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픽처라는 소설은 꽤나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로펌에서 일하는 중견 변호사가 아내와 바람을 핀 사진작가를 우연치 않게 살해하고 이 사람의 인생으로 살아가면서 새로운 삶을 그려간다는 내용이다. 이 책을 읽은 사람으로서 짧은 식견으로 판단하자면 e스포츠에서 쓰는 빅 픽처라는 단어와 책 내용은 큰 연관성은 없어 보인다. 단어 그대로 큰 그림이라는 뜻일 것이다.
어찌 됐든 e스포츠 업계에서 쓰는 빅 픽처라는 용어는 멀리 내다보는 식견을 의미한다. 바둑에 비유하자면 단지 한 수 앞을 예상하는 것이 아니라 10수, 20수를 읽으면서 먼 미래의 일까지 대비하는 판짜기라고 하겠다.
SK텔레콤 스타크래프트2 프로리그 2016 시즌 1라운드 결승전을 앞두고 데일리e스포츠는 SK텔레콤 T1 최연성 감독(사진)에게 출사표를 물어봤다. 진에어 그린윙스를 꺾겠다라는 단순한 답이 나올 줄 알았지만 최 감독은 빅 픽처를 설명했다.
"이번 라운드 포스트 시즌에서 진에어를 꺾을 경우 우리 팀은 121 포인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1라운드 정규 시즌에서 1위를 차지하면서 81 포인트를 얻었고 결승전에서 승리하면 40 포인트를 얻지요."
누구나 아는 당연한 이야기였다. 1등한 사람에게 가장 많이 포인트를 주는 것이 프로리그 방식이니까.
"이 눈덩이를 불릴 겁니다. 2라운드부터는 기용되지 않았던 선수들에게 더 많을 기회를 줄 계획입니다. 실력이 좋지만 이신형, 박령우, 어윤수에게 가려서 출전하지 못한 선수들을 공식전에 출전시켜서 증명시킬 겁니다. 작년에 좋은 성적을 냈던 테란 조중혁, 저그 김준혁, 프로토스 박한솔 등이 기회를 받겠죠."
SK텔레콤이 우승했을 때 얻어지는 포인트는 121. 진에어가 준우승했을 때 얻는 포인트는 81로 40 포인트 차이가 난다. 이 정도면 SK텔레콤이 포스트 시즌에 한 번 나가지 못하더라도 한 번에 뒤집어지는 차이는 아니다. 포인트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최 감독은 백업 선수들에게 기회를 주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큰 그림의 시작이다.
"이 선수들이 프로리그를 통해 꾸준히 성장하고 개인리그에 대한 자신감까지 갖는다면 스타2는 스타 플레이어들이 늘어날 것입니다. SK텔레콤은 더욱 탄탄한 라인업을 구축할 것이고 승승장구하겠죠. 그러면 다른 팀들이 가만히 있을까요. 더 나은 선수를 발굴하고 좋은 선수를 영입하기 위해 투자하겠죠. 스타2에서 명경기들이 계속 나오면 팬들이 늘어날 것이고 다시 부활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스타2의 현실은 처참하다. 스타크래프트:브루드워에서 이어온 명성을 전수받지 못한 스타2는 해가 갈수록 하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프로게임단은 운영난을 이유로 점차 사라져갔고 이용자도 점차 줄어들고 있다. 프로게임단이 연습생을 찾으려고 해도 지원자가 없는 실정이다. 2010년 이후 잠잠했던 불법 베팅 사이트를 통한 승부 조작 사건도 연달아 터져 나오면서 외부의 시선도 곱지 않다. 기왕 프로게이머를 하려면 큰 인기를 얻고 있는 리그 오브 레전드를 하지, 스타2로 도전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최 감독이 그린 빅 픽처는 무모하는 생각도 들게 한다. 빅 픽처의 최종 단계는 스타크래프트2(이하 스타2)의 부활이기 때문이다. 과연 뜻대로 될까?라는 의문이 먼저 드는 것이 사실이다.
최 감독은 SK텔레콤 T1만 최고의 팀으로 성장하기를 원하지는 않았다. 진에어 그린윙스, kt 롤스터, CJ 엔투스, 삼성 갤럭시, 아프리카 프릭스, MVP 치킨마루 등 프로리그에 참가하고 있는 팀들이 동반 성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SK텔레콤이 새로운 스타를 발굴, 육성해내고 다른 팀들도 함께 노력해야만 업계가 탄탄해지고 선배들이 열어 놓은 길을 걷겠다고 용기를 내는 후임들이 생긴다는 말이다. 좋은 경기가 속출해야만 떠났던 팬들의 마음도 돌릴 수 있다는 뜻이다.
블리자드를 정조준해서 쓴소리를 했던 이유도 빅 픽처와 연관이 있다. 인터뷰를 통해 '블리자드 관계자가 스타2 그만하고 다른 게임을 하라더라'라고 폭로했던 최 감독은 개발사이자 서비스사인 블리자드가 관심을 갖고 투자를 이어가야 최장수 e스포츠 종목으로 스타크래프트가 명맥을 이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개발사는 지속적으로 관심을 쏟고 투자해야 하고 프로게임단을 운영하는 기업과 팀은 최고의 선수들을 만들어내서 팬, 이용자들의 유입을 이끌어내는 것이 e스포츠가 활력을 얻는 길이다. 최 감독의 빅 픽처는 이 중심에 SK텔레콤 T1이 서겠다는 뜻이고 지도자라면, e스포츠인이라면 당연히 그려야 하는 그림임에 틀림 없다.
남윤성 기자 (thenam@dailyesport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