 놨다.
“그럼 우리 숙소로 갈까?”
건기와 아틀라스는 경비원들의 경계를 받으며 길드를 나왔다.
아틀라스는 길드를 나오자마자,
즉시 얼굴을 원래대로 바꿨다.
“젠장.”
아틀라스.
그는 얼굴을 주무르며 탄식했다.
“설마 몸을 기억하는 놈이 있을 줄이야. 넌 인마, 무슨 괴물이냐?”
건기는 실룩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괴물이었지. 근데 왔으면, 빨리빨리 찾아올 것이지. 왜 거기서 그러고 있었어?”
아틀라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난 얼굴을 바꿀 수 있는 만큼 신분이 꽤 되거든. 여기선 길드원 ‘메노이티스’로 되어 있어. 나중에 보는 눈이 좀 줄어들면 다가가려고 했어. 정말이라고.”
“메노이티스?”
건기는 눈썹을 찡그렸다.
“이상한 이름인 거 나도 알아. 하지만 급히 지어내느라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
두 사람은 숙소로 들어갔다.
그리고 방에서 주인이 가져다 준 맥주와 안주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일단 건배!”
태구는 군침을 흘리며 술잔을 높이 들어 올렸다.
윌리를 제외한 모두가 그를 따라 술을 마셨다.
“끼야야얏!”
태구는 혼자 맥주를 연달아 마시고는 그대로 고주망태가 되어 뻗었다.
아틀라스는 그 모습을 어이없게 쳐다보다가 건기에게 말했다.
“실화냐?”
“미안.”
건기는 처음으로 사과를 했다.
아틀라스는 자신의 잔을 깨끗하게 비운 후 무겁게 물었다.
“날 부른 건 당연히 좋은 일거리가 있어서겠지?”
“엄청난 재화가 쌓여 있는 비자금 보관소를 찾아냈어. 거길 털 생각이야.”
“오오, 액수는?”
“최소 80억.”
“최, 최소 80억이라고?”
예상외로 큰 액수.
아틀라스의 두 눈이 번뜩였다.
“그럼 수익 분배는?”
“4분의 1.”
아틀라스의 몫은 25퍼센트.
당사자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80억이면, 20억. 혹은 그 이상이란 거지? 좋았어.”
건기는 이미 일행들과 분배에 대해 이야기를 끝낸 후였다.
태구의 몫은 20퍼센트,
윌리의 몫은 20퍼센트,
건기의 몫은 35퍼센트였다.
태구는 원래 건기와 약속한 것에 따라 정한 것,
윌리의 경우에는 원래 25퍼센트였지만, 임무를 상의하던 도중 조정된 것이었다.
“계획은?”
건기는 리텐밍의 장부를 보여 주며,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아틀라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옐로우 클랜의 2인자를 턴다고? 간도 크군.”
“하지만 최소 80억. 어쩌면 1인당 80억을 벌 수 있을지 몰라.”
“1인당 80억…….”
즉시 마탑 생활과 이별.
당당히 바깥세상으로 나갈 수 있는 금액이었다.
아틀라스는 반신반의하며 건기에게 물었다.
“옐로우 클랜의 2인자의 금고면 지키는 녀석들이 한둘이 아닐 거야. 만약 일이 잘못돼서 싸우게 되면 어떻게 할 거지?”
“싸울 거야.”
“싸운다고? 최소한 스물은 될 텐데? 고작 넷이서?”
“나 혼자서.”
“겨우 혼자서?”
“충분해.”
아틀라스는 건기의 호언장담을 믿어야 할지, 아니면 그냥 지금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가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나 그냥 무시하고 떠나기엔 80억이란 숫자가 그의 머릿속에 너무 강하게 자리 잡은 상태였다.
“후우, 좋아. 다 좋다고.”
아틀라스는 한 가지만 분명하게 짚었다.
그리고 머리를 긁으며 잠시 누군가를 떠올렸다.
“괜찮다면, 내가 한 사람 추천해도 될까? 아무래도 이 멤버만으로는 마음이 놓이지 않거든.”
“누군데?”
아틀라스는 한쪽 눈을 찡그렸다.
“좀 괴짜지만, 실력은 확실해.”
“좋아. 그걸로 네가 안심할 수 있다면, 상관없어.”
사람이 늘면, 그만큼 옮길 수 있는 금액이 늘어난다.
건기에게 있어선 그저 돈 나를 사람이 추가될 뿐이었다.
넷은 그렇게 의견을 합치고,
다음날 바로 52층으로 올라갔다.
반나절, 또는 몇 시간 뒤.
그리고 마탑 52층.
황야에 있는 ‘판자마을.’
마을 이름처럼 집들이 대부분 나무판자로 지어진 곳이었다.
딕의 아지트는 마을의 가장자리.
마을을 지배하는 딕이 정한 세금이 그곳으로 모이고 있었다.
당연히 세금은 터무니없는 액수였고, 마을 주민들은 모두 헐벗고 굶주린 상태였다.
다섯 일행은 위장막을 뒤집어쓴 채 바위 뒤에 숨어 있었다.
바람이 살짝만 불어도 입과 코가 흙먼지로 꽉 찼지만,
다섯은 꿋꿋이 참았다.
“저기 보이는군.”
건기는 망원경으로 딕의 아지트를 살폈다.
다 쓰러져 가는 낡은 창고처럼 생겼지만, 당장 문 앞에는 건장한 남성 둘이 지키고 있었다.
장부에 적힌 그대로,
아지트는 거대한 창고를 개조한 구조물이었다.
“딕은 보여?”
아틀라스가 물었다.
건기는 망원경을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아니. 아마 녀석은 여기 없을 거야. 여긴 비자금 창고라서, 오래 머물지 않거든.”
“그렇군.”
“일단 여기서 닷새는 밤샐 각오해야 돼. 그래야 녀석들의 패턴을 알 수 있으니까.”
“닷새씩이나?”
“당연하지.”
일행은 군말 없이 닷새를 엎드려 있었다.
그리고 교대하면서 차례로 망원경으로 창고를 감시했다.
뭔가 조금이라도 이상한 점이 발견되면, 즉시 건기가 나서서 확인하는 방식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드러나는 사실이 늘어났다.
보초는 여섯 시간마다 교대,
보초는 항상 둘씩,
보초의 무장은 장검뿐,
막 교대하러 나온 녀석들은 항상 술에 취한 상태,
조직원의 스탯은 평균 C,
다만 지력을 포함하면 D이하,
몸 쓰는 데 특화된 인원이었다.
거기에 하루 한 번 마을 여성들이 교대로 아지트에 들어갔다.
나올 때 옷이 찢겨진 걸로 봐선 들어간 목적은 명확했다.
“안에서 뭘 하고 있는 걸까?”
태구는 모히칸 머리를 매만졌다.
건기는 그런 그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짝 때렸다.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마세요.”
“안에 있는 숫자를 특정할 수 있겠어.”
다섯 번째 멤버의 발언.
아틀라스가 데려온 벤이었다.
그는 블루 클랜의 시험에서 흑발 청년이 내민 알약을 삼킨 후 살아남아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건기는 그에게 청년에 대한 정보를 물었다.
“우리가 나간 다음에 어떻게 됐어? 녀석이 뭐라고 했지?”
“알약을 먹은 후에 스킬을 얻었지만, 녀석은 날 보고서도 ‘꽝’이라고 했어. 그러고는 혼잣말로 다른 곳에서 건진 ‘당첨’들을 데리러 간다고 하더군.”
꽝, 그리고 당첨.
벤은 왜 청년이 그런 괴상한 일을 벌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오직 이건기를 섬멸하기 위한 작업.
S급의 자질을 가진 자들을 선별해 강제로 각성시키는 것이었다.
개울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