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잘려 나간 귀 (5)
“히이이익!”
태구는 제자리에 주저앉아 바지에 오줌을 쌌다.
“으아아아! 건기야! 나 죽는다!”
‘싸우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어! 날아오는 광선은 세상에서 가장 평등하고 잔인해. 다리가 불편하다고 해서 봐주지 않아.’
윌리는 건기의 말이 떠올랐다.
살고 싶으면 싸워야 한다.
생각 같은 건 사치다.
엘프가 어린 그에게서 돌아선 채 태구를 노리고 있었다.
그는 태구가 그랬듯이 바닥에 떨어진 단검을 주었다.
“으아아악!”
윌리는 뒤에서 엘프를 덮쳤다.
하지만 그 순간,
왼쪽 다리가 미끄러지며 앞으로 넘어졌다.
푹.
단검이 엘프의 왼쪽 발목에 박히며 칼날이 부러졌다.
“크윽!”
엘프는 움찔거리며 몸을 돌리려 했다.
하지만 칼날은 왼쪽 발목의 아킬레스건을 정확하게 끊은 상태.
그는 한쪽으로 비틀거리며 벽에 몸을 부딪쳤다.
“젠장! 망할 애새끼!”
엘프는 거칠게 손을 휘둘러 손등으로 윌리의 머리를 후려쳤다.
윌리는 기절.
더 이상 싸울 수 없었다.
“죽어라!”
엘프는 쓰러진 윌리의 목에 자신의 단검을 꽂으려 했다.
서걱.
뭔가가 잘리는 소리와 함께 윌리의 얼굴에 피가 튀겼다.
“윌리야!”
태구는 크게 외쳤다.
그러나 잠시 후,
윌리의 얼굴에 묻은 피가 솟구친 것이 아니라 떨어진 것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아저씨.”
건기의 목소리.
태구는 자신 옆에 선 건기를 돌아봤다.
엘프는 목이 잘린 채 사망.
건기는 막 자른 엘프의 머리를 들고 있었다.
엘프의 머리는 잘렸단 사실도 모른 채 환희에 찬 표정 그대로 굳어 있었다.
***
삼십 분 전.
건기 일행이 도착했을 때 마을은 초토화된 상태였다.
건기와 맥,
그리고 구출한 잭과 광부들.
마을을 학살하고 있던 엘프는 고작 넷.
둘은 상처투성이에 전신이 피범벅이었고,
하나는 배신자 케빈,
다른 하나는 셋과는 완전히 분위기가 달랐다.
“응?”
건기와 맥은 도망치는 주민들과 달리 그 넷을 향해 걸어갔다.
엘프들은 아직 일행을 발견하지 못했다.
건기는 맥과 광부들을 모아 놓고 지시를 내렸다.
“뭉쳐 다니면 눈에 띄니까, 둘씩 짝을 지어서 흩어져. 녀석들은 지금 저항할 줄 모르는 사람들만 상대해서 긴장이 풀어진 상태니까, 포위만 해도 이길 수 있어.”
방심은 최대의 적.
엘프들은 주민들을 가축처럼 도살하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광부들은 건기의 지시대로,
둘씩 짝을 지어 흩어졌다.
마침 엘프들도 분산.
한 명은 보안관 사무소,
한 명은 평범한 민가,
한 명은 관리관 사무소,
케빈은 길가를 서성였다.
건기의 시선은 그 중 관리관 사무소로 들어가는 엘프에게 꽂혔다.
“저 녀석을 맡죠.”
건기와 맥은 관리관 사무소 문 앞에 섰다.
그리고 들어가기 전,
건기는 노멀소드를 꺼내들며 맥에게 신신당부했다.
“저 혼자 들어갈게요. 문 밖에서 계시다가 부르면 들어오세요.”
“알았네.”
건기는 홀로 사무소 안으로 돌입했다.
사무소 문은 열린 상태.
덕분에 문 여는 소리를 내지 않고 들어갈 수 있었다.
긴 생머리의 엘프.
그는 관리관의 책상에서 뭔가를 찾는 데 바빴다.
건기는 그의 등 뒤로 다가가 검을 댔다.
“움직이지 마.”
놀랄 법도 한데,
엘프는 조금의 동요 없이 즉각 양손을 들어 올렸다.
“천천히 돌아서.”
엘프는 뒤로 돌아 건기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건기는 그의 얼굴을 본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네가 주모자냐?”
엘프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하지 않았다.
건기는 혼자 떠들었다.
“그냥 감이지만, 왠지 너인 것 같아. 넌 정체가 뭐지? 다른 엘프와는 분위기가 좀 다른데?”
건기는 천천히 검을 들어 엘프의 옆머리를 걷었다.
그리고 그의 귀가 잘려 있는 것을 확인했다.
“엘프 새끼들이 참 영악하단 말이야. 귀만 자르면 사람하고 똑같거든. 물론 기분 나쁠 정도로 잘생겨서 티가 나지만…….”
엘프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건기는 그 변화를 눈치채고는 계속 즐겁게 떠들었다.
“이 사단을 만든 게 너지? 엘프들은 웬만하면, 마을까진 공격하지 않거든. 목적이 뭐야?”
엘프는 피식 건기를 비웃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알 것 없다.”
“알 것 없어?”
건기는 머리칼을 들고 있던 검날을 엘프의 뺨에 가져다 댔다.
검날이 엘프의 뺨을 누르자, 살갗이 살짝 베이며 피가 흘렀다.
“소용없다.”
“메피스민이 보낸 거지?”
흠칫.
엘프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건기는 활짝 웃었다.
“봐봐. 잘만 말해 주고 있잖아? 뭘 찾고 있었지?”
“아직은 때가 아니다.”
“그건 네 사정이고. 내 사정은 알고 싶거든. 날 끌어들인 이유가 뭐지? 메피스민이 그러라고 시킨 거냐? 날 엿 먹이라고 그러든?”
처음부터 끝까지.
건기는 메피스민의 손아귀에서 놀아난 기분이었다.
마을 초토화는 꽤 오래 전부터 계획된 것일 텐데,
왜 갑자기 자신이 끼어들게 된 것인지 영문을 몰랐다.
엘프는 눈과 입을 다물었다.
건기는 그것을 대답으로 받아들이고는 엘프의 목을 베기 위해 그의 뺨에서 검을 뗐다.
그 순간,
엘프는 작정한 듯이 건기에게 돌진해 왔다.
그러나 건기는 씩 웃으며 옆으로 엘프를 피했다.
“너무 초보적……!”
방어 자세 후 상황을 보려던 건기는 어이가 없었다.
엘프는 그대로 도주.
문 앞을 지키던 맥을 가볍게 제치며 사라졌다.
건기는 후다닥 사무소를 나왔지만, 엘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더럽게 빠르네.”
스탯상으로는 엘프가 우위.
건기는 추격을 포기하고,
대신 다른 엘프들을 사냥했다.
“죽어라!”
광부들에게 포위된 엘프들은 매우 손쉬운 사냥감이었다.
광부들이 포위하면,
건기가 마무리.
도망친 한 녀석을 제외하고,
엘프들은 빠르게 제거됐다.
덕분에 건기의 스탯은 폭발적으로 상승했다.
[근력이 올랐습니다.]
[순발력이 올랐습니다.]
[지구력이 올랐습니다.]
광부들은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며 환호를 했지만,
너무나 초라한 승리였다.
유일한 포로, 케빈.
그는 끝까지 저항하다가 상처투성이가 되어 붙잡혔다.
마을 주민들은 피눈물을 흘리면서 그를 에워쌌다.
건기는 그의 멱살을 잡으며 물었다.
“왜 날 끌어들였지? 실패하고 싶어서 환장한 거냐?”
케빈은 포기한 것인지, 순순히 대답했다.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 ‘그분’의 뜻은 절대적이니까. 설사 오랜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도, 그분의 뜻이 더 중요하다.”
건기는 혀를 차면서 케빈을 그냥 땅바닥에 내던졌다.
그러자 주민들이 그를 뒤로 밀치면서 케빈에게 원한 담긴 탄식을 내뱉었다.
“왜 그랬어? 도대체 왜? 우리가 뭘 잘못했는데?”
“우린 그저 열심히 산 것밖에 없어. 왜 우릴 속인 거야?”
“우린 아무 잘못 없어. MGF에 가서 따지란 말이야!”
건기는 완전히 지쳤기에 가만히 주민들과 케빈의 대화를 들었다.
케빈은 악에 받쳐서 말했다.
“너희가 인간이기 때문이지! 너희가 우리의 터전을 짓밟았으니, 우리도 너희의 터전을 짓밟을 것이다! 뿌린 대로 거둔다! 그것뿐이다! 우리의 마탑을 되찾을 때까지, 우린 멈추지 않는다!”
주민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들은 피해자.
케빈은 가해자.
더 이상 그들에게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주민들은 케빈에게 달려들어 맨손과 맨발로 그를 두들겼다.
살과 뼈가 짓이겨지는 와중에도 케빈은 소리쳤다.
“‘마탑의 달’에 걸고! 영원히 너희를 증오하겠다! 이 땅에 숨어든 너희 해충들을 박멸……!”
케빈은 자신의 성대가 뭉개지고,
숨이 끊어질 때까지 저항했다.
건기는 죽어 가는 그와 그를 죽이는 주민들을 씁쓸히 지켜봤다.
“마탑의 달…….”
건기는 전생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마탑의 달.
엘프들은 죽기 직전,
자주 그것을 입에 올렸다.
그는 나중에 그 실체를 확인했기에 저렇게 떠드는 이유를 알고 있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저 말을 들을 때마다 자신의 손에 죽어 간 엘프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다들 하나같이 원한과 분노, 그리고 깊은 슬픔이 담겨 있었다.
마을은 초토화.
대부분의 주민이 목숨을 잃었고, 그나마 살아남은 주민들도 멀쩡한 이가 없었다.
관리관 사망.
보안관인 밤비노는 중상.
부보안관은 맥 혼자 생존.
현상금 사냥꾼 전원 도주.
사실상 마을로서는 끝장난 상태.
주민들은 일단 살아남았단 사실에 기뻐했지만,
이내 앞날을 걱정해야만 했다.
건기 일행에 대한 반응도 극과 극으로 갈렸다.
누군가는 그들에게 감사했지만,
누군가는 아직까지도 그들을 믿지 못했다.
어쩌면 그것이 황야에서 사는 인간의 당연한 생리일지도 몰랐다.
아마 가까운 미래에 이 마을은 해산될 가능성이 컸다.
건기는 보수를 달란 말도 꺼내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보부상을 하려고 쟁여 놨던 물건 중 일부를 생존자들에게 나눠 주기까지 했다.
“그만 떠나는 게 좋겠어요.”
건기 일행은 배웅 하나 없이 조용히 마을을 떠났다.
그나마 스탯이 올랐단 점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
[등급 : C]
[근력 : D] [순발력 : D]
[지구력 : C] [지력 : B]
[스킬 : 리트라이]
***
세 사람은 그대로 계단탑으로 향해서 단숨에 20층까지 올랐다.
20층은 검문소가 있는 층.
그 이상으로 올라가기 위해선 새로운 통행증이 필요했다.
건기 일행은 우선 20층 거주 구역으로 향했다.
그리고 거기 위치한 치안대 건물로 들어갔다.
[통행 발급 부서]
건기는 상담 창구에 자신의 통행증을 내밀었다.
그의 통행증을 본 상담원은 컴퓨터에 뭐라고 입력하더니,
흥겹게 휘파람을 불었다.
“A급 수배범 제거에 엘프 퇴치까지 하셨네요? 최초 등록에 비해서 엄청난 속도신데요?”
“엘프 퇴치가 적혀 있어요?”
“네. 여기에 분명히 ‘남쪽마을에서 온 보고’라고 적혀 있는데요?”
건기는 어이가 없었다.
자신의 기억대로라면,
그 밤비노란 보안관은 지금 중상이라 보고서를 작성할 상태가 아니었다.
도대체 누가 보고를 올렸을까?
그 점이 살짝 궁금하긴 했지만,
누가 올렸든 딱히 상관없었다.
“그럼 통행증 갱신엔 큰 문제가 없겠네요? 그렇죠?”
“보통은 기본적인 심사를 하지만, 이건기 씨 정도의 경력이라면…… 그렇죠.”
상담원은 흔쾌히 정식 통행증에 도장을 찍었다.
그리고 웃는 얼굴로 건기에게 통행증을 돌려줬다.
“앞으로의 활약을 기대할게요.”
건기는 통행증을 받아 도장을 확인했다.
“엘프들한테 속아서 뺑뺑이 돈 게 아주 허사는 아니었네.”
앞으로 40층까지는 프리패스.
그것으로 충분했다.
건기는 태구와 윌리에게 돌아와 말했다.
“이제부턴 정규 루트로만 가도록 할게요. 지도도 제대로 구입하고, 안전하게 가도록 해요.”
“그게 좋겠지?”
태구와 윌리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
세 사람은 지도를 사서 빠르게 계단탑을 올랐다.
한편, 건기는 혼자 머릿속이 복잡했다.
밤비노.
그는 건기가 전생에서 싸운 적이었다.
썬더 블레이드를 그냥 맷집으로 버티면서 끝까지 저항한 남자.
A급 각성자치곤 쓰러뜨리는 데 상당히 고생한 편이었다.
다만 그 멍청함은 옥에 티였다.
“아직은 강해지기 전이구나.”
건기의 기억이 맞다면,
그는 언젠가 80층에 있는 정상 도시의 치안대 본부로 고속 승진할 것이었다.
“분명히 ‘그 사건’에 엮여서 출세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건기는 미래에 벌어질 어떤 사건에 대비하기 위해 보부상으로서의 경력이 필요했다.
그 사건을 잘만 넘기면 전생보다 훨씬 더 탄탄하게 마왕 토벌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일행은 특별한 문제없이 단번에 39층에 도달.
40층에 가기 전 들른 마을에서 보부상으로서 구입했던 물건들을 팔기로 했다.
“살 거면 사고, 꼬우면 꺼져!”
건기 일행은 마을 관리관에게 허락을 받은 후,
길가에 돗자리를 깔고 노점상을 열었다.
물건은 예전에 구입한 네 가지.
소금, 설탕, 식용유, 생수.
각각 백만 원 어치였다.
“오오! 보부상이다!”
“마침 식용유가 다 떨어졌는데, 잘됐네.”
“혹시 술 종류는 없나?”
다행히 주민들의 반응은 긍정적.
물건은 성황리에 팔렸다.
척박한 황야에서 생필품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
가게 주인이 물건을 채워 놓길 기다리든가,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거주 구역에 다녀오든가,
아님 보부상을 기다리든가.
덕분에 보부상이 파는 물건은 부르는 게 값이었다.
개울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