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사구는 홈런타자에게 빈발한다. 투수들이 홈런타자에게 홈런기록을 내주거나, 홈런을 맞지 않기 위해 고의사구를 많이 던진다. 미국, 일본, 한국에서 역대 고의사구를 가장 많이 보유한 선수들은 다 최고의 홈런타자들이라는 점도 이런 이유이다.
비록 약물복용으로 퇴색이 되기는 했지만 미국 메이저리그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배리 본즈는 9이닝 4개(2004년), 한 시즌 120개(2004년), 통산 668개의 역대 최다 고의사구 기록을 갖고 있다. 일본에서는 최고의 홈런타자 왕정치(일본명 오 사다하루)가 427개로 최다이며, 재일교포 장훈(228개)이 뒤를 잇고 있다. 마쓰이 히데키는 1992년 고시엔 스타디움에서 열린 일본 고교야구선수권대회에서 5경기 연속 고의 볼넷을 뽑아내 전국적인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한국 프로야구 통산 고의사구 1위는 양준혁의 150개, 시즌 최다 고의사구는 1997년 이종범의 30개이다. 이종범은 1번 타자임에도 정교한 타격으로 투수들이 많이 기피했음을 알 수 있다.
고의사구는 영어 ‘intentional walk’ 또는 ‘intentional base on balls(IBB)’의 일본식 한자어이다. 고의적인 볼넷으로 타자를 1루로 출루시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타석 계산에 제외된다. 참고로 ‘고의死구’와 ‘고의四구’는 다르다. 이론적으로 공 4개 던지기 귀찮으니 그냥 타자한테 별로 안 아플 정도로 살짝 맞춰서 출루시키는 방법을 쓸 수도 있다. ‘고의死구’다. 실제로 이랬다가는 벤치 클리어링를 불러오기 십상이다. 그래서 예전 ‘고의四구’로 홈런타자들을 피했던 것이다. 2018년부터는 자동 고의사구 룰이 추가되어 공 4개를 다 던질 필요도 없이 감독이 심판에게 이 타자는 고의사구로 내보내겠다고 이야기만 하면, 투수가 굳이 공을 던지지 않아도 볼넷으로 인정하여 타자는 자동으로 1루에 진루한다.
고의사구가 처음 등장했을 때엔 관중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130년 이상되는 미국 메이저리그 역사에서 고의사구가 언제 등장했는지를 알 수 있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메이저리그 규칙서에 고의사구 규정이 실린 해는 1920년이며 1955년부터 공식적으로 기록됐다.
과거 고의사구를 일본야구에서 널리 쓰는 '경원사구(敬遠四球)', 줄여서 '경원'이라고 불렀던 때도 있었다. '경원'이라는 용어는 중국 고전 예기의 구절인 '귀신을 섬기고 신령을 공경하되 멀리하라(事鬼敬神而遠之)'를 바탕으로, 공자가 『논어』에서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하라(敬鬼神而遠之)'고 언급한 데서 유래한다. 즉, 선비들이 자주 읊던 용어였다. 인터넷에서 ‘조선왕조실록’ 원문을 검색해보면, ‘경원(敬遠)’이라는 말은 세종실록 82권, 세종 20년(1438년) 7월 6일 두 번째 기사에 딱 한 번 나온다. 사간원 상소문에서 “불가(佛家)의 물건을 궁 내부에 보관하면 귀신을 ‘경원(敬遠)’하는 의미에서 바람직하지 않다”는 내용이었다. 경원은 말 그대로 공경은 하데 걸러야 한다는 의미이다. 고의라는 의미와 비슷해 좀 더 고급스러운 단어로 일부 식자들이 ‘경원’이라는 말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싶다. 일본에서 쓰던 경원사구가 한국으로 유입돼 고의사구와 같은 의미로 오랫동안 사용됐다. 지금은 50대 이하가 한글세대로 자라면서 경원사구라는 말도 시대속의 말로 사라졌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나이가 든 야구팬들이나 관계자들은 이 단어가 입에 붙어 많이 쓴다.
[김학수 마니아리포트 편집국장 kimbundang@maniarepor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