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에 밝혀진 일이지만 스티브 블레스는 기록을 앞두고 엄청난 중압감을 느꼈다고 한다. 이전까지 78승을 거둔 스티브 블레스는 1973년에 좋은 성적을 낼 경우 그 해 메이저리그에서 통산 100승을 달성할 수도 있었다. 더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은 블레스의 제구력을 들쭉날쭉하게 만들었고 불과 2년만에 퇴물 투수 평가를 받으며 유니폼을 벗어야 했다.
SK텔레콤 T1 리그 오브 레전드 팀의 정글러 '블랭크' 강선구도 중압감에 눌려 있던 케이스다. 아마추어 시절 실력을 인정받아 중국 프로게임단의 러브콜을 받았던 강선구는 백업 정글러였던 '톰' 임재현을 대신해 SK텔레콤 T1에 입단했다. 유턴한 강선구에게 SK텔레콤 T1이라는 팀 자체가 부담이었다. 리그 오브 레전드 선수들이 출전하고 싶은 최고의 무대인 월드 챔피언십에 나기지 못하면 '팀이 이상한 것 아니냐'는 혹평을 받아야 하는 최강팀에 들어온 것. 2013년과 2015년 월드 챔피언십에서 우승하면서 사상 첫 2회 제패라는 기록을 쓴 SK텔레콤은 국내 대회에서도 4번이나 정상에 오르면서 세계에서 가장 강한 팀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강선구에게 기회는 일찍 찾아왔다. '벵기' 배성웅의 백업 선수로 자리하면서 1라운드 후반에야 챔피언스 코리아 데뷔전을 치를 것으로 보였지만 SK텔레콤은 시즌 두 번째 경기였던 진에어 그린윙스와의 1세트에 강선구를 출전시켰다. '스카우트' 이예찬과 함께 나선 강선구는 이렇다 할 플레이를 보여주지 못하고 패했다. 경기 흐름 자체가 좋지 않았다. 서로 킬을 많이 내는 난타전이었다면 적응하기가 쉬웠겠지만 경기 내내 대치전 양상으로 흘러가면서도 SK텔레콤이 압박을 당하는 입장이었기에 정글러로서는 실력을 발휘할 도리가 없었다. 그 경기를 패한 뒤 강선구는 세 번의 기회를 더 받았지만 1승2패를 추가하는 데 그쳤다.
팀 성적도 좋지 않았다. SK텔레콤은 1라운드에서 5승4패라는 기대 이하의 성적으로 6위에 랭크됐다. 9전 전승을 해도 세트를 잃거나 경기 내용이 좋지 않으면 '기량이 작년만 못하다'는 평가를 받는 SK텔레콤이 4패나 당했기에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다. 강선구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출전 횟수가 적지만 승률이 25%밖에 되지 않았고 경기력이 좋지 않았기에 어떻게 이 팀에 들어왔느냐는 비판이 이어졌다.
SK텔레콤은 강선구에게 심리 치료를 권했다. 연습실에서는 최고의 활약을 펼치는 선수이기에 배성웅이라는 대단한 선수를 제치고 출전 기회를 얻었지만 무대에서 패배를 거듭하면서 충격이 적지 않았을 것이라 예상됐기 때문이다. 강선구에게 심리 치료는 마음을 고쳐 먹는 계기가 됐다. 속에 있는 생각들을 시원하게 털어 놓았고 전문가의 세밀한 상담이 이어지면서 스스로에 대한 불신은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변모했다.
강선구가 살아나고 있다고 판단한 SK텔레콤 코칭 스태프는 과감하게 IEM 월드 챔피언십에 주전 정글러로 데려 가겠다고 발표했다. 팬과 전문가들은 불신이 담긴 화살을 쏘아댔다. 국내 리그에서 1승3패를 기록한 선수가 국제 대회에 나가서 또 그런 성적을 내면 어쩔 거냐는 질책성 의혹이었다. SK텔레콤도 그런 시선을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배성웅을 동행하지 않으면서 강선구에게 모든 것을 맡기겠다고 강력하게 드라이브를 걸었다.
선수 생명이 걸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8강전 카운터 로직 게이밍과의 IEM 월드 챔피언십 첫 경기에서 강선구는 니달리를 택해 3킬 노데스 3어시스트로 팀 승리에 일조했다. 다음 경기인 치아오구 리퍼즈와의 승자전에서는 그라가스로 1킬 1데스 19어시스트로 맹위를 떨친 강선구는 MVP로 선정되면서 무대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8강을 수월하게 넘긴 강선구는 이튿날 열린 솔로미드와의 4강에서 펄펄 날았고 기세를 결승전까지 이어가며 SK텔레콤의 무실 세트 우승까지 이끌었다. 경기당 KDA는 9.76로 전체 3위에 오를 정도로 펄펄 날았다.
강선구가 회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세 가지다. 평소에 실력을 갖추고 있는 선수임을 꾸준히 보여줬고 SK텔레콤이 심리 치료라는 과정을 통해 안정감을 줬으며 IEM 월드 챔피언십에 홀로 데려 가면서 스스로 극복할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세 가지 요인이 어루러지면서 강선구는 살아 났다. 만약 강선구가 1승3패를 당한 이후 연습실에서도 저조했다면 기회는 오지 않았을 것이고 심리 치료를 받지 않았다면 다시 올라올 발판을 만들지 못했을 것이며 IEM 월드 챔피언십에 배성웅과 함께 갔다면 책임감을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다.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는 케이스는 수도 없이 많다. 평상시에는 최고의 실력을 발휘하지만 큰 경기, 큰 무대에만 서면 기량의 1/10도 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운동 선수, 연주자 등 무대에 서는 사람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도 수학능력시험 같은 인생을 좌우하는 시험을 앞두면 긴장하게 마련이고 이로 인해 평상시의 실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기대 이하의 성적표를 받는다.
SK텔레콤은 시스템을 통해 e스포츠적인 스티브 블레스 증후군에 빠질 뻔한 강선구를 살려냈다. 심리 치료가 직접적인 원인이 됐을 수도 있지만 선수를 믿고 과감하게 기회를 주고 보여줄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낸 것도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선수가 강한 정신력을 갖고 있음을 알기에 모든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기회를 준 SK텔레콤 코칭 스태프의 정신력 또한 강했다. 서로를 믿는 강한 정신력이 시너지를 내면서 IEM 월드 챔피언십에서 최고의 효과를 냈다. 이제 남은 것은 국내 무대에서 강선구와 SK텔레콤이 시너지 효과를 이어가는 것 뿐이다.
남윤성 기자 (thenam@dailyesport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