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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고-황금의 어스듐 14화

아르고-황금의 어스듐 14화
[데일리게임]

테이슨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고 티노에게서 시선을 떼고 앞을 바라봤다. 거기엔 시문의 공방밖에 없었다. 덩달아 그 시선을 좇은 티노는 퍼뜩 깨닫고 테이슨을 홱 돌아봤다. 그리고 아주, 아주 작게 물었다.

“이곳인 거예요?”

“후우……. 우리가 배후라 심증을 굳히고 있는 자가 바로 시문 님의 아버지란다.”

“시문 님이 귀족이었어요?”

귀족이란 분이 왜 원석 가공을 하고 있답니까, 라는 질문은 삼켰지만 그 속을 모를 테이슨이 아니었다.

“시문 님은 어려서부터 괴짜라 소문이 자자한 분이라……. 집안에서도 포기했달까?”

“……저도 그런 친구를 알고 있지요.”

티노는 플로레스라면서 기계공학에 심취해 있는 괴짜 친구를 떠올리면서 납득했다.

“그래도 권위의식이 없는 분이라 선배님과도 막역한 사이였어. 선배님과 함께 종종 셋이서 어울렸었지. 그땐 참 즐거웠는데…….”

테이슨은 씁쓸한 얼굴로 시문의 공방을 바라봤다. 그런 그에게 티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분, 엑서디움 전쟁에서 전사하셨다고 했지요?”

“그랬지.”

“그런데 왜 바인 씨는 그분이 처리됐다는 말을 하는 거예요?”

테이슨은 흠칫하며 티노를 보았다. 그의 얼굴은 분노와 슬픔으로 일그러져 있었지만 티노에게 화를 내지는 않았다. 무겁게 침묵을 하다가 깊게, 아주 깊게 탄식했을 뿐이다.

“시신을…… 찾지 못했거든.”

수도의 대부분이 파괴될 정도의 큰 전쟁이었다. 결국 승자도, 패자도 없이 휴전을 선언해야만 했다. 혼란스럽지 않은 곳이 없었다.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자는 그 외에도 무수히 많았다. 그럼에도 유독 그의 실종이 문제가 되었다.

워낙 유명한 사람이었다. 일반 시민이면서 왕의 목숨을 구해 친위대에 오른 자. 왕의 신임이 두터워 다음 친위대장으로 지목될 것이 확실한 자. 귀족들에겐 어찌 보일지 몰라도 일반 시민에겐 영웅 그 자체였다.

그래서 사망 원인조차 정확하지 않고, 시신도 못 찾은 것에 대해 말들이 많았다. 여러 가지 소문 중에서 그를 대장으로 모시고 싶지 않았던 친위대원들이 암살했다는 음험한 소문이 가장 기승을 부렸다.

“그 당시 우리는 보급부대를 호위하고 있었다. 매복이 있는지 알아보러 나간 정찰병에게 연락이 없자 선배는 그들이 당한 것이라 판단하고 경로를 바꾸려 하셨지. 헌데 기지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기에 반발하는 자가 있었어. 당시 전사하신 대장의 동생인데, 항상 선배님을 적대시하던 녀석이었지. 그 때문에 신속하게 움직이지 못했고…….”

“기습당한 거군요.”

“…….”

테이슨은 고개를 푹 숙이고 두 손으로 이마를 덮었다.

“……우리가 도망치는 동안 선배님은 마지막까지 우리의 뒤를 지켜 주셨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으셨지.”

살아만 있다면 팔다리가 잘려 나갔어도 반드시 복귀했을 것이다. 테이슨을 비롯한 모든 이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당시 기지에 계셨던 시문 님이 자신의 사병들을 이끌고 지원하러 가셨지만…….”

결국 시문은 빈손으로 돌아왔다. 어느 상황에서든 미소가 지워지는 일이 없었던 얼굴이 차갑게 굳어서, 살아 돌아온 테이슨 등을 노려보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사한 대장의 동생이 불명예스러운 이유로 퇴출당했다. 명령불복종이 이유가 아니었다. 차라리 그런 것이었으면 복귀의 가능성이라도 있었을 텐데, 친위대의 체면상 차마 입 밖에 내기 힘든 지저분한 이유였다. 그의 인생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라 봐도 좋을 정도다. 테이슨은 그것이 시문의 짓이라 확신하고 있다.

“그 이후 시문 님과도 서먹해졌지. 난 비겁했어. 선배님과 함께 끝까지 있어야만 했는데……. 그랬어야 했는데…….”

“그럼 그분이 후방을 지키는 동안 테이슨 경은 뭘 하셨는데요?”

“선배님의 명을 따라 보급품을 지키고 있었다.”

“그럼 명을 따른 거잖아요. 테이슨 경이 그분과 함께 있었다면 결국 그분의 의지를 거스른 거였겠네요.”

“…….”

테이슨은 쓰게 웃으며 티노를 돌아봤다. 휴전 후 상심해 있는 그에게 많은 지인들이 위로를 해 줬다. 티노의 말과 똑같은 것도 몇 번이나 들었다. 하지만 진지하게 위로하려 드는 아이의 성의를 무시할 순 없었다.

“그리 말해 줘서 고맙구나.”

티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기며 애써 밝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본래의 화제로 돌아갔다.

“문제는 시문 님이 과연 주구(走狗)에 불과하냐다.”

“시문 님의 아버지가 배후인 것보다 시문 님이 주도자일 경우가 더 문제라는 건가요?”

테이슨은 재깍재깍 알아듣는 티노에게 조금 감탄하며 고개를 끄떡였다. 요즘 같은 세상에 친위대가 되겠다고 야심을 불태우는 것만 빼면 티노는 제법 영특한 소년이었다.

“보통 어스듐을 빼돌리는 자들의 목적은 하나다. 점차 고갈되어 가고 있는 어스듐을 사재기하여 훗날 긴히 쓰려는 거지. 그 경우 일단 잡기만 하면 그들이 고이 모아 둔 어스듐을 나라에 환원시킬 수 있어. 결과적으로 봤을 때 크게 손해 보는 건 아니지. 물론 그들을 추적하고 감시하는 데 상당한 인력과 시간, 경비가 소모되긴 하지만 말이야. 하지만 시문 님의 경우는 달라.”

그리곤 한숨을 쉬는데 어찌 보면 웃는 것도 같고, 그리워하는 것도 같고, 포기하는 것도 같은 얼굴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고 있지만, 시문 님은 플로레스라와 밀매를 한 적이 있단다.”

“예?!”

티노는 그야말로 화들짝 놀라서 목소리를 높였다. 테이슨은 입술에 검지를 갖다 댔다.

“예술 분야만큼은 우리보다 그들의 수준이 더 높다는 거 알고 있니? 보통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으려 하지만 사실이 그렇단다. 시문 님은 그들의 예술품에 심취해 있었어. 지금도 그건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한다만.”

“설마 그 예술품을 사들였다는 건가요?”

“전에는 상부에 알려지기 전에 선배님이 무마시켜 줘서 넘어갔지. 그 뒤론 선배님의 감시망에도 포착되진 않았지만, 아마 계속 하고 있었을 거다.”

테이슨은 그리운 듯이 말했지만 이내 공적인 태도로 돌아갔다.

“만약 시문 님이 주도자라면 어스듐이 국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플로레스라 쪽으로 흘러들어갔을 가능성도 있어.”

“설마요.”

“그분은 그러고도 남는다. 우리나 플로레스라나 공통적으로 귀하게 여기는 것이 어스듐이니까. 만약 이번에도 그런 경우라면 아무리 시문 님이라 해도 무사하지 못할 거야. 내 선에서 무마시켜 드리기엔 일이 너무 커졌어. 그때는 선배님만이 알아차린 상태여서 가능했던 거거든.”

“그렇군요. 하지만 시문 님을 찾는 방문객은 별로 없는데요?”

“적대 종족과의 밀거래인데 대놓고 할 리가 있니? 당연히 비밀통로가 있겠지.”

“아…….”

티노는 창고의 비밀통로를 떠올렸다. 물론 그것은 화물용 통로라 사람이 오가긴 힘들어 보였지만 그런 식의 통로가 어딘가에 또 없으리란 법은 없다. 아니, 그것이 있음으로써 다른 통로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걸 알려 주고 있다.

“뭐 생각나는 거라도 있는 거니?”

티노의 반응에 테이슨이 물었지만 티노는 사실이 확실해지기 전까진 입을 다물기로 했다.

“아니요. 잠깐 다른 게 생각나서요. 계속 말씀하세요.”

“…….”

테이슨은 미심쩍다는 얼굴을 했지만 더 캐묻진 않았다.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 사적인 감정은 접어야 한다는 건 알지만 차마 내가 들쑤시진 못하겠더구나.”

“그렇겠지요. 충분히 이해해요.”

“시문 님이 주구일 수도, 이곳이 경유지에 불과할 수도 있어. 아예 안 엮여 있을 수도 있고. 약혼녀가 죽은 뒤, 정략 결혼을 강요하는 집안과 연을 끊으신 분이니까. 그래도 확인을 해야 하니까…….”

그 역할을 티노가 대신해 주길 바라는 거다. 이제 막 공방에 들어온 신참에 나이도 어리니 경계 대상이 될 가능성이 낮으니까. 테이슨이 데리고 왔다는 점 때문에 거리를 둘지는 모르나 그래도 외부에서 염탐하는 것보단 내부에서 하는 것이 효과가 좋다. 게다가 처음엔 티노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저들이 그를 경계하고 있었다면 지금쯤 풀었을 것이다.

“만약 진짜라면, 그리고 네가 조사하고 있는 게 들통 난다면 네가 위험해질 거야. 강요하고 싶진 않다.”

테이슨의 얼굴에 조금이나마 떨쳐 낸 듯했던 번뇌가 다시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하지만 티노는 이미 하기로 마음먹고 좀 더 세부적인 사항을 궁금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제가 조사하다 이 공방이 그 일과 무관하다고 밝혀지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결과가 어떻게 나든 내 이름을 걸고 널 추천해 주마.”

“그럼 좋아요.”

티노는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 없이 바로 승낙했다. 불안해하는 기색이 전혀 없는 그를 오히려 불안하게 보면서 테이슨은 다시 한숨을 쉬었다.

“시문 님이 직원들에게 가혹한 주인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데리고 온 것인데……. 일이 이리 되어 미안하구나.”

“아니에요. 확실히 좋은 직장인 걸요.”

빈말이 아니었다. 정해진 급료도 짜지 않았고, 몰래 코어 기계를 쓰다 걸렸는데도 내버려 두는 관대한 주인이 있는 곳이다. ……다른 의미에서 벌을 받은 기분은 들지만.

다음 날부터 티노는 원석 수거를 혼자 하기로 했다. 이틀에 한 번씩 돌던 구역을 반으로 쪼개서 하루에 한 번 수거하면 혼자서도 충분했다. 라디는 그럴 필요 없다고 말렸지만 이번 승급시험에 도전해 보려는 그녀를 배려하는 척 기어이 떠맡았다. 그 덕에 감동의 도가니에 빠진 라디가 뭐라도 사 먹으라고 용돈을 줘서 조금 찔렸지만 목표는 달성했다.

티노가 원했던 것은 혼자서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혼자서 창고를 매일 드나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날 이후로 비밀통로가 열리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일단 비밀통로가 열리기만 하면 무빙벨트가 작동한 뒤 원석이 도착하는 시간과 이동하는 속도를 재서 계산하여 시작지점과의 거리를 알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물론 안의 통로가 꺾여 있을지도 모르니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략적인 범위는 정할 수 있을 것이다.

티노가 있는데도 비밀통로가 작동한 것을 보면 감시자는 확실히 없는 게 분명하다. 감시카메라 역시 없거나, 있어도 그때 티노가 있던 곳은 사각지대일 것이다. 하지만 신중을 기하기 위해 그곳에 죽치고 있는 것은 피했다.

그래서 티노는 비밀통로에만 집착하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조사를 해 나갔다. 그는 자신이 수거해 오는 원석의 양과 창고에 쌓여 있는 원석의 양을 비교하기 시작했다. 기술자들이 소모하는 원석의 양도 몰래 기록했다. 몇 년 동안 축적된 것이라 해도 기술자들이 매일 소모, 아니 낭비하는 양을 생각하면 과한 면이 있다고 전부터 생각해 왔던 터였다.

창고에 무작위로 쌓여 있는 원석의 양을 정확히 체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기에 대신 테이슨에게서 사진기를 받아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새로 가지고 온 원석은 한쪽에 쌓아서 기존의 것과 구분했다. 그리고 매일 저녁 사진을 날짜별로 늘어놓고 비교를 하기 시작했다. 역시 티노가 가지고 온 것보다 많은 원석들이 쌓이고 있었다.

그리고 매일 원석을 수거하는 동안 전에는 미처 눈치 채지 못했던 것도 한 가지 알아냈다. 티노가 어스듐 교환소에서 받아 오는 원석들 중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은 정제된 원석이었다. 수거되는 일반 원석의 양은 정제된 원석 분량의 반 정도밖에 안 되었다. 그런데도 공방의 창고 다섯 개 중 세 개가 일반 원석 보관용으로 쓰이고 있다. 상대적으로 적게 유입되는 일반 원석을 매일 반나절씩, 유입되는 양보다 많이 세척해 대는데도 말이다.

핵심적인 사항은 알아내지 못했지만 이거 하나만은 분명했다. 시문의 공방에는 티노는 물론 다른 직원들도 모르는 비밀통로를 통하여 어스듐이 유입되고 있다. 그것도 대량의 어스듐이. 그리고 바로 시문의 공방에서 쓰이고 있다. 유입된 어스듐을 전부 쓰고 있는 건지 일부만 쓰고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대체 어디에 쓰는 걸까? 정제된 원석 쪽의 수량에 거의 변화가 없는 것을 보아 코어를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니다. 코어를 만든다면 전쟁이나 그에 준하는 전투를 준비하고 있다 생각하면 그만이지만…….

“다녀오겠습니다!”

예의 수레를 단 뱅커에 올라탄 티노는 누구에게랄 것 없이 공방 안을 향해 말하고 출발했다. 오늘은 테이슨을 만나기로 한 날이다. 두 번째 어스듐 교환소 부근에서 만날 예정이다. 그동안 조사한 것에 대해 보고해야 하고 테이슨에게 알아보라고 해야 할 것도 있다. 거기다 오늘 테이슨이 활동비를 지급해 주겠다고 했다. 오는 길에 그 돈으로 필름을 살 생각이다.

첫 번째로 들른 어스듐 교환소는 라디와 제일 처음에 왔었던 곳이었다. 역시나 남 말하기 좋아하는 직원이 티노를 보자 냉큼 나무통을 들고 나왔다.

“여, 티노! 오늘도 혼자 수고가 많아!”

“안녕하세요.”

티노가 뱅커에서 내리기도 전에 직원은 수레의 뚜껑을 열더니 한 통을 부어 주었다. 다른 한 통은 티노가 하려 했으나 냉큼 들어서 그것도 부어 줬다. 어디서 들었는지 티노가 디나르 가에서 사병 제의를 받았다는 걸 알고는 과도한 친절을 베푸는 중이었다.

“라디 양은 준비 잘돼 간대?”

“저야 보는 눈이 없으니 잘 모르겠지만 다른 선배님들 말에 의하면 아슬아슬한가 봐요.”

“웨이 녀석은?”

“헛꿈 그만 꾸고 현실에 맞추면 벌써 승급했을 거라는 소리만 듣고 있지요.”

“아무튼 묘한 데서만 집요한 녀석이라니까.”

직원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리곤 눈을 반짝이며 정말 묻고 싶었던 질문을 했다.

“넌 어때?”

“저야 늘 똑같죠. 신참의 하루가 다 거기서 거기 아닌가요?”

뭘 물어보는지야 훤히 꿰뚫고 있지만 일부러 모르는 척했다. 직원은 발까지 동동 구르며 아쉬워했다.

신승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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