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즌에 이어 이번 시즌 역시 '죽음의 조'에서 살아남은 박준효의 기량은 여전히 수준급이었고, 과감한 개인기를 앞세운 화려한 공격력으로 찬사를 받는 정세현도 언제든 우승을 노릴 수 있는 선수다. 때문에 피파 게이머 원창연은 이 매치 업을 '결승전이라 해도 이상할 게 없는 최고의 8강 대진'이라 평하기도 했다.
전문가들이 '50대50' 이라며 승자 예측에 난색을 표하고 있을 때, 팬들은 박준효의 압도적인 승리를 점쳤다. 정세현이 얻은 지지율은 단 8%에 불과했다. 피파 게이머 중 가장 인기가 많은 박준효의 두터운 팬층이 투표 결과에 영향을 끼쳤겠지만 실로 충격적인 숫자가 아닐 수 없었다. '공격'이라는 색깔로 대표되는 선수 간의 승부 예측에서 이 정도에 지지율 차이가 벌어지는 것은 경기를 앞둔 정세현에게 상당한 부담감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세현은 승부 예측 결과에 부담감보다 불쾌함을 느꼈나 보다.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 과감함을 무기로 삼은 정세현은 오히려 경기 시간이 지날수록 이를 악물었고 경기 막판을 자신의 시간으로 만들면서 이 '결승급 대진'의 승자가 됐다. 두 자리 수도 되지 않는 지지율을 뒤집은 충격적인 결과에 정세현 역시 "아직도 내가 어떻게 이겼는지, 어떤 경기를 했는지 모르겠다. 실감나지 않는다"며 놀라워했다.
◆다소 찜찜했던 박준효의 1세트 승리
다전제에서 첫 세트를 승리하는 것은 1승 이상에 의미를 지닌다. 박준효도 경기 시작 전 인터뷰에서 "1세트를 승리하는 사람이 이길 것 같다"라며 첫 번째 경기에 사활을 걸겠다는 의도를 내비쳤다. 그런 박준효가 꺼내든 승부수는 폴 포그바와 패트릭 비에이라로 구성된 중앙이었다.
이 둘은 프랑스 축구의 과거와 현재다. 자국에서 열린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우승 멤버이자 수년간 전 세계 최고의 중앙 미드필더로 꼽혀온 비에이라와 2013년 프랑스 U-21 팀을 유럽 정상에 올려놓고 자신은 유럽 최고의 유망주에게 주는 '골든 보이'상을 수상하며 '제2의 비에이라'라고 불리는 포그바. 박준효는 이 두 명을 배치하면서 중원 싸움에서 절반 이상을 잡고 들어가겠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표출했다.
공격과 수비의 균형이 잘 잡혀있고 빌드 업도 능한 선수들이기 때문에 왕성한 활동력을 바탕으로 중원을 잠식하고 박준효의 주요 득점 루트인 호날두와의 연계 플레이도 충분히 가능한 선수 구성이었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이 선수 배치 결과는 영 신통치 않았다. 오히려 많은 선수를 공격에 배치해 전방부터 압박에 나선 정세현에게 다소 당황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비에이라와 포그바는 서로가 가진 시너지를 전혀 살리지 못하고 중원에서 힘든 싸움을 해나갔다.
후반전이 되면서 호날두를 이용한 연계 플레이가 살아났지만 가까스로 얻어 낸 일대일 찬스마저 살리지 못하는, 평소 박준효답지 않은 실망스러운 장면이 나오면서 경기가 지루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런 면에서 73분경 첫 세트의 유일한 득점인 드록바의 프리킥 골이 박준효 입장에선 정말 다행인 부분이다. 이 골이 조금 더 늦게 터졌다면 박준효의 1세트 승리는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 경기가 '이기면 장땡(?)'인 단판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다음 세트까지 생각해야 하는 다전제에서 박준효는 뜻대로 경기가 풀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승리한, 조금은 '찜찜한' 1세트 선취에 성공했다.
◆누가 잠자던 네드베드를 깨웠나
박준효가 비에이라와 포그바로 구성된 '프랑스 신과 구 조합'을 승부수로 꺼내들었다면 정세현이 꺼내든 카드는 축구팬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게 하기 충분했다. 황금색 사자머리를 휘날리며 그라운드를 미친 듯이 질주하는 '파벨 네드베드'는 그 이름만으로도 축구팬들에게 큰 자극을 주기에 충분한 선수다.
'두 개의 심장'이라는 애칭처럼 엄청난 활동량을 자랑하고 폭발적인 스피드와 대포알 같은 중거리 슛을 때려냈던 한때 세계 축구를 호령하던 전설이니만큼 이 경기에 등장한 네드베드를 보는 중계진이나 팬들도 기대에 차있었다.
정세현은 네드베드를 오른쪽에 배치했지만 플레이상에서 중앙과 측면을 가리지 않고 돌아다니며 훌륭한 '프리 롤'(전술적 제약보다는 상황에 따라 자유롭게 플레이로 유연하게 대처)의 교본처럼 네드베드를 활용했다.
공격에 많은 숫자를 투입하는 정세현의 전술에서 네드베드는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해냈다. 공격이 박준효에게 차단됐을 때 생기는 광활한 공간을 혼자서 커버하는 장면이나 우측으로 돌파해 들어가며 상대 수비를 자신에게 집중시키고 중앙에 동료에게 정확한 패스를 연결하는 움직임, 특히 공이 없는 상태(오프 더 볼)에서 수비수 두 명쯤은 너끈히 따돌리는 플레이가 상당히 일품이었다.
정세현은 네드베드의 왕성한 활동량을 이용해 아군 공격수들이 더 쉽게 공격에 집중할 수 있는 요소를 만들었고, 수비에서는 부담을 최소화하는 좋은 균형을 유지한 경기를 해냈다. 경기는 이렇게 세트스코어 1대1, 팽팽한 균형을 이룬 채 마지막 3세트를 앞두고 있었다.
◆드라마는 계속된다
이번 시즌은 아무래도 기적이 유행인가 보다. 김승섭과 전경운, 고건영이 만들어 낸 '서초동의 기적'이 마지막일 줄 알았더니 더 드라마틱한 요소를 가진 경기가 나올 줄이야. 사실 이 경기는 전술의 형태가 앞선 경기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전술 같은 것이 크게 영향을 미치지도 않을 것이 분명했다. 피파 역시 사람이 하는 게임이고 마지막 세트라고 한다면 전술과 전략 따위보다 정신력이 훨씬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정세현은 분명히 좋지 않은 출발을 보였다. 소위 '멘탈'이라고 불리는 정신력이 약하기로 유명한 정세현은 전반전 초반 박준효에게 페널티 킥을 허용하며 최악의 출발을 했다. 당연히 자신의 플레이가 될 리 없었다. 점유율은 이미 내준지 오래였고, 꾸역꾸역 버티며 따낸 공도 빠른 역습으로 연결하지 못하고 상대에게 차단당했다.
조급함에서 오는 잘못된 빌드 업이 원인이었다. 더군다나 전반 종료 직전 교체되어 들어온 박준효의 드록바에게 골을 허용하며 카운터펀치를 얻어맞았다. 2세트에서 활약했던 네드베드도 정세현의 흔들리는 경기력을 잡아주진 못했고 결국 정세현은 단 한 번의 슛도 기록하지 못하며 전반전을 마무리했다.
그런 그가 3세트 어두운 터널은 빠져나올 수 있던 이유는 과감함이었다. 박준효의 강력한 중앙 수비에 딱히 활로를 찾지 못 했던 정세현은 중앙을 더욱 고집스럽고 빠르게 파고드는 역발상으로 후반 시작과 함께 한 골을 따라붙었다. 더 놀라운 장면은 동점을 만드는 드록바의 골이었다.
쫓기는 입장이 되자 동요한 박준효의 허를 찌르는 개인기로 측면 깊숙이 들어간 드록바는 각도가 없는 상황에서 발끝으로 공을 깔아 차 그대로 골망을 갈랐다. 과감한 선택이었다. 보통 이런 장면에서는 뒤따라 들어오는 아군 공격수에게 패스를 넘겨주는 것이 일반적이고 안정적인 선택이었지만, 정세현은 자신의 스타일을 그대로 유지했다.
자, 이제 드라마를 완성하는 즐라탄의 마지막 골 장면이다. 두 선수는 모두 엎치락뒤치락하는 경기에서 피로감을 느낀 듯 자잘한 실수를 연발했다. 하지만 어차피 축구는 실수를 하는 게임이다. 실수를 하지 않는다면 모든 게임은 0대0으로 끝난다.
달리 말하면 실수를 조금 덜한 쪽이 승리한다는 것인데 상대에게 동점까지 허용하며 이미 정신적으로 흔들린 박준효는 대형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90분이 지남에 따라서 긴장이 풀렸던 것일까. 중앙에서의 로빙 패스를 받은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가 가슴 트래핑 후 턴하는 동작에 박준효의 수비수 두 명이 그대로 떨어져 나가며 통한의 역전 골을 허용했다.
그의 강점이었던 중앙 수비가 3세트에서만 2골을 허용한 것이 아쉽고, 특히 마지막 실점 장면은 박준효가 두고두고 아쉬움을 표할 만한 장면이었다.
◆축구가 아닌 전투를 했다
정세현은 3세트 연장전을 준비하지 않았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두 골을 따라가며 동점을 만들어 놨을 때 무조건 몰아붙였고, 이길 줄 알았다. 시간도 제대로 보지 못 했다"라며 경기의 마지막을 회상했다. 90분 정규 시간이 모두 멈추고 단 한 번 주어진 공격 기회의 모든 가능성을 조준했던 정세현은 결국 피파 최고의 스타 박준효를 꺾고 4강에 진출할 수 있었다.
사실 정세현의 정신력이 강해졌다는 일부 의견에 대해서 필자는 동의할 수 없다. 포기하지 않고 불구덩이를 탈출한 것은 인정해야 할 부분이나 자잘한 실수도 여러 차례 나왔고 흔들리는 장면도 많았다.
과감함이라는 다른 무기로 그러한 문제점을 덮어버린 것뿐이다. 하지만 정세현이 강한 정신력을 가진 선수여서 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기존 상황과 같은 안정적 템포의 경기를 했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진하는 이런 매력적인 플레이를 할 수 있었을까?
정세현이 3세트 후반에 보여준 공격 템포는 '축구'가 아닌 '전투' 수준이었다. 경기를 포기하는 것을 '돌을 던진다'라고 표현하는데 정세현은 돌을 상대의 얼굴에다가 던져버렸다.
하지만 가끔은 이런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선수가 매력적인 법이다. 정신력은 단기간에 나아지는 게 아니고, 어쩌면 평생 고쳐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본인의 무기를 조금 더 살리는 방안을 연구하는 것이 정세현에겐 우승에 한걸음 다가갈 수 있는 지름길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