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잘려 나간 귀 (3)
건기는 손에 든 리볼버를 바지춤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인벤토리에서 수건을 꺼내 케빈에게 내밀었다.
“귀에 묻은 피 좀 닦지 그래?”
“감사합니다. 급히 준비하느라 피를 제대로 닦아 내질 못했어요.”
케빈은 수건을 받아서 조심스럽게 귀를 닦았다.
그리고 닦자마자 황급히 인벤토리에서 방한모자를 꺼내 썼다.
그가 푹 눌러쓴 덕에 모자 양옆으로 내려온 덮개가 양쪽 귀를 완벽하게 가렸다.
“잘 썼어요.”
건기는 수건을 돌려받으며 방한모자를 가리켰다.
“모자가 참 특이하네. 기온이 일정한 황야에서 웬 방한모자지?”
“패션인데요?”
케빈은 가증스런 미소를 띠며 건기의 옷을 가리켰다.
확실히 깔끔한 그의 옷에 비해 건기의 옷은 먼지투성이였다.
건기는 손으로 옷을 툭툭 털면서 말했다.
“위급할 때 그 잘난 패션이 살려 줄지 두고 보자고.”
“두고 보자는 사람치고, 대단한 사람 못 봤는데? 차라리 수박에 줄을 긋고, 호박이라고 하지 그래?”
기습적인 다니엘의 농담.
조와 다니엘은 빵 터졌고,
나머지는 정색했다.
다니엘은 조와 손뼉을 친 뒤, 건기에게 어깨동무를 걸었다.
“설마 삐치시는 건 아니겠지? 유명하신 이건기 님? 안 그래?”
건기는 어금니를 씹으며 환하게 웃었다.
“수박하고 호박하고 바뀌었잖아, 이 무식한 놈아.”
“그게 재밌는 거라고!”
“닥치고 어깨 풀어.”
건기는 검을 뽑아서 다니엘의 눈앞에 흔들었다.
“네.”
다니엘은 순순히 건기에게서 떨어져 조의 뒤로 몸을 숨겼다.
가장 키가 큰 몸이 가장 작은 몸에 숨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코미디였다.
2시간 뒤.
일행은 실종 장소에 도착했다.
주변 지리를 잘 모르는 건기 입장에선 어디나 다 똑같이 보였다.
“도착한 거 맞아?”
아무도 없었다.
건기는 케빈에게 물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여기가 맞아요. 그런데…… 다들 어디 있는 거죠?”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돌발 상황.
그때 조가 의견을 냈다.
“두 사람씩 짝을 지어서 주변을 찾아보는 게 좋겠는데?”
“그러다가 엘프한테 기습당하면 꼼짝없이 당할걸? 다 함께…….”
건기는 흩어지는 것만큼은 결사반대였다.
하지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른 다섯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야. 그렇게 하자고! 난 조랑 갈게.”
다니엘은 조와 함께.
밤비노는 케빈에게 붙었다.
조는 땅바닥에 삽 하나를 거꾸로 꽂으며 말했다.
“그럼 1시간 후에 여기서 다시 모이자고!”
다섯은 건기의 의견 따윈 상관도 않은 채 우르르 흩어졌다.
건기의 옆에 남은 건 부보안관 맥뿐이었다.
“잘 부탁해.”
맥은 어색하게 웃었다.
건기는 그가 든 리볼버를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힘없이 말했다.
“그거 알아요? 다 죽을 거예요.”
건기의 선언.
그 말에 맥은 입을 쩍 벌리며 겁에 질렸다.
“히익! 그, 그건 너무 부정적인 거 아닌가?”
“최대한 긍정적으로 봤을 때 나랑 당신 정도만 살겠죠.”
“왜?”
“내 옆에 있으니까요.”
맥은 입술을 동그랗게 말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다른 사람들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맥은 걷던 도중 이상한 점을 발견해 건기의 허리춤을 가리켰다.
“자네 마총은 어디 있나?”
***
“수상하지 않아요?”
“누구?”
밤비노는 케빈의 질문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건기 말이에요.”
케빈은 눈을 번뜩였다.
“녀석 일행하고 마주치고 나서 엘프들이 나타났어요. 우연이라기엔 너무 수상하잖아요?”
“그런 수상한 사람한테 왜 광부들 수색을 부탁한 건데?”
“마을에 둘 수 없었으니까요. 아시다시피 지금 마을은 그다지 안전하지 않잖아요.”
“그렇긴 하지.”
두 사람은 어두운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조와 다니엘은 고용한 외부인.
건기와 맥은 버리는 말.
결국 믿을 건 본인들뿐이었다.
둘은 작은 언덕을 넘어서 뭔가 발자국 같은 것을 발견했다.
“잭 일행 건가?”
케빈은 허겁지겁 달려가서 발자국을 자세히 살피려 했다.
그러나 그가 허리를 숙이는 순간, 지면 속에서 팔이 쭉 뻗어 나와 그의 멱살을 잡았다.
“허억!”
케빈은 그대로 균형을 잃고 지면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하지만 완전히 몸이 들어가기 전, 밤비노가 그의 발목을 잡아서 힘껏 당겼다.
“하아아앗!”
케빈은 의외로 손쉽게 지상으로 올려졌다.
그리고 그를 지하로 끌어들이던 정체불명의 팔까지 함께 올라왔다.
“엘프!”
케빈은 함께 올라온 엘프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은색 장발을 가진 엘프는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쏘아봤다.
“타슝카!”
엘프의 외침.
여기저기 바닥에서 위장막이 걷히며 그 아래 숨어 있던 엘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괜찮아?”
밤비노는 케빈 앞에 서며 검을 들었다.
그리고 고갯짓으로 한 엘프의 손을 가리켰다.
“저거 봐.”
“저, 저건……!”
길드제 리볼버.
케빈은 그것을 본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엘프들이 마총 가진 걸 본 적이 없잖아요.”
“그럼 저 리볼버는 뭔데?”
이건기가 가진 마총.
두 사람의 머리에 자연스레 그것이 떠올랐다.
다만 밤비노는 좀 의아스러웠다.
“저 엘프는 어디서 어떻게 마총을 구한 거지?”
케빈은 밤비노의 질문에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뻔하죠. 이건기가 엘프들한테 넘긴 거예요!”
“뭐라고?”
밤비노는 케빈보다 더 일찍 마을에 정착하며 엘프들을 겪어 왔다.
그런 그의 경험상,
적어도 엘프가 마총을 가진 걸 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냥 뺏은 게 아닐까?”
“A급 현상 수배범도 이긴 녀석이 순순히 뺏겼을 것 같아요?”
“그럼 모든 게 이건기의 함정?”
밤비노는 케빈의 설레발에 제대로 된 상황 판단을 하지 못했다.
“어, 어떻게 하지?”
케빈은 곡괭이를 양손에 든 채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제가 시간을 끌 테니까, 조와 다니엘을 불러와 주세요.”
케빈은 엘프들에게 달려들어서 곡괭이를 휘둘렀다.
“어서 가세요!”
“크윽.”
밤비노는 뒤돌아서서 달렸다.
그의 눈에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나왔다.
케빈이 미끼가 되어 준 덕일까.
평소 엘프의 악명을 생각하면,
지나치게 수월한 도주였다.
그러나 지금의 그로선 그런 걸 따질 겨를이 없었다.
“헉, 헉!”
밤비노는 달리고 또 달렸다.
그리고 어느 바위 뒤에 몸을 기댄 채 쉬고 있는 조와 다니엘을 발견했다.
“응? 보안관 나리잖아? 케빈은 어디 두고 왔어?”
“헉, 헉. 케, 케빈이 엘프…….”
엘프.
그 말을 듣는 순간,
한풀 늘어져 있던 두 사람의 표정이 급변했다.
조는 방패와 강철 곤봉,
다니엘은 방패와 노멀소드.
두 사람은 무장을 꺼내 들고는 바위 뒤에 몸을 밀착했다.
그리고 어벙하게 서 있던 밤비노에게 손짓을 해 함께 숨게 했다.
“추격해 오는 놈이 있어?”
조의 말에 다니엘은 고개를 슬쩍 내밀어서 밤비노가 달려왔던 방향을 살폈다.
“아니, 아무도 없어. 지면에서도 특별한 움직임은 없어.”
“그래? 엘프는 한번 노린 건 절대 그냥 보내지 않는데?”
“맞아. 처음 만나면 귀를 잘라서 땅에 묻고, 귀 잘린 채로 만나면 죽이잖아?”
“어.”
두 사람은 눈을 번뜩이며 밤비노를 쳐다봤다.
그러나 차마 그의 기세에 눌려 함부로 지껄이진 않았다.
조는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보안관 나리. 혹시 우리한테 뭐 이야기하지 않은 게 있으십니까?”
밤비노는 침착하게 케빈에게 들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건기가 배신자?”
“엘프랑 내통을 해?”
두 사람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무래도 똥 밟은 것 같은데?”
“그렇지? 우리도 고용된 건데, 이런 말하긴 뭣하지만…….”
조는 인벤토리에서 지폐 한 다발을 꺼내 바닥에 떨어뜨렸다.
“선금은 돌려주겠습니다. 우린 이 일에서 빠지겠어요.”
“뭐?”
밤비노는 돈을 주울 생각도 못한 채 두 사람을 쳐다봤다.
“잠깐만! 이런 상황에서 너희 둘만 도망치겠다고?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거야?”
조는 상황을 일일이 설명하기보단 딱 결론만 잘라서 말했다.
“어차피 우린 이 마을 주민도 아니고, 상황이 위험하지 않습니까? 보안관 나리도 어서 마을로 돌아가세요. 나리가 없는 틈을 타 엘프들이 마을을 공격하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뭐라고?”
밤비노는 조의 말에 둔기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는 두 사람이 도망치는 것도 내버려 둔 채 마른 침만 삼켰다.
“마을이 위험해!”
단순무식한 보안관.
밤비노는 케빈도 잊은 채 마을을 향해 달렸다.
걸어서 두 시간 거리.
그러나 그는 마을까지,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전력으로 질주했다.
“뭐 하는 거냐?”
거구의 질주는 멀리 떨어진 건기 눈에 띄었다.
건기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밤비노를 가리켰다.
맥은 벌벌 떨면서 말했다.
“보안관님이잖아? 왜 도망치시지? 서, 설마 엘프가……!”
그때 두 사람의 앞에 도망치던 조와 다니엘이 나타났다.
마주친 두 쌍은 서로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너희는 또 뭐야?”
건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 모습을 본 두 사람은 즉시 싸울 자세를 취했다.
“우린 도망치는 중이야.”
“맞아! 배신자 새끼야!”
건기는 다니엘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배신자는 내가 아니라 도망치는 너희 같은데?”
“다니엘, 내가 말할게. 넌 입 좀 닥치고 있어.”
조는 밤비노에게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건기에게 전했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건기는 어이가 없다 못해 짜증까지 났다.
“그 소리를 믿었단 말이지?”
“당연하지! 우린 돈은 좋아해도 개죽음은 질색이거든.”
다니엘은 지지 않고 건기를 향해 외쳤다.
그러자 조가 얼른 덧붙였다.
“난 아니야. 난 아무것도 안 믿어.”
“엥? 그럼 난?”
다니엘은 섭섭한 얼굴로 조를 쳐다봤다.
조는 그런 그를 외면하면서 계속 말했다.
“무법자 인생이 다 그런 거 아니겠어?”
건기는 이를 갈았다.
조와 다니엘.
딱히 기대되는 전력은 아니었지만, 없는 것보단 나았다.
“돈을 주지. 훨씬 더…….”
“미안하지만, 억만금을 줘도 목숨은 안 걸어.”
조는 딱 잘라 거절했다.
다니엘도 그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다니엘.”
결국 두 사람은 도주.
건기는 둘만 남게 되자,
맥의 멱살을 움켜쥐며 물었다.
“안 죽일 테니까, 대답해요. 그 케빈이란 자식, 정말로 마을 주민 맞아요?”
맥은 완전히 겁에 질려서 순순히 대답했다.
“마, 맞아. 2년 전부터 우리 마을에 정착해서 살고 있어.”
“2년? 혹시 그동안 그 녀석 귀 본 적 있어요?”
“귀? 그딴 걸 누가 신경 써?”
건기는 맥의 대답에 코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의 말이 지극히 상식적이었다.
“마지막. 마을은 왜 엘프의 영역으로 광부들을 보낸 거죠?”
마지막 질문이 핵심.
그러나 그 질문에 맥은 입을 꾹 다물었다.
건기는 어이가 없었다.
“이제 와서? 제정신이에요?”
건기는 맥의 따귀를 아주 세게 때렸다.
짝.
맥은 뺨이 퉁퉁 붓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우리 마을은 엘프의 영역과 맞닿아 있다네. 녀석들 영역에 수정산이 풍부해서 MGF가 정책적으로 밀어붙이고 있거든.”
“엘프들 입장에선 마탑의 원주민인 자기들 땅을 인간이 침략한 셈이니, 상당히 화가 났겠죠.”
“그렇지. 그래서 우리 마을은 규모에 비해 현상금 사냥꾼과 광부가 많이 드나들고 있어. MGF의 보조금도 상당하고…….”
“근데 보수를 겨우 인당 50만 원 줬단 말이죠?”
건기는 입술을 비틀며 기분 나쁜 미소를 지었다.
맥은 헛기침을 하면서 그의 표정을 애써 외면했다.
“덕분에 무슨 상황인지는 대충 이해했어요. 그럼 마을은 보안관한테 맡기고, 저희는 수색을 계속해요. 희생자를 찾지 못하면, 희망은 없어요.”
“희망? 무슨 말인가?”
“잘 생각해 보세요.”
건기는 쪼그려 앉아 손가락으로 바닥에 그림을 그렸다.
“마을이 버틸 수 있던 이유는 상당한 전력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마을의 전력은 크게 셋.
보안관과 부보안관들.
건장한 광부들.
돈으로 고용된 현상금 사냥꾼들.
“현상금 사냥꾼들은 여차하면 조와 다니엘처럼 튈 거고, 광부들은 머릿수만 채울 정도인데, 잭 일행 12명이 빠져서 쓸모가 없겠죠. 더구나 그나마 마을에서 남아 있던 전투 인원도 싹 다 긁어모아서 여기 있으니까, 남은 건…….”
“노약자들!”
“엘프들 숫자가 적어도 그 정도면 해 볼 만하죠. 아까 가까이서 케빈의 귀를 봤을 때 뭔가가 부자연스러웠거든요.”
“부자연스러워? 뭐가?”
“그 새끼, 귀요. 그건 분명 오래된 상처였어요. 2년은 됐겠죠. 거기에 피만 칠한 거예요.”
“그렇다면……!”
“어쩐지 처음에 제 얼굴을 보자마자 알아보는 게 좀 수상했죠.”
“그럼 우리도 마을에 가야 하지 않나?”
“여태까지 제 이야기 제대로 들으셨어요? 잭 일행 없이 우리끼리 가면, 머릿수가 딸린다고요!”
이야기를 마친 두 사람은 수색을 재개했다.
개울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