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카트리그 해설위원 정준입니다.
지난주 조별예선을 끝으로 상위 라운드 진출자가 모두 가려졌습니다. 기존 선수들이 주춤하는 틈을 타 유감없이 실력을 발휘한 신예들과 무시무시한 경기력을 보여준 오존 게이밍 선수들, 그리고 전통의 강호 ‘빅3’의 치열한 레이싱을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S2 채널 변경 이후 더욱 심해진 몸싸움과 상향 평준화된 실력을 확인할 수 있었던 예선전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 승자조와 패자조, 그랜드파이널로 이어지는 여정은 좀 더 치열하고 흥미진진한 레이싱이 될 것이란 예상입니다.
사실 그동안 주목 받는 선수들, 그리고 1위 가능성이 높은 선수들 위주로 스카우팅 리포트를 작성했지만, 오늘 여러분들께 소개해 드릴 선수는 조금 의외의 인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리그 중계를 하다 보면 때때로 선수들의 기분이나 심리적 압박이 그대로 전해져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 역시 선수 생활을 오래 했기 때문에 선수들의 상태가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경우도 있죠. 그리고 그 중에는, 성적에 상관없이 자신도 모르게 응원하게 되는 선수도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위기 상황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선수들을 꼽을 수가 있겠네요.
오늘 여러분들께 소개할 선수는, A조 1차 예선에서 8위를 기록했지만 단숨에 3위로 뛰어오르며 극적으로 패자조에 합류한 '뚝심의 아이콘' 박현호입니다.
◆뚝심의 아이콘, 부활의 아이콘이 되다.
박현호의 스타일은 한마디로 '묵직'합니다. 경기 중 심리적인 동요가 거의 없고, 몸싸움과 주행에 있어서도 정공법으로 싸우는 선수죠. 캐릭터에 비한다면 '전사'의 느낌인데요. 기세를 타서 연속으로 1위를 하는 모습은 발견하기 어렵지만, 하위권에 연속으로 머무는 모습 역시 드문 선수입니다.
이런 박현호의 플레이를 보면서 중계 도중 '뚝심의 박현호'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본인도 마음에 들어 해 지금까지 별명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가끔은 같은 팀 소속인 조성제 선수가 '무식해 보여' 라는 농담으로 놀리기는 하지만요.
이번 15차 리그 조별 예선에서, 박현호는 역대 최고의 뚝심을 선보였습니다.
1차 예선 종료 후 순위는 8위. 누적 포인트는 고작 7포인트에 불과한 상황. 사실상 승자조 진출은 무산됐고, 예선 탈락의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원래 S2 출신인 박현호 입장에서는 강한 자신감에 차 있었지만, 대형사고에 여러 번 휘말리면서 포인트 관리에 실패했죠. 특히 1차 예선에서 4위를 차지했던 장재석이 신인의 패기를 선보이며 박현호를 압박했습니다. 불행중 다행으로 문호준이 워낙 경기를 일찍 끝냈기 때문에, 결국 상위권 선수들과의 포인트 차이가 크게 벌어지지 않은 것에 안도해야 했습니다.
2차 예선 역시 출발이 좋지 않았습니다. 1경기에서 8위로 결승선을 통과하며 4위와의 차이가 21포인트까지 벌어졌기 때문인데요. 이때 박현호는 B조에서 7위를 기록중인 조성제를 떠올렸다고 합니다. 조성제가 B조 4위와 19포인트 차이였기 때문에, 자신이 무너지면 조성제의 경기에도 영향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고 하네요.
◇오존게이밍 박현호
이후 박현호는 1위보다는 포인트 관리에 집중합니다. 알뜰하게 포인트를 챙기며 기회를 엿보던 도중, 패기 넘치던 장재석이 5경기에서 리타이어를 당하게 됩니다. 반면 박현호는 3경기부터 9경기까지 단 한번도 4위 밑으로 내려가지 않는 뚝심의 플레이로 결국 역전에 성공했습니다. 기록을 뒤져보니, 1차 예선에서 8위를 기록한 선수가 상위 라운드 진출에 성공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더군요. 박현호가 왜 뚝심의 아이콘인지 확실히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벼랑 끝에서 부활한 박현호의 이번 플레이에는 오존게이밍 안한샘 감독의 역할이 컸다고 합니다. 경기 내내 '박현호의 실력은 인정하지만 대회에선 운도 무시할 수 없다. 마인드 컨트롤에 집중하라'는 조언을 되새기며 경기에 임했다고 하네요. 결과적으로 패자조에 극적으로 합류하긴 했지만, 1차 예선의 부진은 박현호에게 소중한 경험으로 남을 것이 분명합니다.
◆카트계의 '92라인'
연예계에 '규라인', '용띠 라인'이 있다면, 카트 리그에는 '92라인'이 있습니다. 92년생인 박현호, 조성제, 박인재, 이중선, 이중대 등이 92라인에 속해 있죠.
10차 리그 이후 S3리그가 1년 반 동안 멈춘 상태에서 대부분의 선수들은 S2 연습에 집중했습니다. 정규 리그가 진행되지 않는 상황에서 선수들은 비공식 리그나 이벤트 리그를 전전하며 경험을 쌓았는데, 이때 우승했던 멤버들은 대부분 92라인 선수들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박현호와 이중선이 독보적이었죠. 유독 S2에 강한 이 선수들 덕분에 'S2는 92라인이 잘한다'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으니까요.
이번 주 패자조 경기에서 박현호는 오랜 라이벌인 이중대와 함께 경기를 펼치게 됩니다. 한때 같은 길드 소속으로 우정을 쌓은 친구이지만, 연습 중이라도 서로의 아이디가 보이면 묘한 경쟁심에 불타오르며 선의의 경쟁을 펼치는 사이입니다. 아직 몸이 풀리지 않은 이중대와 후반부에 엄청난 힘을 뿜어내는 박현호의 경기가 벌써부터 기대가 되네요. 여기에 물불 안가리고 몸싸움에 뛰어드는 브루터스의 달인 원상원까지 합류했으니, 패자조 역시 평범한 경기는 절대 나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박현호의 특화 전략
지난 주 소개해드렸던 박인재 선수는 10개의 리그 트랙 중 무려 9개를 4륜으로 선택했지만, 박현호는 오히려 반대의 전략을 취하고 있습니다.
광산 위험한 제련소, 꼬불꼬불 다운힐, 포레스트 아찔한 다운힐, 문힐시티 숨겨진 지하터널, 대저택 은밀한 지하실, 팩토리 미완성 5구역 등 무려 6개의 트랙에서 바이크를 타는 전략을 사용합니다. 다른 선수들에 비해서 바이크로 평균 2개의 트랙을 더 타는 것인데요. 몸싸움에 확실한 자신감이 없으면 절대 선택할 수 없는 작전이기도 합니다. 바이크로 4륜과의 몸싸움도 불사해야 하니까요.
박현호의 가장 큰 장점은 트랙에 대한 구간별 이해도가 높다는 것입니다. 소위 '히든라인'이라 불리는 구간들을 여러 군데 알고 있기 때문에 라인 확보가 쉬운 바이크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데요. 팩토리 미완성 5구역과 포레스트 아찔한 다운힐의 히든 라인은 현재도 박현호를 포함한 극소수의 선수만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른 선수들이 실전 연습을 통해 트랙에 적응하는데 반해, 박현호는 전체 트랙을 구간별로 체크하고 다양한 라인과 빌드를 시험해보면서 경우의 수를 늘려가는 타입이죠. 따라서 경기 도중 바디 순서가 꼬이더라도 상대적으로 타격이 적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국가대표 박현호
중국에서 카트라이더의 인기가 대단한 것은 유저 여러분들께서도 알고 있을 겁니다. 카트리그 생방송이 종료됨과 동시에 중국 사이트에 영상이 올라오고, 중국 유저들은 그 영상에 댓글을 달고 선수들의 플레이를 분석하면서 카트를 즐깁니다. 선수들의 이름은 물론 아이디와 길드 이름까지 외울 정도라고 하니, 대단한 관심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한국 게임에 대한 관심과 동시에 선수들에 대한 관심도 더욱 높아지고 있으니까요.
2010년 겨울, 한국과 중국 양국간의 카트 대결이 부산에서 펼쳐졌습니다. 중국 선수들의 한국 카트에 대한 관심은 놀라울 정도였고, 기대에 부응하듯 한국 선수들은 중국 선수들을 압도적인 기량으로 제압합니다. 퍼펙트에 가까운 승리였죠. 박현호는 이날 김택환, 김선일, 이중선과 한 팀을 이뤄 우승을 차지했고, 중국 선수들의 사진과 싸인 요구로 즐거운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런데 2011년 겨울, 중국에서 열린 두 번째 한중전에서는 상황이 역전됐습니다. 김대겸, 김택환, 조성제, 박현호로 이루어진 한국팀이 중국에 무려 1:9로 패배한 것인데요. 원정 경기였고 장비에 문제가 있었음을 감안해도 충격적인 패배임은 부인할 수 없는 결과였습니다. 중국 리그 1위부터 4위로 이루어진 드림팀의 실력은 한국에 비해 결코 떨어지지 않았거든요.
현재 한중 대결의 스코어는 1:1. 박현호는 벌써부터 올해 말에 열릴 한중대전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번에야말로 한국의 실력을 제대로 보여주고, 잃어버린 자존심을 회복해야죠.
◆오존 게이밍의 살림꾼
박현호 선수와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숙소 생활에 대한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숙소 생활을 하다 보면 요리와 청소, 빨래 등 기본적인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각자 분담해서 하는 경우가 많은데, 최근 박현호는 남성미 넘치는 외모와는 달리 '엄마'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원래 박현호의 담당은 화장실 청소였는데, 학교에 다니는 선수들과 리그 탈락자가 발생하면서 점점 일이 늘어가고 있다네요. 요리담당 박인재는 저녁만 되면 사라지고, 설거지 담당 동생들은 학교에 가고, 빨래 담당 조성제는 리그 탈락 후 집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군필자 장진형은 방청소 담당인데, 무시무시한 말년병장 포스를 뿜어내며 박현호를 주눅들게 만든다고 합니다. 결국 밥, 빨래, 청소, 설거지 모두 '엄마' 박현호의 몫이 됐다네요.
박현호의 절규는 너무나 간절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제발 밤에 뭐 먹으면 설거지 좀 하고 자자. 라면은 너희들이 먹고 설거지는 내가 하냐!”
◆박현호의 목표
박현호가 패자조를 넘어 패자부활전에서 1등을 차지하면, 그랜드파이널에서는 저주의 '퍼플' 자리에 앉게 됩니다. 많은 선수들이 좌절했던 퍼플 라이더로 사상 첫 입상을 노리는 것이, 이번 리그 박현호의 첫번째 목표입니다. 박현호의 패자조 진출은 이번이 3번째인데, 그동안 2번의 패자조 경기에서는 모두 1위로 패자부활전에 진출했던 경력이 있습니다. 본인의 표현으로는 패자조에 대한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다고 하네요. 조별 예선에서의 부진을 씻고, 사상 첫 7경기 퍼펙트도 노려보겠다는 야심찬 포부도 밝혔습니다.
진지한 얘기를 이어가던 박현호에게 "이제 연습할 거니?" 라고 물어보니 이렇게 답하네요.
"형 저 이제 밥하러 가야 돼요."
어떤 위기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뚝심의 박현호가, 이번 패자조 경기에서 더욱 흥미진진한 경기로 여러분들께 보답하기를 기원합니다.
온게임넷 정준 해설 위원
정리=데일리e스포츠 이소라 기자 sora@dailyesport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