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딘은 또한 TDS의 사장인 시로의 일화들을 들으며 그 사람과 TDS라는 회사에 대한 많은 궁금증이 들기도 했다. 여하튼 아이딘은 루드 의원을 만남으로써 돈에 대한 부담감은 줄어들었다.
술에 취한 란돌 대장을 장시간에 설득한 후에서야 아이딘과 잭슨은 마음 편하게 걸어서 원샷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어느덧 밤하늘에는 은하수가 펼쳐져 있었다. 계절상 여름이라 그런지 공기는 살짝 더운 기운이 느껴졌으며 이름 모를 곤충이 우는 소리가 멀리 숲 속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저 멀리 은하수에 사람이 가는 날이 오려나.”
잭슨이 중얼거렸다.
“하아, 그놈의 우주정거장만 떨어지지 않았다면 세상이 달라졌을까?”
잭슨이 중얼거리는 말을 듣던 아이딘에게 문득 희미한 기억이 떠올랐다. 대재앙 이전의 전쟁. 그 전쟁의 발단은 우주정거장의 추락. 그러나 그 이상 자세한 건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 역시 뿌연 기억 중에 하나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호퍼는 지금 뭐 하고 있을까?”
“모르겠어. 원샷에 나와 있을 것 같은데.”
“호퍼 문제는 의논해서 해결해 주자.”
아이딘은 일단 루드 의원의 돈으로 호퍼를 도와주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실제 돈이 필요할지 안 할지는 모르겠지만 돈이 준비되다 보니 좀 더 마음이 편하다 싶었다.
“내일 호퍼와 함께 녀석들을 만나야겠어.”
아이딘이 말했다.
“그래. 그놈들이 무슨 꿍꿍이속이 있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어수룩한 호퍼보다는 네가 가면 상황파악이 정확히 되지 않을까? 그런데 힘자랑은 하지 마. 그 애들 무서운 녀석들이야. 게다가 워낙 큰 컴퍼니다 보니 영향력이 꽤나 크다고.”
아이딘은 잭슨의 걱정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야쿠자들은 카타나라는 무기를 사용하는데 한 번에 뼈가 깨끗하게 잘려 나갈 정도로 날카롭다고.”
“뼈조차도 깨끗하게 자를 정도로 위력적이라.”
“중세 유럽에서 쓰던 참수용 도끼도 한 방으로 목이 잘리는 경우가 드물었다는데 카타나는 한 번만 휘둘러도 목이 깨끗하게 잘려 나간다니 조심해야 해.”
인간은 수없이 많은 도구를 만들었다. 그중에는 사람을 살리는 도구도 있었지만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도구도 있었다. ‘무기’라고 불리는 것은 그 양면성을 지니고 있었다.
칼 역시 물건을 자르는 데에 이기(利器)가 될 수 있지만 때로는 그것으로 사람의 목숨도 빼앗는 흉기(凶器)가 될 수도 있다. 아이딘은 과연 자신의 존재는 이기와 흉기 중 어느 쪽일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이딘과 잭슨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어느새 원샷의 입구에 다다랐다. 늦은 시간 예리엘이 혼자서 가게 문을 닫으려 하고 있었다.
“예리엘, 미안해. 같이 갔으면 좋았는데.”
아이딘이 후다닥 달려가 예리엘을 도우며 미안해한다.
“괜찮아. 어차피 오늘 끝내야 할 일이 있었거든.”
예리엘은 며칠 전 의뢰받은 산탄총에 사거리를 늘리는 개조 작업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작업이 작업이니만큼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다 마무리된 거야?”
“거의.”
“헤헤…… 덕분에 내가 재미있었어. 정말 고마워, 예리엘.”
“뭐 나한테까지 고마워할 필요가 있어. 다 아이딘 덕분이지.”
아이딘과 잭슨은 작업대를 정리한다. 예리엘의 작업이 꽤나 복잡한 작업이었는지 여기저기 흩어진 도면과 계산수치들이 작업대 위에 잔뜩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어. 이거 호퍼 장갑이네.”
잭슨이 작업대에 놓여 있는 호퍼의 장갑을 보았다.
“호퍼 왔다 갔어?”
“아. 아까 잠깐 왔었는데 조금 있다 나갔어. 급한 일이 있다고.”
“이제 좀 괜찮아졌으려나?”
“어. 많이 나아진 것 같던데. 아까 아이딘이 도와줄 거라는 얘기까지 해 줬더니 좋다고 뛰쳐나가던데. 아까 아이딘이 맡겨 둔 돈까지 가지고 말이야.”
“뭐라고?”
잭슨과 아이딘이 동시에 소리친다.
“그걸 주면 어떡해? 예리엘.”
“뭐, 어떡하긴. 원래 준다고 그런 거 아니었어?”
“그렇긴 하지만…….”
아이딘의 대답이 잦아든다.
“그게 얼마나 큰돈인데? 2만 크리나 된다고!”
“그랬나? 좀 많긴 하네. 뭐 그래서?”
돈에 대해서는 별 신경 안 쓰는 예리엘이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래서’라니.
사실 일을 도와준다고 하긴 하지만 돈 한 푼 안 내고 먹고 자는 입장에서 아이딘이 뭐라 하기는 참으로 애매한 상황이다. 잭슨도 두말할 것 없고.
“호퍼가 혹시 지금 록트리온에 간 게 아닐까?”
아이딘이 말한다.
“에이. 설마.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가지 않을까?”
잭슨이 아니란 듯 손바닥을 휘젓는다.
“어. 호퍼, 자기 빨리 록트리온에 간다고 나갔는데.”
예리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잭슨과 아이딘이 원샷을 뛰쳐나간다.
* * *
록트리온으로 가는 정기버스를 잡아타고 거의 두 시간을 꼬박 달려 록트리온에 도착했다. 록트리온과 루디안은 매일 두 시간 간격으로 버스를 운행했다.
루디안과 달리 록트리온은 24시간 영업을 하는 상점이나 도박장들이 많다 보니 의외로 왕래객이 많았다. 전쟁 중이라 이동에 제약이 있긴 하지만 아직까지 교통수단은 신기할 정도로 정확히 운행되고 있었다.
야쿠자의 본거지는 록트리온의 번화가에서 약간 떨어진 변두리에 있었다. 주변에 있는 건물과 달리 동양 분위기에 목재를 많이 사용한 건물이어서 누가 봐도 한눈에 찾을 수 있었다. 록트리온이 목재 산지로 유명하지만 건물을 저렇게 목재로만 짓는다는 게 좀 무모해 보였다. 그렇지만 누구나 쉽게 위치를 찾을 수 있는 장점도 있어 보였다.
“호퍼 이 자식. 미친 거 아냐? 좀 확인이나 하고 가던지 말이야. 돈을 그렇게 몽땅 들고 가 버리면 어떡해.”
“얼마나 급했으면 그랬겠어.”
“호퍼도 그렇지만 예리엘도 그냥 그렇게 돈을 줘 버리면 어떡하자는 거야.”
“계속 호퍼가 불쌍하다고 했잖아.”
야쿠자들의 본거지로 보이는 저택이 눈앞에 보였다. 저택을 둘러싼 담벼락의 정중앙엔 나무로 만든 거대한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문의 양옆으로는 일본도와 권총으로 무장한 야쿠자의 조직원으로 보이는 두 명의 건장한 남자가 문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아이딘 일행이 다가오자 손을 들어 제지했다. 더는 못 간다는 뜻과 무슨 용무인지를 묻는 두 가지 뜻을 내포했다.
그렇지만 아이딘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마치 새 집을 구경하러 온 듯한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저택을 훑어보았다.
“에…… 저기 말씀 좀 묻겠습니다.”
아이딘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서슴없이 말을 건넨다.
“혹시 호퍼라고 덩치 좋은 친구가 여기 오지 않았나요? 민소매 옷에 사슬 목걸이를 하고 다니는 친구인데.”
“무슨 일인데?”
굳이 부정하지 않는 것으로 봐서 호퍼가 이곳에 와 있는 게 분명했다.
“그 친구랑 이야기할 게 있어서요.”
정문 앞 남자 중 한 명이 인터폰으로 내부에 연락을 하더니 안을 가리켰다.
“좋아, 저리로 가.”
* * *
호퍼는 정신이 몽롱했다.
기껏 린의 빚을 갚았는데도 린을 볼 수 없었다. 갚아야 할 돈을 정확히 가져왔는데 린을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무조건 린을 보여 달라고 떼를 썼더니-도자기도 몇 개 부수고 문도 걷어차는 행패를 부렸더니- 다짜고짜 지하실로 끌고 와서 한껏 두들겨 팬 것이다. 웬만한 주먹도 거뜬히 견뎌 낼 정도-아이딘은 예외다-의 맷집을 지닌 호퍼였지만 매에는 장사 없다는 말을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온몸이 멍투성이에 눈가는 퉁퉁 부어올랐다. ‘눈탱이가 밤탱이’라는 표현은 정말 이럴 때 적절한 표현인 것 같다.
“야. 어디서 행패야? 너네 동네에서나 먹힐지 모르겠지만 여기서는 어림도 없어.”
“린이 보고 싶어. 린을 좀 불러 줘.”
“린이 보기 싫다고 말했잖아. 이제 그만하고 정신 좀 차리지.”
호퍼를 두들겨 패던 조직원들이 호퍼의 멱살을 잡은 채 윽박질렀다. 그러자 호퍼가 응얼거린다.
“린을 만나게 해 줘.”
순간 또다시 눈앞에 불꽃이 번쩍였다.
“린은 이미 풀어 주었다니까. 보기 싫다는데 왜 자꾸 엉겨 붙는 거야.”
그러며 호퍼를 또다시 몽둥이로 후려친다.
“으윽.”
고통스러운 소리와 함께 호퍼는 잠시 정신을 잃는다.
“야…… 대충 하고 갖다 버려. 정말 질긴 놈일세.”
조직원 두 명이 호퍼의 양팔을 잡고 입구로 질질 끌고 간다. 그런데 그때였다.
우당탕 소리와 함께 계단에서 조직원 한 명이 데굴데굴 굴러 떨어진다.
“뭐야?!”
호퍼를 두들겨 패던 두 조직원 앞에 두 명의 낯선 남자가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호퍼는 계단 쪽을 바라보더니 찌그러진 얼굴에 애써 미소를 지으며 반색한다. 호퍼가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잭슨!’ 하고 소리쳤다.
“괜찮아?”
잭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조직원 두 명이 두 사람에게 주먹을 휘두른다. 하지만 잭슨이 조직원들의 공격을 피하면서 번개같이 그 둘의 손을 잡아끌어 곧바로 둘의 머리를 심벌즈를 치듯이 서로 박아 버렸다. 아이딘은 바깥을 경계한다.
“이거 사람의 몰골이 아닌데?”
잭슨이 피식거린다.
“아파 죽겠어…… 이게 웃을 일이야?”
호퍼가 잭슨을 질책한다.
“다 네가 자초한 일인데 뭐…….”
수긍하기 때문인지 아파서인지 더 이상 호퍼는 반응하지 않는다.
“빨리 여기서 빠져나가자. 왠지 오래 있어서 좋은 동네는 아닌 거 같다.”
아이딘이 독촉한다. 잭슨은 호퍼를 부축하며 지하실의 계단을 올라선다.
야쿠자 본거지는 넓은 정원을 가지고 있었다. 가운데 큰 연못이 하나 놓여 있고 잔디와 작은 자갈들로 이뤄진 마당, 그리고 예술 작품같이 아름다운 소나무들이 곳곳에 심어져 있었다. 아직도 대재앙 때 무너진 건물이 드문드문 존재하는 다른 곳과 비교할 때 마치 별천지 같은 곳이다. 전혀 다른 세상에 온 느낌이다.
“우와. 장난 아니야…… 아직도 이런 곳이 남아 있다니.”
“대재앙의 그 엄청난 지진을 다 이겨 낸 건가?”
“아니…… 아마 새로 지었을 거야. 정말 엄청난 돈이 들었겠는걸.”
셋은 엄청나게 크고 아름다운 정원에 감탄하며 주저리주저리 떠들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근데 호퍼, 왜 거기서 두들겨 맞고 있는 거야? 돈은 다 갚은 거 아냐? 너 혹시 돈 잃어버린 거 아냐?”
사실 돈 빼돌린 거 아니냐고 묻고 싶었지만 호퍼가 그럴 위인이 못 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아냐…… 돈은 다 줬어. 그런데 린을 보여 주지 않아.”
“이그…… 그럴 줄 알았다니까.”
“아니야. 린이 나를 더 이상 보기 싫다는 거야.”
호퍼가 울먹울먹한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여기 빨리 나가야 해. 느낌이 안 좋아.”
아이딘이 잭슨과 호퍼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정원 끝을 한참 지나서 정문이 보이는 정원의 모퉁이를 도는 순간 앞장서던 아이딘이 발걸음을 갑자기 멈추었다. 눈앞에 한눈에 봐도 30명은 족히 넘을 듯한 조직원들이 그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 무리 중에 한 발자국쯤 앞서 서 있는 중년의 사내가 보였다. 풍기는 분위기로 봐서 그가 아마 이들의 우두머리인 듯하다. 짧게 빗어 넘긴 검은머리에 다소 굵은 눈썹, 그리고 잔뜩 굳어 있는 표정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우두머리가 손을 들어 손가락을 까딱하는 손동작과 함께 한 무리의 녀석들이 아이딘에게 달려들었다. 아이딘은 빠른 움직임으로 녀석들을 제압한다. 얼굴, 명치, 복부 등 빈틈을 보이는 급소마다 아이딘의 주먹이 꽂힌다.
빠른 움직임과 군더더기 없는 빠른 공격에 놈들은 속수무책이다. 아이딘의 몸에 손끝 하나 대지 못한 채 예닐곱 명의 조직원들이 순식간에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우두머리가 또다시 신호를 보냈다. 이번에는 품안에 있는 단검을 하나씩 꺼내들고 아이딘에게 달려들었으나 결과는 앞서와 동일했다. 조금 더 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아이딘은 혼자서 십여 명을 순식간에 해치우고서는 거친 숨 한번 내쉬지 않았다.
벌써 조직원들의 절반이 바닥에 널브러져 신음소리를 내거나 아예 몇 명은 정신을 잃었다. 너무나 일방적인 싸움이었다. 이 정도라면 나머지 모두가 한꺼번에 달려들어도 쉽지 않을 듯싶었다. 잭슨과 호퍼는 눈앞에 펼쳐진 믿기 힘든 상황에 마냥 흥분된 모습이다.
강성욱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