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후 신학대학에 진학해 목사님이 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기 때문에 손찬웅은 은퇴를 선언한 것이 아쉽지 않았다. 그러나 은퇴 기사에 달리는 댓글이나 미니홈피에 올라오는 팬들의 글을 읽으며 아쉬움이 몰려왔다. 아직까지 자신을 기억하고 응원했던 팬들이 이렇게 많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난 뒤 후회가 밀려왔다. 더 잘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과 미안함이 손찬웅의 발걸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시원섭섭한 표정으로 e스포츠와 안녕을 고한 손찬웅. e스포츠로 인해 인생이 송두리째 바뀐 손찬웅이 들려주는 솔직 담백한 이야기 속으로 지금부터 함께 빠져보자.
◆어느 순간 찾아온 손님
손찬웅이 목사가 되겠다고 결심한 것은 한 순간이었다. 뱃속에 있을 때부터 교회에 다녔던 손찬웅은 프로게이머를 한 뒤 교회를 다니지 못했고 항상 그것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허리 디스크 판정을 받은 뒤 손찬웅은 은퇴를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장래에 대한 고민을 하던 중 손찬웅은 갑자기 머리 속에서 "목사가 돼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누가 이야기한 것도 아니에요. 허리가 아파 게임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자 미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됐어요. 많은 고민에 휩싸여 있던 상황에서 갑자기 '목사가 돼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순식간에 들었던 생각이었기 때문에 신기했어요. 신앙을 전파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때부터 기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후 손찬웅은 감독님께 양해를 구한 뒤 새벽 기도를 다니기 시작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기도하면서 마음을 굳혔다. 어차피 허리가 아파 게임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목사가 되겠다는 결심은 점점 굳어졌다.
"어떤 목사가 되겠다거나 어떻게 공부를 하겠다는 구체적인 생각은 아직 없어요. 군대에 다녀온 뒤 신학대학에 진학하는 것까지 계획을 세웠어요. 남은 것들은 차근차근 고민할 생각입니다."
◆짧은 순간 모든 것을 바꿔 놓은 e스포츠
인생에서 6년이라는 기간은 짧을 수도, 길 수도 있다. 평균 수명이 늘어 80년은 족히 살 수 있는 상황에서 6년은 긴 시간은 아니다. 그러나 손찬웅에게 화승에서 프로게이머를 한 6년이라는 세월은 인생을 바꿔 놓은 엄청난 사건이었다.
"목사가 되겠다는 결심도 결국 프로게이머를 하면서 저에게 찾아온 것이잖아요. 화승에서 프로게이머를 하면서 정말 많은 것을 보고 느꼈어요. 제 인생을 바꿔놓았다고 생각해요."
손찬웅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누가 뭐래도 동료들이다. 6년 동안 한 공간에서 생활하면서 평생 누구와도 쌓을 수 없는 진한 우정을 나눴다. 이제동, 손주흥, 오영종, 김경모, 노영훈 등은 손찬웅 인생에서 얻은 가장 최고의 동료이자 선물이었다.
"은퇴를 결심하고 미니 홈피에 글을 쓴 뒤 동료들과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정말 정이 많이 들었어요. 평생 이보다 더 좋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어요."
손찬웅이 평생 가야 할 길을 제시해주고 평생 함께 할 친구를 얻게 해준 e스포츠를 절대 잊을 수 없을 것이라며 그는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O형 남자이고픈 손찬웅
손찬웅이 e스포츠에서 얻은 것이 꿈과 친구만은 아니다. 23년 살면서 손찬웅은 자신이 O형인 줄 알고 있었지만 프로게이머로 살아가면서 자신이 A형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고 한다.
"제가 A형이라는 것을 올해 초에 알았어요. KT (우)정호형에게 헌혈증을 보내기 위해 혈액형을 검사했거든요. O형은 혈소판을 주는 것이 좋다고 하길래 혈소판 추출 헌혈을 하려고 했는데 간호사분이 'A형이라 안 된다'고 말씀하시는 거에요. 23년 동안 O형이라고 자부하고 살았는데 순식간에 A형 남자가 된 거죠."
만약 헌혈을 하지 않았다면 손찬웅은 지금까지 자신이 O형인 줄 알고 살았을 것이다. 신기한 것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내내 신체검사에서 O형이 나왔고 심지어는 군대를 가기 위해 신체검사를 받을 때도 O형이 나왔단다. 그런데 갑자기 A형으로 자신의 피가 바뀐 것을 보면서 손찬웅은 혈액형이 중간에 바뀔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안 믿으시는 눈치인데 정말이에요(웃음).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신체검사 때 분명 O형으로 나왔다니까요(웃음). 프로게이머를 하면서 혈액형이 변한 것 같아요(웃음). e스포츠가 혈액형도 변하게 한다니까요(웃음). 이 정도면 제 인생이 e스포츠로 인해 많이 달라졌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겠죠(웃음)?"
◆선수들과의 추억
손찬웅은 인터뷰 내내 한 선수의 칭찬을 입이 마르도록 했다. 바로 화승 오즈 에이스 이제동이었다. 마인드적인 면에서 이제동을 따라갈 프로게이머는 절대 없다고 손찬웅은 단언했다.
"나는 왜 (이)제동이처럼 하지 못할까 고민하던 시기가 있었어요. 팀에 긴 휴가가 주어졌을 때 (이)제동이는 개인리그 때문에 연습을 해야 할 때가 많았어요. 솔직히 저도 그렇고 다른 선수들은 그런 상황이 되면 쉬면서 연습을 하거든요? 그런데 이제동에게는 예외가 없어요. 프로리그 경기를 준비할 때처럼 연습 스케줄에 맞춰 한 시도 쉬지 않고 연습해요. 솔직히 그러기 힘들거든요."
하루는 손찬웅이 하도 궁금해 이제동에게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냐"고 물어봤단다. 무언가 거창한 대답을 원했던 손찬웅은 이제동의 답변에 맥이 빠질 수 밖에 없었다.
"(이)제동이가 '해야 되는 거잖아'라고 딱 한마디 하더라고요. 그때 깨달았죠. 이제동은 태어날 때부터 프로게이머였다고(웃음). 프로게이머를 하면서 딱 하나 후회되는 점이 있다면 이제동처럼 프로게이머 생활을 해보지 못했다는 거에요. 정말 대단한 선수인 것 같아요."
얼마 후 이제동, 손주흥, 김경모, 오영종, 노영훈과 여행을 갈 계획이라고 밝힌 손찬웅은 "정말 기대된다"며 설렘을 감추지 못했다.
◆e스포츠 규정을 바꾼 사나이
손찬웅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자신의 손으로 규정을 바꾼 일이다. 김재춘과 스타리그 경기에서 상대가 GG를 선언했다고 착각하고 먼저 GG를 쳤던 일명 '선GG' 사건. 손찬웅의 실수로 규정이 강화됐고 이로 인해 웃지 못할 해프닝이 많이 생겨났다.
"신상문 선수가 'P'를 두 번 누르는 바람에 몰수패가 선언된 사건도 그렇고 스타리그에서 (박)태민이형이 실수로 채팅창에 'ㅎㅎ'를 쳤다가 몰수패 당한 사건도 기억이 나네요. 공교롭게도 (박)태민이 형 사건의 상대는 저였어요(웃음). 채팅과 관련된 사건에는 항상 제가 끼어 있네요(웃음)."
손찬웅은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내가 e스포츠를 더욱 스포츠답게 만든 것 같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e스포츠 규정을 바꾼 사나이, 손찬웅은 그래도 e스포츠에 무언가는 남기고 간 것 같다며 즐거워했다.
◆팬들에게는 항상 미안해
손찬웅은 프로게이머를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팬들과 가졌던 시간이라고 전했다. '르림픽'과 1박2일로 팬들과 캠프를 갔던 기억이 아직까지 최고의 추억으로 남아있다. 특히 여장을 하고 팬들 앞에서 춤을 췄던 추억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 것도 없는 저 같은 사람을 이렇게 응원해 주시는 팬들께는 지금도 감사한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 공존해요. 언제 어디에서건 저를 사랑하고 아껴 주셨던 팬들을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화승 경기만큼은 절대 빼놓지 않고 보겠다며 환하게 웃던 손찬웅. 화승이 우승을 차지할 수 있도록 언제나 기도하고 응원하겠다는 손찬웅은 동료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항상 조언을 아끼지 않으신 코칭 스태프와 동료들 그리고 부족한 저를 응원해 주신 팬들께 감사 드립니다. 비록 선수는 그만둘지언정 팬으로 e스포츠에 계속 남을 테니 더 많은 팬들이 유입될 수 있는 좋은 경기 많이 만들어 주세요. e스포츠 사랑합니다!"
[데일리e스포츠 이소라 기자 sora@dailyesport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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