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팀인 중국은 지난 인비테이셔널 우승팀인 태국을 꺾으며 결승 진출에 성공했다. 특히 세트스코어 1대2 위기 상황에서 출전한 딩차이롱은 깔끔한 수비 위주 플레이를 앞세워 두 세트를 연달아 따내며 결승 진출에 일등 공신이 됐다. 결승전이 시작되기 앞서 막강한 실력과 독특한 스토리를 가진 이 선수에게 이목이 집중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가 바로 정재영이다. 언리미티드 소속으로 한국 무대에서 활동하다가 중국 프로팀의 제의를 받고 대륙으로 건너갔다. 중국 선수들에게 '공공의 적' 소리를 들으면서도 각종 대회에서 입상했고 중국 관중들이 보낸 야유를 애써 무시하며 성공만을 위해 달려왔다. 그리고 그토록 달고 싶었던 태극기 대신 오성홍기를 가슴에 달고 아시안컵 무대에 섰다.
얄궂은 운명이다. 상대는 한국이고 세트스코어는 지난 준결승과 마찬가지로 1대2였다. 정재영의 '캐리'가 필요한 상황. 그 상황을 다시 되짚어 보기로 했다. (대회 기간 내내 딩차이롱으로 불렸지만 그의 여권은 여전히 초록빛이다. 딩차이롱이 아닌 정재영이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정재영이 박준효를 맞아 구상했던 전술의 틀은 '공격 일변도'였다. 뒤가 없는 상황에서 당연한 결정일지도 모르지만 수비력에 강점을 가지고 있는 정재영으로서는 흐름이 한 번 끊기면 와르르 무너질 수도 있는 '양날의 검'이기도 했다. 레미와 루카쿠 투톱은 충분한 파괴력을 자랑하지만 공이 연계되지 않으면 외딴섬처럼 둥둥 떠다닐 가능성도 존재한다.
때문에 라카제트와 바클리를 투입해 원활한 공 배급을 노렸고 우측에 그리즈만이라는 언제든 골을 넣을 수 있는 선수를 배치함에 따라 투톱이 터지지 않을 시까지 계산한 치밀한 전략으로 경기를 시작했다.
◇정재영과 박준효의 아시안컵 결승 경기.
이에 반해 박준효의 전략상 키 플레이어는 미켈이었다. 데 브루잉과 하메스 로드리게스처럼 중앙으로 컷인해서 들어오는 윙플레이어들과 함께 중앙 공격의 힘을 실을 수도 있고 수비진 바로 앞에 박혀있는 위치에서 상대 공격수 한 명을 지워버릴 수도 있는 선수다. 그만큼 공수 양면에서 무게감을 가지고 있는 선수고 엄청난 활동량을 자랑하는 '탱크'이기도 하다. 경기가 잘 풀린다면 말이다.
경기 초반은 탐색전이었다. 서로 안정적으로 패스를 몇 번 돌렸고 긴장감을 떨칠 겸 개인기를 몇 번 시험한 것이 전부였다. 신중하고 또 생각이 많았다. 어쩌면 축구는 단순함 속의 왕도가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이 많으면 발이 꼬일지도 모른다. 박준효처럼.
정재영의 그리즈만이 우측 사이드를 폭파시켰다. 그리고 안쪽 방향으로 헛다리를 한 번 짚자 박준효의 케이힐의 스탭이 엉켰고 그리즈만의 시야에는 넓디넓은 골 찬스가 펼쳐졌다. 너무도 신중했던 박준효의 수비가 어정쩡한 모습을 보이면서 허용한 선제골이었다.
전반 40분경 박준효는 찬스를 잡았다. 페널티 박스 바로 앞에서 얻어낸 프리킥. 키커는 슈바인슈타이거였고 골문 구석으로 감은 공은 골키퍼를 지나 쉽게 빨려 들어가는 듯 보였다. 하지만 박준효가 프리키커를 교체할 때 미리 그 코스로 수비수를 이동시켜 놓은 정재영의 승리였다. 공은 페페의 몸에 맞고 튕겨져 나왔다. 박준효 입장에서는 두고두고 아쉬운 장면이었다.
정재영은 경기 내내 박준효의 장기인 사이드를 완벽히 봉쇄시켰다. 공이 사이드로 이동하고 난 이후 수비하는 게 아닌 미드필드 중앙에서 보급로 자체를 끊어버리면서 흐름을 가져왔다. 사이드를 노리는 플레이가 먹혀들지 않자 박준효는 측면에 위치한 선수들에게 적극적인 컷인을 주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중앙으로 길게 넘겨준 패스를 측면에서 기웃대던 하메스 로드리게스가 빠르게 반응하면서 상황을 원점으로 바꿔놨다.
동점 이후 연장전까지 기세는 박준효의 것이었다. 중앙과 사이드를 가리지 않고 파상공세를 펼치며 정재영을 코너로 몰아세웠다. 하지만 정확한 한 방이 부족했다. 결과적으로 이때가 경기를 끝내고 우승을 확정 지을 수 있었던 최고의 순간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국이 우승할 수 있는 골든타임이 지나가고 있었다. 정재영은 결국 승부차기에서 서든데스까지 가는 접전 끝에 한국 챔피언을 경기석에 앉힐 수 있었다.
◆최종 보스를 마주하다
무결점 공수 밸런스와 상대를 질식시키는 압박, 감탄을 자아내는 빌드 업과 물 흐르듯 흘러가는 패스의 정확도, 그리고 단 한 번의 찬스를 골로 연결하는 결정력까지. 완성형에 가장 가깝다는 평가를 내리고 싶은 현 한국챔피언 양진협이 마지막 경기를 위해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정재영은 챔피언과의 기세 싸움에서 전혀 밀리지 않았다. 양진협이 자랑하는 철옹성 같은 수비를 자신의 공격으로서 뚫어내겠다는 심산으로 이전 경기와 같은 포메이션을 들고 나왔다. 여기에 밸런스형 미드필더인 데 브루잉을 빼고 더욱 공격적 카드인 아자르를 투입시키면서 '양진협을 뚫겠다'는 선전포고를 했다.
역시 양진협의 수비는 너무도 강했다. 공이 없는 상황에서 수비수들은 기계처럼 자리를 잡았고 패스 경로만 차단하는 형태로 힘들이지 않고 정재영의 초반 공세를 막아냈다. 수비를 먼저 안정화시킨 뒤 서서히 상대를 잠식해 들어가는 양진협의 공격 형태가 뚜렷하게 먹혀 들어가는 분위기였다.
보통 이런 양진협을 만난다면 상대는 어이가 없고 정식적으로 흔들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정재영은 성공하든 실패하든 자신이 계획했던 공격 작업을 차분히 진행하는 모습이었다.
그러자 오히려 양진협이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경기 분위기는 이미 본인의 페이스로 넘어왔으니 골을 넣을 시간이었다고 판단한 듯 보였다. 찰나의 조바심은 수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던 것 같다. 평소 같으면 각도만 좁힐 수 있었던 정재영의 측면공격에 무리하게 발을 뻗으면서 페널티킥을 허용했다.
고수들의 싸움은 일합(一合)이라고 했던가. 중계진도 경기장에 팬들도 모두가 분위기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이후 상황에 관계없이 '이 페널티킥을 넣으면 정재영이 이기고, 막으면 양진협이 이긴다.' 그리고 정규시간 90분이 모두 끝난 뒤 정재영은 복잡한 표정을 지은 채 우승컵을 들었다.
준결승과 결승 모두 위기 상황에 출전해서 상황을 뒤집어 낸 정재영은 우승컵을 손에 쥔 이후에도 웃지 못했다. 프로게이머 생활에 대한 회의감으로 방황 중인 시기에 손을 뻗어준 중국에 우승을 선사했지만 모국 팬들 앞에서 자신의 손으로 한국을 깨버린 기분은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감정임이 분명하다.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정재영에게 한국 팬들은 큰 박수로 수고했다는 메시지를 전했고 그제야 트로피에 입을 맞췄다.
정재영. 더할 나위 없었다. 그는 피파 프로게이머고 자신이 가장 잘하는 분야에서 아시아 최고가 되어주었다. 그것만으로도 박수를 받을 자격이 된다. 충분하다. 충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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