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홀의 골프장은 드넓고 평평한 공간이 펼쳐져 있다. 하지만 여기서도 가야할 길과 가지 말아야 할 길로 나뉜다. 페어웨이(Fairway와 러프(Rough)이다. 페어웨이는 말 그대로 올바른 길이다. (본 코너 32회 참조) 잔디를 갂아서 잘 정돈된 지역이다. 티잉 그라운드에서 보면 페어웨이는 손질이 잘 된 모습으로 푸른 양단자를 깐 듯이 시원스럽게 펼쳐져 있다. 골프장에서 그린과 함께 골프의 매력을 가장 높여주는 핵심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골퍼들이 가고 싶어하는 ‘꽃길’이다.
이에반해 러프는 가기 싫어하는 ‘흙길’이다. 꽃길에 비해서 그만큼 순탄하고 순조로운 길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물론 흙으로 덮여있는 길이 아니다. 페어웨이 바깥의 두꺼운 풀이나 자연적으로 자란 식물이 다듬어지지 않은 특정 지역이라는 의미이다. 공이 러프에 빠지면 탈출하는데 애를 많이 먹는다. 그래서 골퍼들에게는 흙길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골프에서 러프가 만약 없었다면 재미는 훨씬 없었을 것이다. 꽃길만 걷는 인생이 없듯이 흙길만 계속되는 삶도 없다. 항상 좋은 일만 있을 수 없고 나쁜 일만 있을 수 없다. 어쩌면 불행한 일들이 있기 때문에 삶에서 더 행복을 느낄 수 있다. 러프는 골프에서 바로 그런 존재감이라고 할 수 있다.
‘러프’라는 말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 다의어이다. 그만큼 다양한 영역에서 쓰이고 있다는 말이다. 형용사로 ‘고르지 않은, 거친’다는 의미이다. 대충하는 행동과 성격에 관련해 많이 쓰인다. 썩 좋은 의미는 아니다. 명사로는 골프장에서 풀이 길고 공을 치기가 힘든 지역을 말한다. 그림 회화에서 초고, 밑그림을 뜻하기도 한다. 러프의 어원은 고대 영어 'Ruh', 앵글로 노르만어 'Ruksa'의 영향을 받아 거칠다는 의미로 쓰였다.
골프에서 러프를 만든 것은 몇 가지 목적이 있다. 먼저 징벌적 성격이다. 페어웨이를 놓친 골퍼들에게 벌타적 성격을 부여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잔디가 높은 러프에 들어가면 공을 빼내기가 어렵다. 골프장마다 러프의 잔디 길이는 다르다. 페어웨이 바로 옆 러프는 깎기도 하지만 깊이 들어갈수록 잔디는 무성한 숲으로 바뀐다. 고급 골프장들은 러프도 등급을 나눠 운영한다.
러프는 골프 발상지 스코틀랜드에서 먼저 등장했다. 해안가 링크스에 있던 초창기 골프장들은 페어웨이가 없고 거친 자연상태로 된 지역에서 출발했다. 잔디 깎는 기계도 없던 시절이라 자연적인 방식으로 잔디 관리를 할 수 밖에 없었다. 풀을 먹고 자라는 양떼와 염소들에 의해 초원이 관리되면서 골프를 할 공간이 만들어졌다. 그 이외 지역은 자연 상태 그대로 였다. 산업과 과학의 발달로 기계적인 벌채 방법이 가능해지면서 골프 코스는 페어웨이와 러프를 계획적인 방식으로 관리하는게 가능해졌다.
러프가 징벌적 성격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인 골프대회는 US오픈이다. 미국 골프대회의 내셔널대회이면서 4대 메이저 대회의 하나인 US오픈은 대회가 열리는 코스에서 러프를 특별 관리한다. 페어웨이에서 몇 피트 떨어진 러프의 길이까지 치밀하게 계산해 운영하고 있을 정도이다.
골퍼들은 러프에 대한 속어로 거친 풀, 큰 풀, 시금치, 잡초, 양배추, 브로콜리, 정글 등 거칠고 다양한 말을 사용한다. 그만큼 러프를 싫어한다는 뜻이다. 표의성이 뛰어난 한자어로 러프는 ‘심초구(深草區)’이다. 깊은 곳에 있는 풀이라는 말이다.
[김학수 마니아리포트 편집국장 kimbundang@maniarepor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