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에게 남은 것은 추가시간을 최대한 버티며 흘려 보내면 되는 것이었다. 매번 한국에 밀려 월드컵 진출에 고배를 마셨던 일본으로서는 승리의 확신이 끓어오르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울트라 닛폰(일본 축구 대표팀 응원단 애칭)은 월드컵 첫 본선 진출을 자축하며 술집에서 거리에서 서로를 위한 축배를 미리 들고 있었다.
같은 시각, 카타르의 다른 경기장에서는 한국과 북한의 최종전도 펼쳐지고 있었다. 사흘 전 벌어졌던 일본과의 대결에서 패해 자력 진출이 불가능했던 한국은 최종전에서 북한에게 최대한 많은 골을 넣고 승리한 뒤 일본이 이라크와 무승부를 거두거나 패배해야지만 월드컵 진출이 가능했다.
때문에 한국은 고정운과 황선홍, 하석주가 연이어 점수를 따내며 3대0 대승을 거뒀음에도 불구하고 김호 감독을 비롯한 코칭스태프들의 표정은 풀이 죽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직 경기가 끝나지 않은 일본과 이라크의 경기 스코어가 2대1이라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기적을 바랐지만 남은 시간이 너무 없다는 것을 안 한국 선수단은 내심 월드컵 티켓을 포기하는 분위기였다.
기적이 일어난 것은 경기 종료 10초 전. 이라크의 오만 자파르가 껑충 뛰어 올라 머리에 맞춘 공이 그대로 일본 골 네트를 흔들었다. 진출과 탈락을 가리는 극적인 동점골치고는 상당히 무난한 득점이었다. 하지만 이 골 하나가 가지는 의미가 너무 컸다. 동점골을 내준 뒤 일본은 그야말로 벼락을 맞은 분위기였다. 귀화 선수인 후이 라모스마저 그라운드에 주저앉아 땅만 바라봤고 경기를 중계하던 캐스터와 해설자도 말을 잇지 못 했다.
반대로 "일본이 비겼다!" 본부석 한국 측 임원의 이 한마디에 한국 선수들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벗어났다. 선수들과 코칭스태프는 너나 할 것 없이 서로를 부둥켜안았고 지옥에서 빠져 나온 기쁨을 피치 위에서 표출했다. 벤치에서 망연 자실 한 표정을 짓고 있던 김호 감독도 주변 기자들의 '만세' 소리에 덩달아 '만세'를 외쳤다.
김 감독은 "지옥에서 천당으로 온 느낌"이라는 코멘트로 이 숨 막혔던 10월 28일을 정리했다. 경기 다음 날 이라크 대사관에는 이라크 대표팀과 오만 자파르에게 감사를 표시하는 한국 국민들의 전화 및 팩스가 쇄도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한국 축구 사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 이었던 이 사건을 현재 우리는 '도하의 기적'이라고 부른다.
◆서초동의 기적
배우들이 모두 모였다. 지난 29일 펼쳐진 피파온라인 3 아디다스 챔피언십 2015 시즌2 12강 D조 경기를 위해 선수들이 속속 서초동에 위치한 넥슨아레나에 도착했다. D조 구성원들은 어느 조와 비교해봐도 쟁쟁한 선수들뿐이다. 준우승자 김승섭이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감은 여전했고, '데드볼 스페셜리스트' 고건영도 언제 조별예선을 뚫는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팬들의 시선은 오히려 다른 곳에 쏠려있었다. 다수의 선수가 우승후보로 꼽은 전경운이었다.
전경운은 현재 피파 선수들에게 대선배 뻘이다. 지금은 프로 게임단 감독으로 활약하고 있는 이지훈의 선수 시절을 경험했던 정말 '오래된' 게이머이기도 하며, (전경운은 2004 WEG 국가대표 선발 3-4위전에서 피파 스타였던 이지훈을 이기고 국가대표에 선발되기도 했다.) 삼성전자 칸 소속으로 같은 팀 박윤서와 함께 수많은 대회를 휩쓸고 다닌 '전설'이기도 하다.
준우승자와 자신만의 개성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선수, 그리고 돌아온 전설이 같은 조에 섞여있으니 치열한 혼전 속에서 재밌는 경기가 나올 것이라고 예상은 했다. 다만 이런 대형 사건이 터질 줄은 몰랐을 뿐이다. 제목은 '서초동의 기적'이 좋겠다. 앞서 설명한 국가적인 사건이었던 '도하의 기적'과 비교하는 것은 당연히 무리지만 나름 소소한 재미를 줄 것이다. 이 정도 스토리라면 시청률 10% 정도는 자신 있다.
◆주인공은 부진해야 제 맛
'돌아온 전설' 전경운은 예선 초반 좀처럼 실력 발휘를 하지 못 했다. 조별 예선에서 첫 번째 상대는 단순한 상대 한 명 이상에 의미가 있다. 첫 번째 상대와의 플레이 및 경기 결과에 따라 전술 변화와 팀의 분위기 수습, 다음 상대에게 맞서기 위한 방법을 다르게 가져가야 하기 때문이다.
월드컵 조별예선에서 축구 전문가 및 선수들이 '첫 상대가 가장 중요하다'라고 말하는 것도 그런 의미이다. 하지만 전경운은 첫 상대가 너무 나빴다. 지난 시즌 준우승자 김승섭. 말 그대로 현재 피파 온라인이라는 프레임에서 최상위권에 속한다고 스스로 검증을 해낸 선수였다.
전경운 자신의 상태도 문제였다. 오랜만에 앉아보는 경기석의 긴장감은 그의 수비를 헐겁게 만들었고, 공을 잡았을 때 다급한 플레이는 패스 미스로 이어졌다. 정신없이 수세에 몰려 영패를 면하지 못한 뒤 바로 만난 고건영과의 경기마저 2대3 펠레 스코어로 패배했으니 정신적으로 타격이 있음이 분명했다. 그라운드 위에서 선후배는 필요 없다지만 대선배 입장에서는 까마득한 후배들에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너무 가혹한 예선 초반이었다.
4세트에서 전경운이 다시 만난 김승섭은 역시나 너무 강했다. 전경운이 선취골을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경기를 했다. 화려한 개인기와 다채로운 공격 패턴이 집약된 김승섭의 축구는 레드카드를 받아 수적 열세에 놓인 것 정도는 문제가 없어보였다.
오히려 주도권을 내내 잡고 있었으며 지난 시즌보다 더 농익은 듯한 템포 조절이 가히 압권이었다. 이렇게 전경운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내리 3연패를 당하게 된다. '남은 경기가 단 한 경기인데 3패를 당했다?' 이 정도면 남은 경기는 큰 의미가 없었다. 사실상 탈락이 확정될 만큼 좋지 못한 성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 이야기의 마침표를 찍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다시 펜의 잉크를 묻히도록 하겠다. 아직 할 이야기가 많다. 기적의 시발점이 바로 이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유종의 미'라고 생각했던 경기
D조 5세트는 조별 예선 2위 싸움을 하는 경기였으나 사실 전경운의 마지막 경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미 2세트 맞대결에서 고건영이 승리를 거두기도 했고, 고건영은 비기기만 해도 자력으로 8강 진출을 확정할 수 있었다. 만약 패하더라도 대량 실점을 하지 않는 이상 골 득실에 따라 8강 진출이 사실상 가능한 상황이었다.
◇전경운과 고건영의 5경기.
전경운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빠른 시간 안에 득점을 해내느냐가 중요했다. 이미 마음을 비운 상태였지만 전경운은 더 타이트하게 경기를 운영했다. 펠라이니와 즐라탄 등 장신 선수들을 활용한 크로스 플레이로 공격의 물꼬를 텄고, 중단에서 최대한 압박에 많은 숫자를 투입했다. 원 터치 패스를 사용해 공격 전개 시간을 최대한 줄여 대량 득점을 노렸다. 그렇게 두 골을 먼저 선취해 고건영과의 득실차를 조금이라도 줄이는 데 성공했다.
경기 내내 대량 실점을 하지 않기 위해 버티기 위주에 경기를 하던 고건영의 천재성이 번뜩인 것은 후반 70분경이었다. 전경운의 중앙 수비수인 나우두가 헤딩 패스를 실수했다. 그러자 중앙 수비수 두 명이 서로 겹치며 '1+1=0'이 되는 상황이 발생한 것. 수비 라인을 끌어올리며 상대의 역습에 빠르게 대응하지 못한 그 틈을 고건영은 놓치지 않았다.
상대 수비수를 뒤에 달고 뛰는 루카 토니에게 정확히 스루 패스를 연결했고 멋진 칩샷으로 만회골을 기록했다. 전경운 입장에서는 결국 2대1로 승리를 했지만 이 한 점이 너무나 뼈아픈 실점이었다.
◆'승섭 자파르'의 선물
이제 상황은 명확해졌다. 한 경기만을 남겨놓고 김승섭은 3승(승점 9, 골 득실 6)으로 이미 조 1위 진출이 확정된 상황. 고건영은 1승 2패(승점 3, 골 득실 -1), 모든 경기가 끝난 전경운은 1승 3패(승점 3, 골 득실 -5)의 상황. 김승섭이 고건영에게 4대0 스코어에 대승을 거둬주지 않는다면 전경운은 '돌아온 전설'이라는 애칭이 머쓱할 정도에 경기력 만을 보인 채 집에 돌아가야 했다. 김승섭의 선물을 기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전반전 김승섭의 지역 방어가 빛났다. 측면에서 상대가 공을 잡으면 상대에게 맹렬히 돌진해 붙기보다는 패스 루트를 차단하고 아군 수비의 지원을 기다렸다. '독 안에 든 쥐' 꼴이 되고 말았던 고건영의 공격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고건영은 수비에서도 첫 번째 터치가 김승섭에게 계속 걸리며 실수를 연발했다. 결국 페널티 박스 안에서 연속된 실책으로 상대에게 2골을 헌납해주고 말았다.
◇김승섭과 고건영의 마지막 경기.
김승섭 특유의 다채로운 공격은 세 번째 골에서 화룡점정을 찍었다. 적절한 공간 활용 및 횡 패스로 문전 앞 찬스를 노리던 김승섭은 수비 뒤로 돌아들어가는 즐라탄을 발견한 뒤 베일로 멋진 포물선을 그리는 로빙 스루패스를 뿌렸다. 가슴으로 안정적으로 트래핑 하는데 성공한 즐라탄은 왼쪽 포스트로 강하게 차 넣어 스코어를 3대0까지 벌렸다. 이제 전경운에게 선물을 운반 완료하는 데까지 딱 1골이 남아있었다.
여기서 마지막 네 번째 골을 넣은 세브첸코의 기용이 흥미롭다. 사실 세브첸코는 김승섭이 상위 라운드에 대비하기 위해서 시험 삼아 기용하는 느낌에 불과했다. 왼쪽에 배치된 세브첸코는 경기 내내 존재 자체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이 선수가 고건영에게 비수를 꽂을지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경기 86분경 왼쪽에서 페널티 박스 근처에서 공을 잡은 세브첸코는 공을 끌면서 상대 수비 세 명의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아군들과의 연계를 통해 수비 뒷 공간으로 돌아 들어갈 시간을 벌었고, 그의 폭발적인 순간속도도 이를 좀 더 매끄럽게 가능케 했다. 그렇게 해서 김승섭만이 가능하다고 단언할 수 있는, '팀으로서의 축구' 측면에서 본다면 가장 아름다운 골이 탄생했다.
'승섭 자파르'의 선물 덕택에 고건영과 전경운의 위치는 순식간에 바뀌었다. 집에 돌아가야 했던 전경운은 상위 라운드 경기를 준비하게 되었고, 사실상 진출 확정이었던 고건영이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서초동의 기적'은 이렇게 마무리가 되었다.
기대가 상당했던 조여서 그런지 몰라도 김승섭을 제외한 두 선수의 경기력은 확실히 기대 이하였다. 고건영의 플레이는 상당히 답답해 보였으며 전경운은 초반 긴장을 털어내지 못하고 실망스러운 경기를 했다. 하지만 이 세 명이 보여준 드라마 같은 조별 예선은 대회에서 이런 장면이 또 나올 수 있을까 하는 진귀한 경험을 가능케 했다.
데일리e스포츠 김지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