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금 없이 드래곤볼의 정신과 시간의 방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SK텔레콤 T1에게 이 공간(또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SK텔레콤은 명실상부 한국을 대표하는 리그 오브 레전드 팀이다. 2013년 창단하자마자 SK텔레콤 T1 K가 스프링 시즌 3위에 오르고 서머 시즌에서는 정상에 등극한다. 한국 대표로 막차를 탄 SK텔레콤은 한국 팀으로는 처음으로 월드 챔피언십(이하 롤드컵) 정상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2014년 윈터 시즌에서 무실 세트 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던 SK텔레콤 K는 형제 팀 S와의 경쟁을 통해 전력이 하락했고 롤드컵에 가지 못했다.
2015년 단일 팀 체제로 롤챔스가 변화하자 SK텔레콤은 단숨에 한국 최고, 세계 최고의 팀으로 거듭났다. 롤챔스 스프링과 서머를 동시에 제패했고 롤드컵에서도 적수가 없을 정도로 강력함을 과시하면서 정상에 올랐다. 결승까지 한 세트도 패하지 않았고 결승에서도 KOO 타이거즈에게 한 세트만 내주며서 역대 롤드컵 최고 승률로 우승을 차지했다.
2016년에도 SK텔레콤은 최고의 팀으로 군림했다. 스프링에서 우승한 SK텔레콤은 서머 플레이오프에서 kt 롤스터에게 덜미를 잡히면서 네 시즌 연속 우승의 꿈은 접었다. 하지만 롤드컵 무대에서 다시 한 번 기량을 가다듬었고 2년 연속 소환사의 컵을 들어올린 첫 팀으로 기록됐다.
2017년 스프링에서 정상에 오른 SK텔레콤은 서머 결승에서 롱주 게이밍(현 킹존 드래곤X)에게 패하면서 롤챔스 결승전 승률 100%가 깨졌지만 롤드컵 결승까지 올라갔다. 삼성 갤럭시(현 KSV)의 완벽한 경기력에 휘둘리면서 0대3으로 패했지만 SK텔레콤이 훌륭한 기록을 세웠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2018 스프링 스플릿이 개막했을 때에도 전문가들은 SK텔레콤이 4강 안에는 무난하게 들 것이라 예상했다. 톱 라이너 '후니' 허승훈과 정글러 '피넛' 한왕호를 떠나보냈고 그 자리에 '트할' 박권혁, '블라썸' 박범찬 등 프로 경기력이 거의 없는 선수들을 기용했지만 SK텔레콤이 뽑은 신예라면 다를 것이라 예상됐다. '운타라' 박의진과 '블랭크' 강선구 등 기존 선수들이 버티고 있다는 점도 SK텔레콤의 강점으로 꼽혔다.
뚜껑을 열어보니 SK텔레콤은 약체였다. 락스 타이거즈와의 첫 경기에서 2대1로 승리하긴 했지만 내용이 그리 좋지 않았다. 진에어 그린윙스와의 3세트에서 94분 동안 경기를 끌고 가며 역전패를 당하며 직격탄을 맞았다. 다 이긴 경기를 마무리하지 못하면서 뒷심 부족이 지적됐고 이후 경기 시간이 길어질 때마다 패했다. kt 롤스터, 킹존 드래곤X 등 상위권을 지키고 있던 팀들에게 패한 것은 그럴 수 있다고 쳐도 한 세트도 이기지 못하면서 5전 전패를 당한 MVP에게 1대2로 패한 것은 SK텔레콤의 현 상황을 이야기해주는 증거였다. 여기에다 아프리카 프릭스에게 0대2로 완패를 당하면서 SK텔레콤은 창단 이래 첫 롤챔스 5연패를 당하는 수모를 맛봐야 했다.
전문가들은 'SK텔레콤이 이전까지 갖고 있던 장점을 모두 잃은 듯하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2017년까지 SK텔레콤은 라인전에서 우위를 점하면서 상대를 압박하는 능력이 발군이었다. 킬 스코어에서는 뒤처지더라도 골드 수급에 있어 앞서면서 아이템과 레벨을 확실하게 갖췄다. 교전이 일어났을 때 대승을 거두면서 전세를 한 번에 뒤집는 능력도 라인전에서 얻은 이득이 가져다주는 효과였다.
하지만 2018 시즌 SK텔레콤은 라인전에서 앞서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15분 동안 획득한 골드량을 비교하는 수치에서 SK텔레콤은 최하위인 10위에 랭크됐다. 첫 포탑 파괴 횟수도 꼴찌다. 라인전에서 끌려가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다 보니 정글러가 개입해서 변수를 만들기 어렵고 성장 속도가 느려지면서 싸울 채비가 되지 않은 상황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라인전이 무너졌다는 평가는 선수 개개인의 실력이 다른 팀에 비해 떨어진다는 뜻이다. 팀워크를 발휘하기도 전에 이미 지고 들어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구도가 잡히지 않고 스케치가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아무리 큰 그림을 그리더라도 멋진 그림이 완성되지 않는 것과 같다.
라인전 기량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훈련이 필요하다. 여러 챔피언을 상대로 많은 경기를 소화하면서 변수를 최대한 줄여야 한다. 하지만 시즌 도중에 연습량을 늘리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미 잡혀 있는 다른 팀과의 연습 스케줄도 있고 경기 일정에 맞춰 컨디션도 조절해야 한다.
물리적인 시간을 더 늘리는 것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기에 드래곤볼에서 등장하는 것과 같은 '정신과 시간의 방'이 절실하다. 한 시간을 연습하더라도 두 시간을 훈련한 것과 같은 효과를 내야만 SK텔레콤이 처한 지금의 상황을 타개할 수 있다. 이는 전적으로 코칭 스태프의 능력에 달려 있다. 선수들이 한 경기를 연습하더라도 부족한 점을 짚어내면서 두 경기 이상 치른 것과 같은 깨달음을 줘야 한다.
SK텔레콤은 2018 시즌을 준비하면서 그동안 코치로 좋은 성과를 냈던 김정균을 감독으로 선임하면서 많은 권한을 줬다. 코치 시절 상대의 의도를 간파하는 밴픽 능력과 정확한 피드백을 통해 선수들이 기량을 극대화시켰던 김정균은 감독으로 승격되자마자 5연패라는 최악의 성적표를 받아 들었다.
지금이야말로 김 감독이 지도자로서의 능력을 발휘할 때다. 5연패라는 충격에 빠진 선수들의 멘탈을 어떻게 회복시키고 경기력을 제 궤도로 올려 놓을지 계획을 세워야 하며 실제로 연습, 훈련에 적용시켜 시즌 중에 기량을 끌어 올릴지도 궁리해야 한다. 그리고 성과로 연결시켜야 한다. 코치 경력이 많지 않은 '푸만두' 이정현, '벵기' 배성웅에게 맡기기 보다는 김 감독이 중심이 되어 팀을 부활시켜야 한다.
김정균 감독이 운영할 '정신과 시간의 방'이 무기력증에 빠진 SK텔레콤을 초샤이어인 모드로 바꿀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남윤성 기자 (thenam@dailyesport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