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선수에게 ‘국본’이라는 명칭이 붙는 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정명훈이 얼마나 대단한 선수였는지, 얼마나 노력하는 선수였는지, 그가 이뤄놓은 업적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그는 e스포츠의 가장 화려했던 시기를 함께 한 최고의 테란으로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국본’ 정명훈의 새로운 도전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도 바로 이 이유에서였을 것입니다. 한 종목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기에 그가 새로운 종목에 그것도 코칭스태프로 도전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임이 분명하기 때문이죠. 게다가 아직까지 그런 사례가 없었기에 더욱 궁금증이 많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샌드박스 게이밍의 리그 오브 레전드팀 멘탈 코치로 합류한 정명훈은 인생에서 처음으로 길을 개척하는 위치에 섰습니다. 그가 성공적으로 역할을 수행한다면 스타크래프트2 선수들뿐만 아니라 리그 오브 레전드 선수들에게도 새로운 길이 열릴 수 있기에 정명훈의 어깨는 더욱 무거울 수밖에 없습니다.
스타크래프트 전설 ‘국본’ 정명훈이 아닌 리그 오브 레전드 코치로 새 이야기를 써 내려갈 정명훈의 이야기를 지금부터 함께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모두를 놀라게 한 새로운 도전
정명훈의 은퇴는 팬들이나 선수들 사이에서는 갑작스러운 소식이었습니다. 2019년 GSL에서 꾸준히 32강, 16강에 이름을 올렸고 중국 스타크래프트2(이하 스타2) 프로리그에서 무려 9승1패라는 놀라운 성적을 기록한 상태였기 때문이죠. 게다가 1, 2위 결정전에서는 7명을 올킬하는 소위 ‘미친’ 활약을 보여줬기에 그의 은퇴 소식은 ‘왜’라는 물음표가 따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변에서도 성적이 나쁘지 않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제가 잡았던 기대치에는 한참 못 미쳤고 스스로 부족함을 많이 느끼고 있었어요. 더 이상 선수 생활을 이어가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몇 달을 고민했어요. 은퇴 발표가 갑작스럽게 느껴지셨겠지만 저는 두 달 전부터 마음을 정리하고 은퇴를 준비했죠.
막판에 7승 올킬을 한 것도 부담감을 내려놓고 마음 편하게 대회에 임하다 보니 성적이 잘 나왔던 것 같아요. 즉 제가 가진 실력이 아니었던 거죠. 물론 계속 그렇게 마음 편하게 하면 안되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게 쉽지 않거든요."
은퇴만으로도 충격적이었는데 그 다음 행보는 더욱 놀라웠습니다. 그가 몸 담은 분야는 스타크래프트였기에 많은 사람들은 팀 리그가 활성화 된 중국에서 코칭 스태프를 할 것이라고 예상했죠. 또는 함께 활동했던 선수들처럼 개인 방송에 도전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전해온 소식은 ‘리그 오브 레전드 팀 코치’였습니다. 정명훈과 리그 오브 레전드는 전혀 상관관계가 없었기에 사람들의 머리 속은 온통 물음표로 가득 찰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그 역시 제안을 받고 우리와 같은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리그 오브 레전드와 아무 상관 없는 자신에게 코치직을 왜 제안했는지 말입니다.
"일단 개인방송은 전혀 생각이 없었어요. 제가 재미있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거든요(웃음). 그리고 사실 저는 스타1 때부터 코치를 꿈꾸고 있었기 때문에 지도자의 길을 고민하고 있었죠. 중국에서 코치직을 제안하면 갈 생각도 있었어요.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하게 샌드박스에서 갑작스럽게 코치 제안이 왔어요. 샌드박스에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선수를 그만둔다는 이야기도 아무에게도 안 했거든요. 그 상황이 당황스러우면서도 참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죠"
이렇게 되니 10년 넘게 RTS 장르에서 프로게이머로 활동한 정명훈에게 리그 오브 레전드 팀의 코치직을 제안한 샌드박스에게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만약 샌드박스의 제안이 없었다면 정명훈의 행보가 이렇게 놀랍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선수들의 멘탈을 잡아줄 수 있고 선수단에 모범이 되는 코치가 필요하다면서 제안을 주셨어요. 아마도 샌드박스가 정규시즌에는 강한데 큰 경기에서 자주 무너지는 모습을 보였기에 그 부분을 보완해 줄 수 있는 코칭 스태프가 필요했던 것 같아요.”
멘탈코치. 정통 스포츠에서는 익숙한 이름이지만 e스포츠에서는 아직 낯선 이름입니다. 정명훈 코치는 스타크래프트 선수 시절 포스트시즌에 19승 9패로 승률 68%를 기록하며 큰 무대에서도 흔들림 없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본인의 경험만으로는 멘탈 코치로서 부족하다며 스포츠 심리학 공부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포스트시즌의 핵심은 중압감을 잘 조절하는 것인데 처음이 어렵지 한 번 만 극복하면 그 뒤로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선수였을 때도 포스트시즌은 잘했거든요(웃음). 지금 제가 게임을 한 판 더해서 선수들에게 하는 조언보다 스포츠 심리학을 공부해서 제가 10년 넘게 해온 경험을 전달하는 게 더 도움이 될 거라고 믿고 있어요. 그래서 관련 서적도 구매해서 공부하고 있고요"
열심히 준비를 하고 있긴 하지만 사실 샌드박스는 정명훈이 속했던 기존 팀들과는 조금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기에 고민이 많았습니다. 나이는 같지만 현역 선수인 '조커' 조재읍이 있고 강병호 감독은 나이가 한 살 어리기 때문이죠. 자신과 비슷한 나이 또래의 코칭 스태프와 어떻게 손발을 맞춰야 할지 고민이 되는 것이 당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저는 조재읍 선수에게 말을 편하게 하고 조재읍 선수는 존댓말을 해서 처음에는 조금 어색했지만 지금은 괜찮아요. 강병호 감독님은 서로 존댓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성격이 진짜 좋으셔서 의사소통 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고요. 그리고 '코코' 신진영 코치는 스타크래프트 선수시절에 같이 팀 생활을 해봤기 때문에 더 편하고 빠르게 적응하고 있는 것 같아요"
걱정과 달리 그는 선수단에 빠르게 녹아 들었습니다. 선수들 역시 정명훈 코치를 환영했습니다. 너무나 다행이었죠. 이제 그는 모든 걱정을 내려 두고 리그 오브 레전드팀과 스타크래프트팀의 차이점을 비교하면서 본인의 경험을 어떻게 적용시켜 선수들을 돌볼지 고민하고 있다고 합니다.
"일단 팀게임이라 선수들의 하루 일과표가 확실한 편이고 게임하면서 말도 많이 해야 하다보니 선수들한테 피로감이 빠르게 그리고 많이 쌓이는 게 느껴지더라고요. 게임에 임하는 자세나 대회를 준비하는 모습은 스타크래프트랑 차이는 없지만 연습이나 대회를 치르는 과정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개인전 종목과는 많이 다르다는 걸 느꼈어요. 어떻게 해결할지는 잘 연구해봐야겠죠"
◆정명훈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정명훈 코치에게 20대는 스타크래프트 뿐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정명훈 코치가 은퇴를 선언했을 때 많은 옛 동료들의 연락을 받았고 샌드박스에서 코치 생활을 시작하게 된 사실을 알렸을 때도 가장 먼저 축하해준 사람들이 바로 옛 동료들 이었습니다.
"다들 축하해줬어요. 제가 잘할 수 있을까 걱정할 때도 모두들 잘할 수 있다고 이야기 해주더라고요. 그리고 스타크래프트 선수 출신 중에 다른 종목 코칭스태프로 일하고 있는 사람이 몇명 있어서 조언을 많이 구했죠. 그 중에서도 얼마 전 오버워치 리그로 진출한 (문)성원이형에게 많이 물어보고 있고요."
옛 동료 중 리그 오브 레전드 챔피언스 코리아에서 그와 깊은 인연이 있는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바로 아프리카 프릭스의 최연성 감독입니다. 그가 SK텔레콤 T1에서 선수로 활동할 최연성 감독은 당시 팀의 코치를 맡고 있었습니다. 스타크래프트에서는 사제 관계였던 두 사람이 리그 오브 레전드에서는 서로를 꺾어야만 하는 상황이 됐습니다.
"사실 최연성 감독님께 아직 연락은 못 드렸어요. 선수 은퇴 전에도 둘 다 e스포츠 업계에서 계속 일한다면 언젠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장소가 LCK 아레나가 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죠. 빨리 연락을 드려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현장에서 만날 때면 늘 반갑게 인사드려야죠"
12년이라는 시간 동안 수 많은 경기에 나섰던 그는 수많은 명경기를 만들어 냈습니다. 개인리그에서도 다섯 차례나 결승 무대에 올랐고 한 차례 우승도 차지했습니다. 아울러 소속됐던 SK텔레콤이 프로리그에서 트로피를 들어올리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죠.
"아직도 수많은 경기가 어제 일 처럼 생각나요. 개인리그에서 처음 우승했을 때, 티빙 스타리그에서 (이)영호와 맞붙었을 때, 광안리에서 (이)제동이형이랑 했던 경기도 모두 생생하게 기억나요. 수많은 경기 중에서도 제 인생 최고의 경기는 2015년 GSL 시즌2에서 (어)윤수와 세종과학기지에서 맞붙었던 엘리전을 꼽을 수 있겠네요. 못 보신 분 있으면 한 번씩 보셨으면 좋겠어요"
10대 후반 프로게이머로 데뷔한 그도 올해 12월이 지나면 벌써 30대입니다. 20대보다는 조금 더 무게감이 생기기 때문인지 서른 살을 앞두고 사람들은 많은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하지만 정명훈 코치는 샌드박스 게이밍에 들어오며 모든 고민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저도 정말 고민이 많았는데 팀에 들어온 뒤로는 너무 바빠서 어떤 고민을 했었는지 생각조차 안 나더라고요. 지금은 서른살이 된다고 스스로 무게감을 가지기 위해 더 성숙해야 한다거나 변화해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그냥 선수 때처럼 한결 같은 생활을 이어가기로 마음먹었어요. 20대는 선수, 30대는 코치, 40대는 감독을 하면 고민 없이 50대까지 맞이할 수 있을 것 같네요(웃음)"
오랜 선수 생활을 마친 뒤에도 e스포츠 업계에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정명훈 코치는 농담처럼 10년 후 e스포츠 업계에서 경력을 이어갈 계획까지 공개했는데요. 그가 생각하는 e스포츠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17살부터 e스포츠에 모든걸 바쳐왔고 가장 좋아하고 잘하는 일이에요. 게임에 대한 애정도 있고 이 업계에서 일하는 게 제 적성인 것 같아요. 그냥 e스포츠가 좋아요.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선수들의 순수한 열정이 매력인 것 같아요."
12년간 프로게이머로서 단 하나의 목표를 바라보고 달려왔던 그는 이제 코치로서 내년에 이루고자 목표를 세웠다고 합니다.
"2020시즌에 팀에 도움이 돼서 월드 챔피언십에 진출했으면 좋겠어요. 선수들에게 더 큰 무대를 경험하게 해주고 싶거든요. 그리고 1년 뒤 다시 인터뷰를 할 기회가 생겼을 때 멘탈 코치라는 직함을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의 능력을 갖추는게 목표에요"
정명훈 코치와의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선수를 위하는 그의 마지막 한마디에 그가 이제는 선수가 아니라 코치라는 사실이 더욱 크게 와 닿았습니다.
"팀에 들어온 뒤로 인터뷰 요청도 들어오고 있고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데 저보다는 저희 팀 선수들에게 더 많은 관심 가져주시고 응원해주시면 저는 그걸로 충분히 기쁠 것 같습니다. 2020년에도 저희 샌드박스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이소라 기자 (sora@dailyesports.com) 구남인 기자 (ni041372@dailyesport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