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한 여러 생각들이 줄을 잇자 아이딘은 또다시 심한 두통을 느꼈다. 이 두통 또한 아무래도 멎지 않는 코피와 같이 자신의 능력과 연관되는 듯싶어 당분간은 이런 골치 아픈 주제에 대해서는 아예 신경을 끄기로 마음먹었다. 또한 며칠 동안 자리를 비워 고생했을 예리엘이 떠올라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간부터 가게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세월 좋은 잭슨이 설렁설렁 문을 열고 들어선다.
“아, 아이딘. 오늘은 컨디션 괜찮아?”
“어. 그래.”
아이딘이 바닥을 쓸던 빗자루를 잭슨에게 던져 준다. 덩치에 걸맞지 않게 날렵하게 받아 든 잭슨이 바닥을 쓴다. 아이딘이 그 모습을 보며 작업대 위에 걸터앉는다. 예리엘은 작업대에 걸터앉는 것을 싫어하지만 아이딘은 그 어떤 의자보다 작업대 위에 앉는 것이 편했다.
“루드 의원의 저택은 다 정리된 거야?”
“아니. 뭐 일단락은 된 거 같은데…… 아직 말이 많더군.”
“무슨 말이야?”
“루체 왕국의 테러로 벌어진 일이라고 했는데, 꼭 그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들이 많아서.”
잭슨이 빗자루로 바닥을 설렁설렁 쓸면서 대답한다.
“무슨 말들이?”
“루체 왕국의 테러가 아니고 닉스 연방파의 소행이라는 소리가 파다하더군.”
“연방파라면…….”
“지금 닉스 연방은 크게 두 개의 세력으로 나뉘어져 있대. 연방 체제를 부정하는 반연방파와 연방 체제의 지속을 유지하는 연방파. 그런데 루드 의원은 연방파 의원이었는데 부인의 죽음 이후 반연방파로 돌아섰다고 하더군. 그런데 반연방파는 루체 왕국과의 전쟁을 반대하는 입장인데 루체 왕국이 굳이 루드 의원에게 그런 테러를 할 필요가 없겠지.”
“그래서?”
“게다가 테러라고 하기에 좀 뭐한 것이. 굳이 폭탄도 아니고 소이탄으로 건물을 완전히 태워 버린 것도 좀 그렇거든. 싹 다 타 버렸잖아. 그래서 네가 그렇게 고생을 한 거잖아?”
예상외로 불길이 거세서 왠지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아이딘이 고개를 끄덕인다.
“아마 뭔가를 없애려고 그랬던 거 같아.”
“뭔가라니?”
“뭔가 중요한 걸 없애고자 한 사람들의 소행이 아닐까 싶어.”
“그런 게 있었을까?”
아이딘은 의구심이 들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네. 뭐 루체 왕국군의 무기가 몇 개 나왔다고 루체 왕국의 소행으로 몰아가는 것 같긴 한데. 뭐 우리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잭슨도 빗자루를 던져 버린 채 아이딘을 따라 작업대에 털썩 걸터앉는다. 둘은 아예 청소는 뒷전인 채 이야기 삼매경에 빠져들었다.
“그래. 루드 의원의 딸은 괜찮나?”
“응, 잘은 모르겠지만 루드 의원과 같이 무사하다고 하던데. 지금은 아이딘 사촌형과 같이 있다고 하던데.”
잭슨이 실실 웃는다.
“내 사촌형?”
아이딘이 갸우뚱하다 문득 한 사람이 떠올랐다.
“그래, 란돌 경비대장.”
제대로 말 한마디 나누어 본 적도 없고 단지 사람들로부터 이야기만 들었던 그 사람의 이름이 이제는 실제의 친척보다 더 가깝게 느껴진다.
“아주 난리야. 너와는 어렸을 때부터 친한 사이였고, 대재앙 때는 자기가 너를 구했는데 이번에 네가 보답한 것이라고. 아주 소설을 쓰고 있더군.”
“뭐 그럼 너희 뜻대로 경비대하고는 친하게 지낼 수 있겠네. 경비대장님이 내 사촌형이니.”
“그렇지 뭐. 이 눈치 빠른 경비대원들이 벌써부터 나한테까지 친한 척하는데 아주 닭살 돋아 죽겠어.”
아이딘과 잭슨은 대화에 한층 열을 올린다.
“그런데 호퍼는?”
문득 호퍼라는 단어가 나오자 지금까지 신나게 떠들던 분위기가 한층 가라앉는다.
“아직도 그대로야?”
“그래. 그게 쉽지 않네.”
“정말 제대로 빠졌나 보네.”
“요새 그냥 두문불출한 채 고민만 하고 있어. 사고나 치지 않을까 걱정이야.”
“그런데 말이야? 마피아나 야쿠자랑 모두 사회에서 어느 정도 인정받는다면서 왜 호퍼의 여자 친구에게 협박 같은 일을 하지?”
“그게 뭐,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그래서 그런 거 아닐까?”
“무슨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냐?”
“그건 나도 잘 모르겠는데 돈 빌려 주고 안 갚으면 좀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분명히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아.”
아이딘은 나름 확신을 하는 듯싶다.
“나는 잘 모르겠어.”
잭슨은 좀 떨떠름한 듯이 말한다.
그들은 그렇게 한참을 떠들고 나서야 건성건성 청소를 마무리 지었다. 어느덧 예리엘도 잠에서 깨어 둘과 함께 일을 시작한다. 예리엘의 등장과 함께 두 배, 아니 세 배는 빨라진 그들의 몸동작에 원샷의 하루가 또 그렇게 시작된다.
아이딘과 잭슨이 오후 늦게 원샷의 문을 나섰다. 호박 빛의 저녁 햇살이 마을 전체를 신비롭게 수놓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저녁 산책하기에 딱 좋은 분위기다.
아이딘 군에게.
다시 한 번 나와 내 딸을 구해 주어 고맙다는 말을 전하네. 이 은혜는 내가 절대 잊지 않도록 하겠네. 그리고 다음 주 화요일 저녁 6시에 자네와 자네 친구들을 함께 초대해서 저녁식사를 같이 하고 싶네. 부담 가지지 말고 찾아 주게.
아울러 약소하지만 얼마의 돈을 동봉하니 다친 상처 치료하는 데 요긴하게 쓰길 바라네.
-루드 랑베르
아이딘은 지난주 루드 의원이 편지와 함께 보내 준 엄청난 돈과 맞물려 오늘의 저녁식사 초대가 심히 불편한 자리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무엇보다 치료비로 보내 준 적지 않은 돈에 대한 부담감이 썩 마음을 편하게 하지는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돌려주고 싶지만 공교롭게도 루드 의원이 보내준 2만 크리가 호퍼의 애인이 야쿠자에게 갚아야 하는 금액과 일치해 불필요한 고민이 생기고 말았다. 밥도 안 먹고 시름에 빠진 호퍼가 계속 떠올랐기 때문이다.
호퍼는 자신의 여자 친구 린이 걱정된 탓인지 요 며칠 동안 집에서 거의 앓아눕고 있었다. 예리엘보다는 못하지만 평소에도 남들보다 두 배는 먹어 치우는 먹성을 자랑하는 녀석인데 왠지 이번에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이전에 루드 의원의 딸인 이자벨이 거식증에 걸려 몸이 수척해졌는데 이번엔 호퍼 녀석이 그 지경이 되어 버린 것이다. 순간 거식증도 설마 전염병이 아닌가 하는 헛된 생각이 들 정도로 호퍼에 대한 걱정이 커져만 갔다.
더욱이 꽃뱀에게 사기당하는 것이 분명한데도 호퍼가 아니라고 저렇게 철석같이 믿고 있으니 혹시나 그의 말이 사실이면 큰일 아닌가 하는 생각도 문득 들었다. 게다가 이렇게 갑자기 예상치 못한 돈이 생기다 보니 아이딘의 마음도 조금씩 흔들렸다.
함께 걷던 잭슨이 이런 아이딘의 마음을 눈치채고 먼저 묻는다.
“호퍼에게 루드 의원한데 받은 돈 주려 한 거 아니야?”
“응. 일단 주려 한다고 예리엘에게 말은 해 놨어. 좀 생각해 보자고.”
“예리엘은 뭐라는데?”
“뭐. 별로 신경 안 쓰는 눈치야. 예리엘은 돈에 별로 신경 안 쓰잖아. 게다가 그 얘기 듣고 눈물까지 글썽였어.”
“무슨 얘기?”
“퍼플 하스피탈에서 호퍼가 술주정하고 행패 부린 것이 다 그 여자 때문에 가슴 아파서 그런 거라니까 호퍼가 순정파라는 거야.”
“그나마 호퍼에게 다행이네.”
퍼플 하스피탈에서의 일로 예리엘은 내내 호퍼가 원샷에 오는 것 자체를 못마땅해했었다.
“게다가 루드 의원에게 꼭 돈을 받아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뭐 목숨을 구해 준 답례라고는 하지만…….”
“뭐 어때. 목숨을 구해 줬는데. 우리에게는 큰돈이지만 그들에게는 별거 아닐 거야. 신경 쓰지 마.”
“좋아. 상황 좀 더 파악하고 필요하면 호퍼를 도와주자.”
잭슨이 피식 웃으며 아이딘의 어깨를 툭툭 친다.
“이 소식을 알면 호퍼는 아주 입이 찢어지게 좋아할걸?”
그들은 대화를 나누며 발걸음을 빨리했다. 저 앞에 그들을 데리고 갈 경비대의 차량이 보였기 때문이다.
아이딘은 호퍼가 린이라는 여자 때문에 끙끙 앓는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자신도 그렇게 사랑에 빠지면 그런 어처구니없는 모습을 보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혹시 예리엘에게 그 같은 감정을 가진다면 자신도 그렇게 될까? 하는 상상의 나래를 펼쳤지만 곧바로 흥미를 잃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예리엘의 아이딘에 대한 감정은 친구와 동거인의 경계선을 크게 넘어서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왠지 아쉬운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 생각의 범위는 여기까지다. 예리엘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 * *
걸어서 불과 20분도 안 되는 거리를 극구 아이딘이 만류했음에도 불구하고 순찰차 두 대의 에스코트와 1개 분대 인원의 호위를 받은 채로 아이딘과 잭슨은 루드 의원이 있는 관사에 도달했다.
“어서 오게, 아이딘.”
반갑게 아이딘을 맞이하는 루드 의원은 아직까지 손에 감은 붕대를 풀지 못한 상태였다. 이미 모든 상처가 아물어 흉터만 조금 남은 아이딘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의원님.”
아이딘이 머리 숙여 인사한다. 루드 의원은 아이딘의 어깨에 손을 걸치며 정겹게 아이딘을 관사 안으로 인도한다.
문 안에 들어서자마자 인형 같은 소녀, 이자벨이 휠체어에 앉은 채로 생긋 웃으면서 반갑게 아이딘을 맞이한다. 아이딘도 생긋 웃으며 이자벨에게 화답한다. 그러자 휠체어에 앉아 있던 이자벨이 휠체어에서 벗어나 똑바로 일어섰다. 루드 의원은 그 모습에 깜짝 놀라며 기뻐했다.
“이자벨, 네가…… 이제 자리에서 일어섰구나.”
그리고 이자벨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아빠, 아이딘 오빠에게 예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어요.”
그리고는 쪼르르 달려가 그대로 아이딘에게 달려가 안긴다. 아이딘은 이자벨을 사뿐히 안아 든다. 순간 주변의 분위기가 훈훈해진다.
훈훈한 분위기는 식사시간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루드 의원은 이제 생기를 되찾은 이자벨의 모습에 한층 흥이 났지만 그보다 더 흥이 나서 식사 분위기를 띄우는 것은 란돌 경비대장이었다.
란돌 경비대장은 아이딘 자신조차도 잘 모르는 아이딘의 과거부터 노만 마을에서의 활약까지, 짧지 않은 식사시간 내내 쉬지 않고 떠들어 댔다. 물론 자신이 아이딘과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끈끈한 친인척 관계임을 강조하면서 말이다.
아이딘 역시 란돌 대장의 조금은 억지스러운 과장과 지금의 이런 분위기가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살아 있다는 느낌 그리고 사람의 정이라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참으로 따뜻했다. 알 수 없는 과거, 혼란한 생각 속에서 벗어나 모든 것이 서서히 정돈되는 느낌이다. 모처럼 느껴보는 편안함이다. 식사 도중 내내 자신을 보며 해맑게 웃고 있는 이자벨의 모습을 보며 아이딘 역시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 * *
벌써 네 병의 와인 뚜껑이 열렸음에도 식사는 끝나지 않았다. 이미 같이 온 술 잘 마시는 잭슨까지도 해롱거리는 상태. 이제 더 이상의 음주는 무리인 듯 실실 웃고만 있다.
아이딘은 문득 이자벨과의 교감을 다시 시도해 보았다. 그러나 이자벨은 반응이 없었다. 화재 때는 이자벨의 메시지가 직접 옆에서 말하는 듯이 명확했으나 지금은 마치 안개가 어린 것처럼 뿌연 생각 속에 이자벨과의 교감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시와는 무척 다른 느낌이다.
아이딘은 다시 란돌 대장에게 자신의 생각을 투영시켰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루드 의원님도 그렇고 이자벨도 이제 좀 쉬셔야 할 테니.”
란돌 대장이 식사를 마무리하려 한다.
‘이건 통하네.’
아이딘은 생각했다. 지난 화재 사건 때도 그랬지만 란돌 대장의 생각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텔레파시 능력에 대한 나름대로의 정리가 되었다. 되는 사람과 안 되는 사람이 분명 있는 것이고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좀 더 이후에 파악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란돌 대장의 끝없는 설레발에 루드 의원이 보내 준 치료비에 대해서는 언급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식사 중에 나온 대화로 보건대 2만 크리가 루드 의원에게는 전혀 부담이 가지 않는 돈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아이딘 역시 몇 번 본 적이 있던 두부 모양의 독특한 로고를 사용하는 TDS(Tofu Delivery System)라는 물류회사에 루드 의원이 투자를 했고 그 결과 엄청난 돈을 벌어들인다는 이야기가 대화중에 나왔기 때문이다.
강성욱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