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후반 AC 밀란을 이끌었던 아리고 사키 감독의 등장 이후 '압박'이란 단어는 현대 축구의 가장 큰 화두가 됐다. 공격과 수비 라인의 간격을 최대한 좁힌 상태에서 선수들 간의 유기적인 수비 조직력으로 빚어내는 하나의 작품인 '압박 축구'는 현재 어떤 팀이든 기본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전술의 형태다.
아리고 사키는 당시 유행하던 토털 축구의 개념에 압박을 접목시키며 AC 밀란의 챔피언스 리그 2회 연속 우승을 이끌었다. 이에 반대되는 용어가 바로 '탈압박'이다. 상대의 압박에 맞서 다양한 방법으로 공격 작업을 진행하는 것을 뜻하는 탈압박은 선수의 개인 전술과 팀 전술이 매끄럽게 융화돼야만 가능하기 때문에 팀 호흡과 개인 기량이 톱니바퀴처럼 맞아 들어가야 구사할 수 있다. 축구의 축소판이라 볼 수 있는 피파온라인3 챔피언십에서도 이 압박과 탈압박의 불꽃 튀는 대결이 펼쳐졌다.
지난 5월 16일 강남 넥슨 아레나에서 아디다스 피파온라인3 챔피언십 2015 결승전이 열렸다. 경기 시작 전부터 화려한 경기를 보여주는 김승섭, 효율적인 축구를 구사하는 장동훈으로 요약됐던 이 매치업은 단순한 양상만으로 진행되지는 않았다.
선수들은 매 세트마다 전술에 변화를 줬고 선수 교체 등 치열한 심리전을 통해 미세한 차이를 극대화하려 애썼다. 5세트까지 손에 땀을 쥐는 경기를 펼치면서 한 편의 실제 축구 경기를 본 듯한 느낌을 받은 필자는 피파가 아닌 축구의 시각에서 이 경기를 분석하기로 했다.
◆느림의 미학
압박을 벗기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팀 동료와의 월패스 연계를 이용해 상대 수비수 반응 보다 먼저 공을 전달할 수도 있고 롱패스가 좋은 선수를 활용해 공간 침투하는 선수에게 '대륙 횡단 패스'를 뿌릴 수도 있다. 물론 FC 바르셀로나같이 강력하다면 '티키타카'를 추천한다.(그러나 섣불리 따라하다 망하면 책임은 플레이어에게 돌아간다)
탈압박은 보통 빠른 템포로 상대보다 먼저 공을 이동시키는 것에 포인트를 맞추기 마련이다. 하지만 김승섭이 압박을 벗겨내는 방법은 달랐다. 공격시 수비 라인을 완전히 끌어올린 김승섭은 앵커맨 보드메와 홀딩 미드필더 마티치까지 이용해 경기 템포를 최대한 죽이며 공격을 전개했다.
◇김승섭이 장동훈이 들고 나온 협력수비의 약점을 제대로 파고드는 경기 운영을 보여주며 2대0으로 앞서갔다.
장동훈이 자신의 특기인 협력 수비로 압박해오면 욕심내지 않고 공을 뒤로 돌려버리는 등 침착하게 페이스를 주도했다. 준비했던 경기 템포가 계속 늦어지자 장동훈은 생각이 많아졌다. 흐름을 자신에게 돌리려면 어떻게든 공을 뺏어야만 한다고 판단한 장동훈은 최종 수비수들까지 공격 라인으로 끌어 올리며 협력 수비에 가담시켰다.
협력 수비는 상당히 효율적인 수비 방법이다. 상대의 패스 시야를 차단할 수 있고 개인 전술이 좋은 상대 선수의 개인기에도 대비가 가능하다. 물론 협력한 수비수 뒤쪽으로 드넓은 공간을 허용한다는 점은 엄청난 약점으로 작용한다.
김승섭은 장동훈이 택한 협력 수비의 단점을 파고들었다. 협력 수비에 가담했던 수비수가 자리를 잡지 못한 사이 로빙 패스로 라인 브레이킹을 시도하는 공격수들에게 공을 전달했다. 이 모든 걸 가능케 한 선수는 마티유 보드메다. 앵커맨으로서 상대 패스 차단과 템포 조절의 중책을 맡은 보드메는 뛰어난 공 간수 능력으로 전체적인 경기 템포를 조절하며 빌드 업을 이어나갔다.
템포 조절에 장동훈이 완전히 말려들었다고 생각한 김승섭은 예선 때부터 보여준 다양한 공격 루트로 두드렸다. 측면에서 꾸준히 크로스를 시도했고 중앙에서는 빠른 패스를 통해 슈팅 찬스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메시처럼 개인 전술이 가능한 선수로는 멋진 중거리 골까지 뽑아냈다. 결승전 초반 김승섭에 유연한 템포 조절에 장동훈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게겐 프레싱
축구팬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전술이 바로 '게겐 프레싱'이라 불리는 압박 형태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전방 압박을 극대화해 공격 중에도 압박 진영을 보이지 않게 유지하고 공을 뺏길 경우 최단 거리에 있는 모든 선수들이 동시에 둘러싸서 공의 재탈환을 노리는 방식이다.
◇3세트에서 장동훈이 야야투레를 투입시킨 뒤 경기 흐름이 바뀌었다.
장동훈은 상대가 들어오는 것을 받아치는 수비 전술에서 템포가 계속 어긋나면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자 게겐 프레싱 형태의 압박을 시도했다. 장동훈은 수비형 미드필더인 야야 투레를 3세트 시작과 동시에 전방으로 교체 투입했다. 적극적으로 전방 압박에 더 힘쓰겠다는 그의 승부수였다.
야야 투레를 활용한 장동훈은 공격시 수비 라인을 중앙선까지 끌어올려서 간격을 촘촘하게 만들었고 공이 뺏길 때 곧바로 압박을 가했다. 이는 수비뿐만 아니라 공격까지 원활하게 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김승섭의 진영에서 수적 우위를 가져갈 수 있기 때문에 결승전 초반에는 보여주지 못했던 좌우를 넘나드는 플레이까지 가능했다. 흐름을 되찾은 장동훈은 김승섭의 박스 근처에서 패스의 정확도가 눈에 띄게 높아지기 시작했다. 초반 신나게 공격만 하던 김승섭은 갑작스러운 경기 흐름의 변화를 느낀 듯 조급한 플레이를 펼쳤다. 장기인 다양한 공격 루트를 생각하지 못하고 중앙 공격만을 고집해 장동훈의 마티치에게 번번이 차단했다. 그렇게 장동훈은 0대2로 뒤졌던 세트스코어를 2대2까지 따라잡았다.
◇운명을 가른 장동훈과 김승섭의 마지막 5세트.
운명의 5세트. 김승섭은 자신의 문제점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장동훈의 게겐 프레싱에 맞서 상대방과의 경합 상황에서도 밀리지 않고 빌드 업 능력도 출중한 부스케츠를 투입했다. 공격진과 수비진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과 동시에 다양한 방향으로 공격 전개를 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장동훈은 수비수 콤파니를 수비형 미드필더로 투입해 수비 안정화에 다시 한 번 힘썼다. 스피드가 빠른 콤파니를 투입해 상대의 장기인 빠른 역습에 순간적으로 쓰리백 변환을 가능케 하기 위함이었다.
장동훈의 첫 골도 수비 집중력이 만들어냈다. 라모스와 퍼디난드의 협력 수비를 통해 상대의 공격을 끊어낸 장동훈은 다섯 번의 패스만에 골을 추가했다. 공격 진영에 많은 선수가 올라와 있던 김승섭에게 날린 장동훈의 역습 카운터펀치였다. 김승섭은 후반전 쓰리톱으로 승부수를 던졌지만 이미 장동훈은 수비의 안정감을 찾은 뒤였기에 김승섭에게 박스 안 진입을 허용치 않았다. 추가골까지 기록한 장동훈은 '패패승승승' 스코어로 대망의 우승컵을 차지할 수 있었다.
◆공격은 팬을 부르고 수비는 승리를 부른다
'Offense sells tickets, defense wins championships.'
스포츠에서 유명한 명언이다. 김승섭은 다양한 공격 루트와 유려한 완급 조절을 통해 어떤 선수인지를 팬들에게 확실히 각인시켰다. 그가 보여준 화려한 공격력은 다음 시즌에서도 이 선수의 경기만큼은 꼭 챙겨보고 싶다는 기대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우승자인 장동훈은 자신의 뚝심을 제대로 보여줬다. 0대2로 몰리는 상황에서 보통 선수 같으면 지나친 승부수를 던져서 스스로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장동훈은 우승자가 왜 우승자일 수밖에 없는지 보여주고 증명했다.
야야 투레를 전방으로 올리는 선택을 통해 장동훈은 지나친 승부수가 아닌 자신이 준비해 온 전략을 차분히 수행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선택은 상대에게 끌려다니던 자신을 다잡는 역할을 했고 결국 우승컵에 키스할 수 있었다.
김지원 기자 (corpulento@dailyesport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