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순간 티노의 얼굴에서 표정이 싹 사라졌다. 그 모습에 시문은 전보다 더 짙게 웃었다.“거기에 적힌 문구는 자신의 아들이 태어난 날, 녀석이 아버지로서 쓴 겁니다. 언젠가 아들에게 주려고.”“…….”“바로 당신에게 말입니다. 티노 케이(Tino Key).”Dear. T. K. ……T. K.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일이 벌어졌다.태어나 처음 주변 사물을 인지한 순간부터 부모님은 안 계셨다. 죽었다고 확실하게 들은 건 아니지만 당연히 돌아가셨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램에게 묻지 않았고, 램도 먼저 나서서 말하려 들지 않았다. 어차피 램과 복작복작, 요란하게, 위험천만하게 살다 보면 부모님에 대한 생각을 할 짬 같은 건 생기지도 않았다. 티노는 성
2019-07-15
지금 생각하면 테이슨은 황금빛 광선에 닿으면 다치리란 걸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때는 갑작스런 상황과 지독한 고통 때문에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그는 티노가 다친 걸 보고도 놀라지 않았었다. 오히려 다친 티노를 걱정하는 척 저급의 약을 꺼내며 자연스럽게 접근하려 들었지.거기다 독단으로 행동하면서 친위대를 걸고넘어진 것이나, 눈앞에서 시문을 죽이려 든 것이나, 노골적으로 황금의 어스듐을 뺏어 가려 한 것을 보면 애초에 티노를 죽일 작정이었던 게 분명하다. 사탕발림으로 대충 얼버무리기엔 너무 판을 크게 벌렸으니까. 그러면서 티노가 눈치 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죽여야만 한다는 식으로 지껄였다는 게 새삼 기가
이제는 제법 날씨가 추워졌는데 시문은 상처 때문인지 상의를 입지 않고 외투만 어깨에 걸친 상태였다. 그 아래로 두텁게 감겨 있는 붕대가 보였다.티노의 시선이 붕대 위에 닿자 시문은 그 위를 아무렇게나 손으로 툭 쳐 보이며 말했다.“이건 위장입니다. 제가 다 나은 걸 알면 달려들어서 귀찮게 굴 인간들이 무더기로 있으니까요.”공방 사람들을 칭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도 황금의 어스듐을 노리고 있다던 많은 사람들을 말하는 거겠지.“티노 군에게도 같은 약을 썼는데 이상할 정도로 더디게 낫더군요. 씨드 그 자체에 베인 것이라 그런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모레쯤이면 다 나을 겁니다. 아마 흉터는 남을 것 같
“크아아악!”불행히도 테이슨은 세 개의 뿔이 쏘아 내는 세 줄기 황금빛 아래를 지나쳐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황금빛은 테이슨의 몸을 오른쪽 어깨에서부터 사타구니까지 길게 할퀴었다. 그것에 다쳐 본 티노는 보는 것만으로도 그 고통이 전해지는 것 같아 윽, 하고 신음을 흘렸다.“아아악!”테이슨은 바닥에 쓰러져 제대로 몸부림도 치지 못하고 비명만 질렀다. 쓰러진 그의 몸에서 시뻘건 핏줄기가 솟아올랐다 도로 그의 몸에 떨어져 온통 붉게 물들였다.그제야 검은 남자는 무게감 있게 바닥에 발을 디뎠다. 그는 더 이상 현란하게 허공을 헤집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테이슨은 그것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설령 봤다 해도 공격할
티노의 몸이 허공에 붕 떠올랐다. 5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불과 며칠 전에 그랬던 것처럼 중력이 모두 사라진 듯이 가볍고도 가벼운 부유감에 감싸였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어안이 벙벙해도, 대량 출혈 때문에 어지러워도 알 수 있었다. 아르카가 또 구해 준 것이다.티노를 감싼 채 뒤로 점프했던 아르카의 발이 땅에 닿고 나서야 사라졌던 중력이 되돌아왔다. 아르카가 나직이 물었다.“다친 곳은?”“없는 것 같은데…….”확신하지 못한 것은 감각 자체가 둔해져 있었기 때문이다.머리를 통해 입 밖에 나온 게 아니라 버릇처럼 자연스럽게 물었던 아르카는 알아서 티노의 몸을 훑어본 뒤 그를 땅에 내려놓았다.“넌?”“대단한 건 없다.”그러
티노는 자신이 굳게 움켜쥐고 있는 황금의 어스듐이 어떤 물건인지 떠올렸다. 테이슨의 말이 맞았다. 이것이 만병통치약이라면 티노의 팔은 벌써 나았어야 했다.시문의 연구가 실패한 것일까? 아니면 달리 사용방법이 있는 것일까? 전자라면 시문이 걱정했던 위험은 사라지는 것이지만, 후자라면…….티노와 같은 결론에 다다른 테이슨은 황급히 시문을 돌아보았다. 만약 달리 사용법이 있는 거라면 자신의 팔을 여태 내버려 둔 티노는 그것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걸 아는 사람은 시문밖에 없는 것이다.시문은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도 옷도 죄다 피로 젖어서는, 예의 색깔 없는 미소를 그린 채로. 고통의 기색마저 없어서 새파
티노는 아쉬움이 뚝뚝 넘치는 얼굴로 황금의 어스듐을 바라보며 말하다가 퍼뜩 시문을 돌아보았다.“전에 어스듐을 폭파했을 때요.”“…….”왜 그때는 생각을 하지 못한 걸까? 이 정도 씨드를 퍼부은 어스듐이 폭파되었을 때 어스듐만 얌전히 파괴되고 끝날 리 없다. 거기다 완성품을 파괴한다 해도 기계와 시문만 있다면 얼마든지 새로 시작할 수 있다. 자신의 연구를 묻어 버리려는 시문이 거기까지 생각을 못 했을 리 없다.“시문 님은, 연구실은 어떻게 됐어요?”“……기계는 반파되어서 1년 가까이 수리해야 했습니다. 저는 갈비뼈가 몇 대 나가고 어깨에 큰 관통상을 입고 머리를 다쳤었지요.”시문은 어디까지나 담담하게 답했다.“공방
티노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벌렸다. 이런 장치가 있다는 것에 놀란 것이 아니라, 그걸 자신에게 알려 준 것에 놀랐다. 티노의 힘으로는 이 비밀 작업실의 문을 열지 못한다. 그것은 시문에게 있어 또 하나의 안전장치이지 않았을까?“이런 거 알려 줘도 되는 거예요?”“안에만 있는 장치니까요. 그리고…….”시문은 비밀 작업실 안을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 끝에는 비밀 작업실 전체를 환하게 밝히고 있는 황금빛으로 빛나는 어스듐이 있었다.“완성이 얼마 안 남았으니까요.”“……?”티노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시문을 올려다봤지만 시문은 더 설명할 생각이 없는 듯 철판을 원래대로 되돌리고 조명을 켰다. 작업은
라디는 두 손으로 그것을 조심스럽게 받아 들고는 깊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고쳐졌는지 여부와는 상관없이 고마움을 표현한 것이다. 그런 라디에게 티노는 씩 웃으며 태연히 말했다.“그런 인사는 고쳐졌는지 확인한 뒤에 해야지.”“……후후, 알았어.”라디는 조금은 어색하게 웃더니 냉큼 원석 세척실로 달려갔다. 그 뒤를 티노가 느긋하게 따랐다.티노가 원석 세척실 앞에 도착했을 때 열린 문 안쪽에서 라디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그녀는 벌써 공구의 연결단자에 회로를 연결하여 원석을 잘라 보고 있었다. 그리곤 감동과 감격으로 일렁거리는 눈으로 티노를 돌아보았다.“쓸 만해?”“쓸 만한 것 이상이야!”“그래? 그럼 이제 인사해도 괜
웨이가 넉살 좋게 실실거리며 물었다. 그 모습에 힐은 피식 웃었다.“그래. 그러니 제발 이번엔 정신 차리고 수준에 맞는 걸 만들어라.”“이상을 높게 가져야지요!”“최종 목표는 높게 잡아도 상관없지만 현실은 수준에 맞춰 살아라. 너도 이제 수습 딱지는 떼야지!”“저도 이번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수습 기술자에서 벗어날 생각이에요! 걱정 마세요!”웨이가 의외로 결연한 모습을 보이자 힐을 비롯한 직원들은 잘 생각했다며 격려해 주었다. 얄미운 점도 있고, 한심한 점도 있지만 공방의 몇 없는 젊은 인재다 보니 그들로서는 자연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비주류인 공방이라 더욱 그랬다.“그럼 티노, 우린 가 보마. 이 녀석도
시문의 부름에 티노는 흠칫했다. 부주의하게도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해 버렸다. 도둑 회로를 티노가 알고 있다는 것을 시문에게 들켜 봐야 좋을 것이 없는데! 그런데 시문은 지극히 여상스럽게 물을 뿐이었다. ……못 들은 걸까?“공간이 얼마나 생긴 것 같습니까?”“별로 없어요. 금방 다시 차 버릴 것 같은데요?”“그렇습니까?”시문은 다시 어스듐 영상을 보며 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이번엔 씨드를 쑤셔 넣을 공간이 얼마나 생겼는지 알아보려는 거겠지.“흠……. 예상보다 빠르게 결과가 나오겠군요.”몇 년을 연구해 온 결과물을 곧 볼 수 있게 됐다는 것인데도 어째서인지 시문의 말투는 지극히 평이했다. 아르카는 늘 ‘완전한 분해’
그리곤 여전히 재미있다는 눈으로 티노를 보며 물었다.“테이슨 경이 저와 케이와 셋이서 사이좋게 지냈었다고 하던가요?”“선배님과 함께 셋이서 종종 어울렸었다고 했어요. 참 즐거웠었다고…….”“역시 자기 입장에서 미화시켜 말했군요. 정확하게는 저와 케이 사이에 눈치 없이 끼어들어서 떨어져 나가질 않았던 겁니다. 테이슨 경은 예전부터 그런 경향이 있었죠.”“하지만 정말 그분을 존경하는 것 같던데요. 제게 종종 말씀해 주셨어요.”“그건 티노 군이 듣기에 좋은 소리라서 한 겁니다.”시문의 표정, 태도, 음성에는 차가운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줄곧 재미있어 하는 모습이었다. 그것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테이슨의 생각
그리곤 다시 한 번 푸핫, 하고 묘한 숨을 내쉬더니 허리를 쭉 펴고 티노를 새삼 곧게 마주보았다.“이번 거래는 나와 하는 것이 아니라 친위대와 하는 거다. 거래 조건은 단순히 사관학교에 추천받는 것 이상이지. 사관학교 추천은 물론, 졸업 후 친위대에 받아 준다는 조건이니까.”“와……!”티노는 과장되게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떡 벌렸다. 조건이 조건이니만큼 티노의 과장된 반응은 전혀 ‘과장’으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은 별 관심 없었고 구미가 당기지도 않았다. 티노는 테이슨과의 거래가 끝난 상태에서 시문과 거래했고 비밀을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친위대나 사관학교의 입성이 걸려 있다 해도 약속을 깰 생각은 없다
그제야 테이슨의 깜짝 방문을 납득한 티노는 씨익 웃었다.“별일 없었어요. 들킬 뻔하긴 했지만.”“뭐?!”테이슨은 놀라서 물었지만 몰래 들어온 입장임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는지 목소리 자체는 작았다. 티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여 보이곤 침대에 가 앉았다. 단검은 다시 베개 밑의 검집에 넣어 두었다.“친위대가 공방을 수색했을 때 웨이 선배가 제 짐을 뒤졌더라고요. 자물쇠를 채워 놨었는데 말이죠.”“네 짐이라면…….”테이슨도 사진에 생각이 미쳤는지 안색이 흐려졌다.“다행히 웨이 선배가 잔뜩 흥분해 가지고는, 알아서 일을 망쳐 줘서 대충 넘어가긴 했어요.”“그래?”당연한 거지만 테이슨은 티노가 한 말을 완벽
식사를 받는 순간까지 따라붙던 시선들은 티노가 자리에 앉자마자 숱한 질문들로 변하여 사방에서 튀어나왔다.“시문 님의 작업실에 들어갔다는 게 사실이야?”“작업실은 어땠어?”“시문 님이 작업 중이던 작품도 봤냐?”“시문 님은 평소에 뭘 하고 계시든?”“시문 님이 뭘 시키신 거야?”“설마 네게 기술을 가르쳐 주시는 건 아니겠지? 넌 이쪽 방면으론 관심이 없잖아?”“왜 하필 너냐? 가장 신참인데!”질문들이 끝없이 쏟아지는 탓에 오히려 하나도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힐이 손뼉을 짝짝 쳐서 주위를 진정시켰다.“조용, 조용! 뭘 물어보는지 하나도 모르겠잖아!”“그러니까 말이에요.”티노가 끼어들어 추임새를 놔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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