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6년 플러스의 연습생으로 선수 생활을 시작한 이제동은 르까프 오즈의 에이스로 성장했고 이영호와 함께 '리쌍'이라 불리면서 한 시대를 풍미했다. 홍진호, 박성준등 공격적인 스타일을 가진 저그의 계보를 이었던 이제동은 스타리그 3회 우승자에게 주어지는 골든 마우스도 갖고 있고 프로리그 사상 첫 200승 고지를 점령한 선수이기도 하다.
◆데뷔 때부터 간판
이제동은 2006년 상반기 드래프트를 통해 플러스에 입단했다. 얼마 되지 않아 화승 그룹이 플러스를 인수해 프로게임단을 창단하면서 전폭적인 지원을 시작하자 르까프 오즈는 이제동을 에이스로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오영종이라는 걸출한 스타 플레이어가 있었지만 신예 육성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조정웅 감독은 프로리그 개막에 앞서 열린 게임단 평가전에 이제동에게 시작과 끝을 맡기면서 육성에 돌입했다.

2006년 프로리그 전기리그에서 이제동은 개인전에서 저그의 한 축을 맡았다. 그 때만해도 팀플레이가 따로 있었기에 신인을 육성하려는 팀 차원에서는 팀플레이를 통해 경험을 쌓게 하고 적응이 완료되면 개인전으로 돌리는 것이 패턴이었지만 이제동은 팀플레이를 건너 뛰고 개인전에 투입됐다. 전기리그 성적은 6승5패로 그리 좋지 않았지만 신인들 중에서 개인전에 나서는 선수가 드물었기에 신인왕을 수상했다.
후기리그에서 이제동은 놀라운 성장세를 보여줬다. 시작과 함께 연승을 이어간 이제동은 8연승을 달렸고 후기리그를 마쳤을 때 성적은 10승1패였다. 이제동이 활약 덕분에 르까프 오즈는 창단 첫 해 포스트 시즌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뤄냈다.
선수층이 얇았던 르까프 오즈였기에 신인에게 파격적인 출전 기회를 내줄 수 있었겠지만 이제동은 기회를 잡을 줄 아는 선수였다. 전문가들 중에서는 한화 이글스 시절 류현진이 데뷔한 해를 떠올리기도 했다.

◆희로애락을 경험하다
해가 바뀌자 이제동은 오영종급으로 성장했다. 2007년 투톱 체제를 갖춘 화승(로까프에서 1년 뒤에 화승으로 이름을 바꿨다)은 프로리그 전기리그에서 광안리 결승전까지 올라갔다. 비록 0대4로 삼성에게 패하면서 이제동은 출전 기회조차 얻지 못했지만 후기리그에서 정규 시즌 1위를 차지했고 통합 챔피언전에서 삼성을 꺾으면서 팀에게 창단 2년 만에 우승컵을 안겼다.
프로리그를 통해 성장한 이제동은 개인리그에서도 활약을 펼치기 시작했다. 데뷔 2년차인 2007년 EVER 스타리그 2007에서 이제동은 이윤열을 꺾으면서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고 결승에서는 송병구를 만나 3대1로 승리하면서 로열로더 타이틀을 손에 넣었다.
2008년은 이제동에게 슬럼프에 가까운 해였다. 스타리그에서는 우승자 징크스에 발목이 잡히면서 성과가 좋지 않았고 아레나 MSL에서 결승까지 올라갔지만 팀 동료 박지수에게 0대3으로 덜미를 잡히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프로리그에서도 투톱 중에 하나였던 오영종이 공군 에이스에 입대하면서 홀로 팀을 이끌어야 했기에 그리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

2009년 첫 스타리그였던 바투 스타리그에서 이제동은 SK텔레콤 정명훈을 맞아 0대2에서 3대2로 뒤집는 뒷심을 보여줬고 곧바로 열린 박카스 스타리그에서도 박명수를 3대0으로 잡아내면서 스타리그 세 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이윤열, 박성준에 이어 세 번째 골든 마우스를 획득한 이제동은 2001년 임요환에 이어 8년 만에 스타리그 2회 우승을 차지한 선수로 기록됐다.
박카스 스타리그를 우승했을 때 이제동은 소속이 불분명한 상태였다. 자유 계약 선수 신분으로 원소속팀인 화승과의 협상이 계속 결렬됐던 이제동은 박명수와의 결승전에 화승의 유니폼을 입지 않고 나설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동은 팀의 도움을 받아 연습했고 화승 소속으로 출전했으며 우승한 뒤에는 재계약을 체결하면서 영원한 화승맨으로 남았다.
하지만 화승에 위기가 찾아왔다. 2009년까지 안정적으로 게임단을 지원하던 화승은 2010년 들어 여러 이슈가 겹치면서 게임단을 해산하기로 한 것. 한국 경제가 좋지 않아지면서 화승에도 위기가 찾아왔고 프로게임단을 통한 부가 가치 창출이 크지 않다는 이유로 게임단을 접었다. 영원한 화승맨이고 싶었던 이제동은 비슷한 시기에 해체한 MBC게임, 온게임넷, 위메이드 선수들과 함께 8게임단의 일원이 되어야 했다.

이제동의 선수 생활에서 가장 많이 상대한 선수는 '최종병기'라 불리는 이영호다. 개인리그에서 이영호를 자주 만났던 이제동은 둘 중에 이기는 선수가 우승이라는 징크스를 갖고 있었다. 특히 2009년과 2010년에 그러한 양상은 더욱 가중됐다.
2009년 이제동이 골든 마우스를 달성했고 이영호가 스타리그 2회 우승을 차지한 상황에서 결승전에서 만났던 대한항공 스타리그 시즌2에서는 이영호가 이제동을 꺾었다. 이제동에게는 해외에서 열린 스타리그를 제패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았다.
이후 MSL에서 이제동은 무려 세 번 연속 이영호와 결승전을 치렀다. 2009년 네이트 MSL 결승전에서는 정전 사태가 발생하며 이제동에게 우세승이 주어지는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졌고 이제동이 3대1로 우승했다. 바로 다음 대회인 2010년 하나대투증권 MSL과 빅파일 MSL에서 이제동은 또 다시 이영호를 결승전에서 만나 0대3과 2대3으로 패하면서 2연속 준우승에 머물렀다. 결국 이제동은 이영호에 의해 MSL 3회 우승이라는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다.
프로리그에서도 이제동은 이영호와 경쟁 관계를 형성했다. 08-09 시즌 이제동과 이영호는 나란히 54승을 거두면서 공동 1위를 차지했다. 09-10 시즌 이영호가 57승을 기록했을 때 이제동은 50승을 넘기며 2위에 올랐고 10-11 시즌에는 이영호가 다승 2위, 이제동이 3위에 랭크되기도 했다.
프로리그 200승을 놓고 벌인 경쟁에서는 이제동이 먼저 웃었다. 프로리그에서 박정석에 이어 두 번째로 100승 고지를 밟았던 이제동은 2011년 4월30일 열린 위메이드 폭스 전태양과의 경기에서 승리한 이제동은 이영호보다 먼저 200승을 달성했다.

◆외국 팀으로의 이적과 은퇴
프로리그 2011 시즌까지 제8게임단에서 뛰었던 이제동은 12-13 시즌을 앞두고 EG-TL(이블 지니어스와 리퀴드의 연합팀)로 1년 동안 임대된다. 스타크래프트2에서 잘 나간다고 하는 외국인 선수들, 윤영서, 송현덕 등의 한국 선수들과 한 팀에서 뛰면서 이제동은 스타2에 대한 적응도를 높여 갔다.
군단의 심장으로 대회가 치러진 2013년 이제동은 이블 지니어스로 완전 이적하면서 활동 무대를 북미로 옮겼다. 드림핵에서 4강 1번, 준우승 2번 등을 차지한 이제동은 WCS 아메리카 시즌2에서 준우승을 달성했고 그해 열린 그랜드 파이널에서도 준우승까지 달성하면서 클래스를 입증했다. 2014년에도 론스타 클래시3에서 우승했고 WEC에서 정상에 서기도 했다.
하지만 2015년부터 이제동은 활동이 뜸해지면서 은퇴 수순을 밟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받기도 했다. 블리자드가 비자를 발급받은 선수들에게만 외국 대회 출전권을 주면서 활동 영역이 좁아지며 한국으로 유턴한 이제동이 최근에 열린 개인리그에서는 예선에도 나서지 않았기 때문.
결국 이제동은 11월2일 공식 은퇴를 선언하면서 만 10년 동안의 프로게이머 생활을 은퇴하고 제2의 인생을 도모하기로 결정했다.
남윤성 기자 (thenam@dailyesports.com)
*오타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