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과학의 영역, 1/1000초
흔히들 '순식간' 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눈을 한번 깜짝일 정도, 숨 한번 쉴 정도의 짧은 시간을 의미합니다. '찰나'라는 단어도 있죠. 불교에서 인용한 시간관념인데, 학설에 따르면 1/75초, 약 0.013초 정도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매일같이 보고 즐기는 TV, 동영상 클립의 초당 프레임은 보통 30~60프레임 사이입니다. 1초에 최대 60장의 사진을 연속으로 보여주는 것이죠. 이 이상 프레임 수를 올리더라도, 사람의 눈으로는 큰 차이를 구별하지 못합니다.
육상이나 수영처럼 아주 미세한 차이로도 승부가 날 수 있는 스포츠는 0.01초까지 기록이 나옵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동률일 경우, 1/1000초까지 확인할 수 있는 특수카메라를 이용해 영상판독을 하게 되죠. 이를 위해 카메라는 1초에 무려 3000장의 사진을 촬영하게 됩니다. 2012년 미국 육상에서 엘리슨 펠릭스와 제네바 타르모가 기록한 1/1000초 동타임 기록이 대표적인데, 초당 3000프레임의 초고속 사진 판독으로도 결과가 나오지 않아 결국 재경기 판정이 나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팬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카트라이더는 1/1000초까지 정확하게 기록을 잽니다. 하지만 카트라이더가 모니터에 표시할 수 있는 프레임은 60프레임이 한계일 것이고, 육안으로 판별이 불가능한 영역에서 두 선수가 승부를 펼쳤다는 얘기가 되겠지요.
◆0.005초에 흥한 자, 0.001초로 망하다.
유영혁은 지난 시즌 결승전에서 단 0.005초 차이로 문호준을 제압하고 우승컵을 들어올렸습니다. 마지막 세트, 단판 에이스결정전이었기에 그 무게와 감동은 카트를 넘어 이스포츠를 사랑해주시는 팬들의 마음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죠. 두 선수의 승부는 역대급이었지만, 지켜보던 팬들의 의견은 조금 엇갈리기도 했습니다. 실수 없이 달렸던 선두의 불리함이나 드래프트 시스템에 대해 과하다는 지적도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카트팬들은 마지막 구간 문호준의 부스터 타이밍과 블로킹을 위한 라인 이동이 역전의 발판이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만약 부스터를 제때 사용했거나 최단 직선거리로 들어갔다면 승자는 바뀔 수 있었다고 판단하는 것이죠. 그리고 이번에도 양상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양 선수 모두 큰 실수 없이 엎치락뒤치락하며 후반부 레이싱을 펼쳤고, 최후의 백스트레치 구간에서 문호준은 마지막 드래프트를 발동시키며 가속을 끌어올렸습니다. 유영혁은 라인 블로킹을 위해 최단거리로 파고들지 못했고, 결국 승부는 문호준의 0.001초 역전승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지난 결승전의 아픔을 그대로 갚아준 것이죠. 재밌게 즐기자고 시작한 이벤트전이었지만, 이 두 라이벌의 승부욕에 의해 이벤트전은 결승전을 뛰어넘는 명승부로 기록되었습니다.
◆0.001초의 동률, 가능할까?
현재 카트 관계자들은 0.001초까지 동률이 나올 경우, 시스템 순위판정에 상관없이 재경기를 진행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과거 수많은 카트리그가 진행됐음에도 0.01초 단위의 승부조차 나오지 않았는데, 최근 0.001초 단위의 승부가 다수 발생하면서 혹시 모를 동률 상황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해설위원으로서의 제 생각도 같습니다. 1/1000초까지 동일한 명승부를 펼쳐준 선수들에게 컴퓨터가 판정한 순위를 제시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더 솔직히 말씀드리면, 동률경기 이후의 재경기가 너무도 보고싶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카트리그가 끝나는 날까지 0.001초 동률은 나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문호준과 유영혁이라면, 그리고 어느 때보다 훌륭하게 달려주고 있는 지금의 카트 선수들이라면 1/1000초 시스템을 시험하기라도 하듯, 새로운 명승부를 만들어 줄 것이라 기대합니다.
이제 마지막 결승전만이 남아있습니다. 유영혁, 이은택, 박건웅, 문민기 등의 활약상과 잠재력은 지난 리포팅에서도 여러 번 전해 드렸으니, 결승전 예상은 짧게 하겠습니다.
2:0 스코어라면 유베이스 알스타즈의 승리, 에이스결정전까지 가게 된다면 승률은 반반입니다. 역시 에이스결정전에 100%란 확률은 없으니까요.
한 시즌 동안 감사했습니다. 다음 시즌에도 좋은 중계와 리포팅으로 찾아 뵐 수 있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이소라 기자 (sora@dailyesport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