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언론에 보도됐던 내용이다. 32년 전인 74년 브리티시오픈 최종 라운드. ‘황금곰’ 잭 니클로스는 15번홀에서 친 어프로치샷이 짧아 볼을 벙커에 빠뜨리고 말았다. 니클로스는 깊은 항아리 벙커에서 탈출을 시도했으나 볼은 오히려 벙커 벽에 맞고 니클로스 쪽으로 날아들었다. 그 순간 모래와 잔디조각, 작은 암석 부스러기들도 함께 튕겼고 그는 본능적으로 눈을 감으며 머리를 숙였다. 바로 다음 순간 뭔가가 그의 어깨에 부딪쳤다. 곧 경기위원이 다가왔고 니클로스는 “볼이 내 몸에 맞았느냐”고 물었다. 경기위원은 “아니다. 볼은 자네 머리 위로 날았고 몸에 맞지 않았네”라고 했다. 경기를 마친 니클로스는 스코어 카드에 사인을 하기에 앞서 다시 한번 경기위원에게 확인했으나 대답은 변함이 없었다. 만약 볼이 니클로스 몸에 맞았다면 2벌타를 부과받아야 했다. 이날 71타를 친 니클로스는 3위로 대회를 마감했다. 그러나 32년이 흐른 지금도 니클로스는 당시의 일 때문에 종종 괴로워한다고 한다. 니클로스는 “경기위원은 아니라고 했지만 볼이 내 몸에 맞았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나는 그날 잘못된 스코어를 적어낸 것이다. 지금도 괴롭다”고 했다. 벙커가 니클로스에게 평생 지을 수 없는 아픈 상처를 주었던 셈이다.
벙커라는 말은 통상 군사적인 용어로 쓴다. 군대에 다녀온 남자들이라면 벙커 진지작업을 해본 경험들이 있을 것이다. 적의 공격으로부터 사람과 장비를 보호하기 위해 지하에 설치한 군사요새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가 1945년 독일 항복 직전 지하벙커에서 애인 애바 브라운과 최후의 죽음을 맞았다는 역사적 사실 때문에 역사 교과서에서 ‘벙커’라는 말을 들어보기도 했다.
온라인 영어어원사전(OED)에 따르면 벙커라는 단어는 스코틀랜드어로 1758년에 ‘벤치’, ‘좌석’ 또는 짧은 2층 ‘잠자리’를 뜻하는 것에서 유래됐다. 이 단어는 스칸디나비아어에서 처음 나왔다고 한다. 스웨덴 고어에서 ‘번케(bunke)'는 '선박의 화물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되는 배'를 의미했다. 19세기에 주택의 석탄 매장이나 배의 갑판 아래를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됐다.
벙커라는 말이 골프에서 쓰이게 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스코틀랜트 초기 골프역사와 관계가 있다. 이 코너 32회 ‘페어웨이’에 대한 설명에서 얘기했듯이 골프는 바닷가에 가까운 링크스에서 발달했다. 코스를 가로질러 바다로 이어지는 작은 강이 흐르고 강 주위에 모래가 많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모래가 많은 지역을 벙커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모래 벙커는 다른 어떤 스포츠에서도 없기 때문에 스코틀랜드에서 나온 것이 확실하다.
벙커라는 단어 자체의 어원은 16세기 스코틀랜드어 '본카르'에서 유래했으며 이는 스코틀랜드와 바다 건너 배를 타고 잦은 교류를 한 스칸디나비어의 ‘번케’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골프에서 벙커라는 단어는 1812년 왕립 골프 규칙에서 처음 등장한다.
'위험하다'는 말인 해저드는 캐디의 어원처럼 프랑스어에서 나왔다는 설이 유력하다. 일찍이 스코틀랜드와 프랑스가 강한 연계를 갖고 많은 교류를 했는데 골프 용어에도 적지않은 영향을 주었다. 골프 코스가 초기 링크스에서 벗어나 점차 확대돼 내륙으로 보급되면서 벙커와 해저드 등을 위험 지대로 조성했다고 한다.
[김학수 마니아리포트 편집국장 kimbundang@maniarepor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