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영화 속에나 나올법한 사람들을 현실에서 마주하면 불만은 쏙 들어간다. 그리고 거품 빠진 존경만이 가슴에 깊이 남는다. 지난 주 e스포츠계에서 세 명의 용기 있는 주인공들을 봤다. 그들은 쉽지 않은 도전에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내려 갔고, 뜻깊은 결과물을 만들어 냈다.
한 편의 영화같은 이야기로 도전과 열정의 가치를 일깨워준 세 주인공은 누구일까. 첫 번째 주인공은 CJ 엔투스의 늦깎이 신인 '버블링' 박준형이고, 두 번째 주인공은 베테랑의 공석을 메운 SK텔레콤 T1의 '블랭크' 강선구다. 그리고 마지막 주인공은 2부 리그팀으로 당당히 IEM 시즌10 월드 챔피언십(이하 IEM)에 참여한 ESC 에버다.
1993년생인 '버블링' 박준형은 프로게이머로서 결코 어리지 않다. 그럼에도 박준형이 신인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데뷔 년도가 2015년이기 때문이다. 레블즈 아나키와 위너스에서 짧게 활동한 박준형은 CJ 엔투스에서 본격적으로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부터 잘 풀리는 건 아니었다. CJ 엔투스가 리그 오브 레전드 챔피언스 코리아(이하 롤챔스) 2016 스프링에서 초반 2연패를 기록하는 동안 박준형은 0.85의 KDA를 기록하며 부진을 면치 못했다. CJ가 상승세에 올라 승리를 수확할 때도 박준형은 비교와 비판의 대상으로 오르기 일쑤였다.
박준형이 빛을 본건 지난 4일에 있었던 2016 롤챔스 스프링 스베누전에서였다. 1세트에서 엘리스로 4킬 0데스 10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데뷔 첫 MVP에 이름을 올린 박준형은 데일리e스포츠와의 인터뷰에서 "2라운드 땐 민폐끼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조금은 소심한 포부를 얘기했다. 비록 작은 각오였지만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시작해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박준형의 꿈과 열정을 떠올리기엔 충분한 대답이었다.
두 번째 주인공은 SK텔레콤의 정글러 '블랭크' 강선구다. 강선구에게 프로 무대는 결코 쉬운 곳이 아니었다. 스타 혼 로얄클럽에서 SK텔레콤으로 이적한 강선구는 2016 롤챔스 스프링에서 부진했다. 강선구는 네 세트에서 교체 출전 했으나 1승 3패를 기록했고, 일종의 징크스처럼 패배가 굳어져 있었다.
그런 강선구가 IEM에 '벵기' 배성웅 대신 출전한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의문을 갖는 사람들이 많았다. 배성웅은 베테랑 정글러로 SK텔레콤의 2015 월드 챔피언십 우승을 견인한 일등공신이었다. 부담은 강선구에게도 컸다. 배성웅의 빈 자리를 메워야 한다는 부담감과 국제 경기의 중압감은 강선구를 짓눌렀다.
실제로 심리 상담을 받았다는 강선구는 IEM에서 보란 듯이 활약했다. 팀의 전승을 도운 것은 물론 7경기에서 기록한 KDA도 9.67로 매우 높았다. 강선구는 패배 의식과 부담감을 딛고 자신의 가능성을 입증해보였다. 그가 IEM에서 보여준 도전과 활약상은 많은 이들에게 여운을 남겼다.
국제 대회의 2부 리그 팀이 출전할 확률은 얼마나 될까. 리그 오브 레전드 챌린저스 코리아 2016에서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는 ESC 에버는 IEM에 참여해 각국의 강팀들과 승부를 펼쳤다. 지난 2015 KeSPA컵에서 SK텔레콤과 CJ 엔투스를 꺾고 우승한 ESC 에버는 KeSPA컵 우승자 자격으로 참가한 IEM 시즌 10 쾰른에서도 우승을 차지했다.
IEM 월드 챔피언십까지 진출한 ESC 에버는 그야말로 복병이었다. ESC 에버는 대회 직전 라이엇 게임즈가 선정한 파워랭킹에서도 C등급을 받았고, 실제로 첫 경기였던 TSM전에서 대규모 교전 한 번으로 경기를 뒤집으며 저력을 뽐냈다.
비록 이후 2경기에서 패배해 4강 진출에는 실패했으나 ESC 에버가 보여준 가능성은 충분했다. 국제 대회라는 무대에 당당하게 도전장을 내민 ESC 에버는 한국 리그 오브 레전드의 기반이 얼마나 튼튼한지 보여주는 지표로 남았다.
세 주인공의 이야기는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전했다. 도전은 언제나 아름답다. 한 편의 영화처럼 특별하게, 때로는 간절하게 도전하는 이들이 있기에 오늘도 e스포츠는 발전한다.
이윤지 기자 (ingji@dailyesport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