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아아악!”
불행히도 테이슨은 세 개의 뿔이 쏘아 내는 세 줄기 황금빛 아래를 지나쳐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황금빛은 테이슨의 몸을 오른쪽 어깨에서부터 사타구니까지 길게 할퀴었다. 그것에 다쳐 본 티노는 보는 것만으로도 그 고통이 전해지는 것 같아 윽, 하고 신음을 흘렸다.
“아아악!”
테이슨은 바닥에 쓰러져 제대로 몸부림도 치지 못하고 비명만 질렀다. 쓰러진 그의 몸에서 시뻘건 핏줄기가 솟아올랐다 도로 그의 몸에 떨어져 온통 붉게 물들였다.
그제야 검은 남자는 무게감 있게 바닥에 발을 디뎠다. 그는 더 이상 현란하게 허공을 헤집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테이슨은 그것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설령 봤다 해도 공격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
검은 남자는 천천히 테이슨에게 걸어갔다. 그리고 지독한 고통에 의식을 잃어 가는 그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의외로 숨을 끊어 놓지 않고 돌아섰다. 그토록 짙었던 살기도 어느 틈엔가 사라지고 없었다.
이제는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스파크와 불똥이 튀어 나오기 시작했다. 티노의 오른팔에 이어 테이슨의 상체까지 짓이긴 황금빛은 끊임없이 작업실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언제 터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혼란의 도가니를, 검은 남자는 산책하듯 유유히 걸어 나왔다. 그러면서도 속도는 빨라서 순식간에 티노와 아르카의 앞에 도착했다.
티노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보통의 노블리언이라면 테이슨과 같은 반응을 보낼 테지만 티노야 남 말할 처지가 아니다 보니 그냥 조금 놀란 것에서 그쳤다. 그나마도 노블리언이 플로레스라와 밀통한 것에 놀란 게 아니라, 저 아르카에게 자신 외에도 알고 지내는 노블리언이 있다는 것에 놀란 것이었다.
티노의 앞에 선 검은 남자는 왼쪽 손바닥을 위로 하여 내밀었다. 뜻은 명확했다. 황금의 어스듐을 달라는 것이다. 티노는 의외라는 눈으로 아르카를 돌아보았다. 뜻밖에도 아르카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얼굴로 둘을 보고 있었다. 어차피 둘의 합작이니 나중에 아르카도 실컷 만지겠지만 그의 성격상 먼저 손에 쥐고 싶어 해야 맞는데 말이다.
어쨌거나 아르카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을 확인한 다음에야 티노는 잘 움직이지 않는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크게 다친 상태로도 용케 그것을 놓치지 않고 있었던 오른손은 그대로 굳은 듯 펴지지 않았다. 티노는 손가락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펼쳤다.
작업실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인데도 남자는 티노가 직접 건네주기를 묵묵히 기다려 주었다. 아르카 역시 재촉하지 않았다. 티노도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지금 이 순간 황금의 어스듐의 주인은 티노인 것이다.
손가락을 펴는 데 집중하고 있던 티노의 눈에 어째서인지 그것이 들어왔다. 딱히 신경 쓰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티노의 시야에 잡힐 만한 이유가 없는데도 그냥 눈에 들어왔다. 그것도 아주 선명하게.
그것은 바로 남자의 오른팔이었다. 적당히 그을린 갈색 피부, 완벽에 가깝게 단련된 단단한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는 그것의 위에 흉터가 새겨져 있었다. 마치 몬스터의 발톱이 할퀴고 지나간 것 같은 세 줄기의 긴 흉터가 손등에서부터 팔꿈치까지 길게……. 이빨이나 발톱이나 흉기 따위로 긁힌 것으로 보기엔 그 윤곽이 깔끔하지 않았다. 마치 날카로운 것에 짓이겨진 것 같은 흔적이었다. 그래, 딱 지금 티노가 오른팔에 입은 상처 같은…….
팔뚝엔 그것보다 더 오래된 흉터도 있었다. 점점이 이어져 있는 길쭉한 반원 형태의 흉터였다. 작은 몬스터에게 깊게 물려서 생긴 것이 분명한 흉터. 티노에게 있는 그런…….
티노는 손가락을 펴던 것도 잊고 검은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복면을 쓰고 있어 얼굴은 볼 수 없었다. 볼 수 있었던 것은 눈동자뿐. 동공이 작은, 밝은 초록색 눈동자…….
“……!”
티노는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는 자신도 몰랐다. 결국 그는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고 그대로 잠시 굳어 있다가 한숨을 쉬었다. 무겁지 않은, 그저 심호흡의 뒷자락처럼 의미 없는 한숨이었다. 그리고 다시 집중해서 손가락을 펴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마침내 황금의 어스듐이 검은 남자의 커다란 손바닥 위에 떨어졌다. 검은 남자의 초록색 눈동자가 일순 유쾌한 호선을 그렸다. 그것은 티노에게 대단히 익숙한 것이었으나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올라가자.”
노블리언의 수도에까지 오게 만든 물건을 손에 넣었음에도 별 감흥 없어 보이는 아르카가 시문을 검은 남자에게 넘기며 말했다. 그리곤 태연히 철판을 들어 올려 비밀 스위치를 눌렀다. 아르카가 그것에 대해 어떻게 알았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티노도 모르고 있던 비밀통로 너머에서 대기하고 있던 그가 아니던가?
검은 남자는 시문을 안은 채로 부드럽게 점프하여 위로 솟구쳤다. 곧 위에서 착지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음은 티노 차례였다. 하지만 그 전에 물어볼 게 있었다.
“저대로 두고 가게?”
저편에 널브러져 있는 테이슨을 힐끔 돌아보았다. 자신을 죽이려 했던 그에게 원한이 없다고는 못 하지만 달려가 직접 숨통을 끊을 생각은 없었다. 테이슨을 쓰러뜨린 건 검은 남자니까. 복수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하지 않으면 뒤끝만 더럽게 남을 뿐이다.
테이슨이 쓰러진 곳의 바닥은 아직까지는 무너지지 않았지만 그도 머지 않아보였다. 작업실 전체가 무너지고 있으니 저대로 두면 목숨 부지하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티노와 아르카의 거래를 목격한 자를 확실히 제거하지 않는 건 아르카답지 않았다.
“설마. 그렇게 허술하게 처리할 리 없잖아?”
역시나 아르카는 싸늘하고도 깔끔하게 부정했다.
“너나 저 노블…… 사람이나 지금 상태로는 사다리를 못 올라갈 거 아냐?”
“그렇지.”
의식을 잃은 시문을 업을 순 있다. 하지만 오른팔을 다친 상태에서 계단이라면 모를까, 사다리는 무리다.
“너희를 올려놓고 우린 다시 내려와 뒤처리하고 떠날 거다.”
“그래, 잘 부탁해.”
티노는 넉살좋게 말했다. 아르카는 역시나 인상변화에 도움을 주지 않는 냉소를 흘리곤 티노를 한 손에 들었다. 그리고 그 역시 위로 뛰어올랐다. 아르카의 등 뒤에 솟은 희미한 빛의 날개가 어두운 터널 속에서 유독 선명하게 보였다.
서랍장을 겸한 비밀문을 나와서 아르카가 티노를 내려놓자, 검은 남자가 대뜸 티노의 등에 시문을 얹었다.
“윽!”
시문의 키나 무게가 문제가 아니라 티노 자신이 현재 기운이 없는 탓에 조금 버거웠다. 그래도 버티려면 못 버틸 것은 없었다. 문제는 티노가 아니라 시문이었다.
“상처가 다시 터지면 어쩌……?!”
“지혈제를 쓴 흔적이 없어야 한다.”
아르카가 티노의 말허리를 자르며 설명했다. 일부러 시문의 상처를 벌려 놓기 위해서 업게 했단 소리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고.”
아르카는 지하 작업실의 문을 열고 계단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올라가. 여기서부터 정리할 거니까.”
확실히 시문을 업고 저 위를 올라가다 보면 티노 역시 도로 상처가 터지겠지. 그것이 아르카가 의도한 바라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티노는 고개를 끄떡인 뒤 시문을 업은 채 계단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통증은 거의 못 느끼고 있었지만 어지러운데다 감각이 둔해져 있어서 제대로 걷기가 힘들었다. 막 문을 지나 계단에 한 발을 올리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티노의 어깨를 붙들었다. 고개만 슬쩍 돌려보니 검은 남자였다.
남자는 작은 액자 하나를 대뜸 티노의 상의 안쪽에 쑤셔 넣었다. 상의 안으로 떨어진 액자는 벨트에 걸려서 배 앞에서 덜렁거렸다.
“……?”
워낙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액자 안을 보진 못했지만 그게 뭔지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티노는 검은 남자에게 씩 웃어 보이고 힘주어 계단을 올랐다.
시문의 작업실에서 공방으로 나가려면 층계참 하나를 중간에 두고 방향이 바뀌는 두 개의 계단을 지나야 한다. 그중 첫 번째 계단의 반을 올랐을 때 뒤에서 기름 냄새가 풍겨 왔다. 층계참에 도착했을 때는 밑에서 회색 연기가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언제부터인가 오른팔에서 다시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아직 아르카가 준 약의 효력이 남아 있어 통증은 없었지만 점점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에 따라 시문의 몸이 무겁게만 느껴져 갔다. 하지만 티노는 앓는 소리 없이 꿋꿋이 올라갔다.
그렇게 두 번째 계단을 거의 올라왔을 때였다.
콰콰쾅!
계단이 그대로 무너지는 게 아닌가 싶은 굉음이 터져 나왔다.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폭탄이 터진 것이다. 조금이라도 증거가 될 만한 것들은 불태우고,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폭탄을 터트린 게 분명하다. 이제 이 소리를 듣고 공방 사람들이 달려올 것이다. 그리고 부상을 입은 티노와 의식을 잃은 시문을 발견할 테지.
막판에는 말 그대로 기어서 올라온 티노는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문고리를 돌렸다. 철컥, 자물쇠가 열린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시문 님!”
“무슨 일입니까?!”
공방 사람들의 외침이 곧 비명과 괴성으로 변했다.
“으악!”
“티노?!”
열린 문틈으로 연기와 열기가 새어 나오자 사람들은 황급히 티노와 시문을 문 밖으로 잡아끌고 문을 닫아 버렸다. 그리곤 시문의 가슴팍을 보곤 격분해서 발을 굴렀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누가 이런 짓을 한 거냐?!”
티노는 실제로도 가쁜 숨을 한층 격하게 몰아쉬면서 생각을 가다듬었다. 아직 상황을 확실히 모르는데 입방정을 떨어서 의문점을 남길 순 없었다. 거기다 시문과 말을 맞추지 못했으니 함부로 이야기를 꾸며 낼 수도 없고.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건 이 상황을 누구보다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시문의 몫인 것이다. 이 사태에 관심을 가질 사람은 공방 사람들뿐만이 아니니까.
‘그렇다면 방법은 한 가지!’
생각을 정리한 티노는 이제 어느 정도 호흡이 진정이 되었음에도 계속 숨을 헐떡이다가, 마치 뭔가 말하기 위해 애쓰는 척 입술을 달싹이길 두 차례 반복했다. 그러다 문득 깊은 한숨과 옅은 신음을 흘리며 옆으로 미끄러지듯 쓰러졌다.
“으음…….”
그리고 그대로 의식을 잃은 척했다.
“티노! 정신 차려!”
“어이, 티노!”
“헉! 이 피 좀 봐! 티노도 다쳤어!”
“의사! 의사를 불러! 비상약 가져오고 누가 시문 님 집안에 알려! 어서!”
허둥지둥 조치를 취하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티노는 안심하고 잠을 청했다.
참으로 고단한 하루였다.
기분 좋게 숙면을 취하고 산뜻하게 눈을 떴다. 해가 중천일 때 잠을 청했는데 지금은 아침이었다. 거의 하루를 잔 셈이다. 잔 것이 아니라 기절한 거였던 건지도 모르겠다.
아르카가 준 약을 먹고 둔해졌던 감각이 제대로 돌아와 있었다. 빈혈 때문인지 다소 어지럽고 멍하긴 했지만 심하지 않았다. 가장 문제가 되었던 오른팔을 눈앞에 들어 보았다. 깨끗한 붕대가 감겨 있어 상처 부위를 직접 확인할 순 없었지만 손가락이 뜻대로 잘 움직이는 걸 보니 절단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심하게 다쳤는데 이 정도에서 그친 게 용했다.
시문은 어떻게 됐을까?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만나야 할 텐데. 계속 잠자는 척을 할지, 시문을 찾아봐야 할지 고민하려는데 부드러우면서도 조용한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
“잘 잤습니까?”
“……?!”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시문이 보였다. 그는 의자에 앉은 채로 책상 위에 있는 작은 액자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 남자가 티노의 옷 속에 밀어 넣었던 바로 그 액자였다.
“고맙습니다. 이걸 챙겨 줘서.”
“제가 한 게 아니에요. 그…….”
티노가 말을 잇지 못한 것은 검은 남자를 뭐라 칭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였다. 게다가 시문이 그들을 비밀 작업실로 끌어들인 장본인이라 해도, 티노와 아르카의 친분은 철저히 숨겨야만 하는 일이었다. 자신의 사적 용무를 위해 플로레스라와 밀거래를 한 전적이 있는 시문이니 테이슨처럼 경기 일으키듯 놀라진 않겠지만 또 다른 협박거리를 제공하고 싶지는 않다.
다행히 직접 그들을 호출한 사람답게 시문은 말하지 않아도 알아들었다.
“그런가요? 하긴 남이 10년 넘게 공들인 물건을 날름 집어 갔는데 이 정도는 해 줘야 맞겠죠.”
지당하신 말씀이다.
“하하……. 몸은 어떠세요?”
“괜찮습니다.”
신승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