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 롤스터 박정석
2012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올해는 흑룡의 해라고 합니다. 용띠도 아닌 제가 2012년을 여는 글을 쓰게 되어 쑥스럽습니다. 아마도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기에 글을 써보라고 요청이 들어온 것 같습니다.
제가 프로게이머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지 10년이 넘었네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프로게이머 생활을 하기 시작한 시점이 2002년이니까 딱 10년째입니다.
2002년 스카이 스타리그에서 우승할 때가 생각납니다. 수많은 팬들 앞에서 처음으로 제 이름을 달고 결승전이라는 큰 무대에 올랐을 때 말이죠. 임요환이라는 대선배와 함께 결승전을 치렀고 제가 이기면서 처음으로 우승컵을 받았습니다. 우승자에게 부상으로 주어지던 헤드셋을 계속 쓰고 있었던 생각도 나네요.
시간이 참 빨리 흘러갑니다. 10년 사이에 저나 e스포츠계에 많은 일이 있었죠. 저는 한빛 스타즈에서 KTF 매직엔스로 팀을 옮겼고 팀 이름도 KT 롤스터로 바뀌었습니다. 또 공군 에이스를 통해 병역을 마쳤고 다시 팀에 돌아왔더니 홍진호 선배가 은퇴하면서 최고참이 됐습니다.
성장만 쭉 해나갈 것 같은 e스포츠 업계도 두 번의 파고를 맞았지요. 승부 조작 사건이 터졌고 2011년에는 프로게임단이 세 곳이나 줄어들면서 후배들과 동료들이 무척 힘들어했던 기억이 납니다.
개인적으로 2012년은 30대 프로게이머라는 목표를 달성하는 원년입니다. 그동안 여러 인터뷰를 통해 "30대 선수도 성공할 수 있는 모습을 보여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지만 이제 실천해야 하는 시점이 다가왔습니다.
임요환, 임재덕 등 저보다 나이가 많은 선배 게이머들이 여전한 실력을 보여주면서 각종 리그에서 활약하는 소식을 들으며 존경스럽고 대단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미천한 제가 과연 그들처럼 역사에 한 획을 남기는 프로게이머가 될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의문에 발목을 잡혀 있을 수는 없지요. 1월1일 새해를 맞아 임진년에는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한 해를 보내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습니다.
얼마전에 '퍼펙트게임'이라는 영화를 KT 롤스터 후배들과 함께 관람했습니다. 야구를 소재로 한 영화인데요. 2011년 작고하신 고 최동원 투수와 KIA 타이거즈의 새로운 사령탑으로 부임한 선동렬 투수의 대결을 영화로 만든 작품입니다.
야구는 한국에 프로스포츠로서 가장 먼저 뿌리를 내렸습니다. 1982년이었던가요.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프로화가 됐고 가장 인기있는 콘텐츠였습니다. 부산 출신인 저도 롯데 자이언츠의 경기를 보기 위해 경기장을 찾았던 기억이 납니다.
프로야구가 30년 동안 최고의 자리를 지켜온 줄 알았는데 아니더군요. 프로축구, 프로농구, 프로배구 등 경쟁 스포츠가 줄줄이 프로화가 되고 인기를 얻으면서 야구의 인기가 시들해지기도 했습니다. 특히 제가 스타리그에서 우승했던 2002년은 야구계에서는 죽음의 해라고 부르기도 했답니다. 월드컵이 우리나라에서 열리면서 야구라는 두 글자가 차지하던 사람들의 기억에 축구가 대신 자리를 잡았습니다.
야구가 다시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계기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이었습니다. 한국 대표 선수들이 9전 전승으로 금메달을 따내면서 야구 붐을 다시 한 번 일으켰고 이후 최고의 스포츠 콘텐츠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e스포츠가 야구처럼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제가, 선수들이, 게임단이, 업계가 무엇을 해야할 지 고민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한 때 인터넷 카페 가입자가 60만 명을 넘겼던 시절-물론 제 팬카페는 아닙니다-도 있었고 사람들의 일상적인 대화에서 프로게이머들의 이름이 회자되던 때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4대천왕'이라는 부담스런 별명 안에 제가 끼어 있기도 했죠.
그 때의 영광을 다시 한 번 누리기 위해 힘을 모아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종목과 관련된 분쟁이 있었고 소송까지 갔지만 지난 해에 어느 정도 해결이 됐다고 들었습니다. 2012년에는 갈등과 반목, 질시보다는 화해와 소통, 융합을 통해 e스포츠가 발전하길 바랍니다.
선수들은 최고의 경기를 준비하면서 어떻게 하면 팬들에게 감동을 선사할 수 있을지 불철주야 고민해야 하고 코칭스태프는 선수들의 모자란 부분을 채워주며 게임단은 선수단을 성장시킬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할 시점입니다. 업계 종사자들은 팬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찾아야 할 것입니다. 팬 여러분들 또한 무조건적인 비난보다는 애정어린 질책과 따뜻한 비판을 통해 e스포츠가 성장할 수 있도록 거름을 주고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채찍질해주시면 좋겠습니다.
2012년에는 e스포츠가 프로야구에 버금가는 사랑을 받았으면 합니다. 업계 종사자들이나 팬들 모두 e스포츠를 사랑하는 마음이 하늘을 찌르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e스포츠를 사랑하고, 아끼고, 선수들의 미래까지도 함께 고민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이 e스포츠 업계에서 함께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KT 롤스터 프로게이머 박정석
*SK텔레콤과 함께하는 e스포츠 세상(www.skteleco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