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1947년 흑백 차별법인 ‘짐 크로우(Jim Crow Law)'이 공공장소에서 적용됐던 때, 메이저리그 400명의 선수 중 유일한 흑인 선수로 브루클린 다저스 유니폼을 입고 출전했다. 그는 야구선수로서도 출중한 기록을 남겼다. 데뷔한 해 신인상과 1949년 MVP를 수상했으며, 내셔널리그와 월드시리즈 우승(1955)에도 기여했다. 로빈슨의 데뷔 50주년 행사이후 1995년부터 42번을 달고 뛴 뉴욕 양키스 투수 마리아노 리베라가 2013년 은퇴하면서 전 메이저리그팀에서 42번 등번호는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영구결번은 영어로 ‘Retired Numbers’라고 말한다. 은퇴한 숫자라는 뜻이다. ‘Retire’의 어원은 프랑스어 ‘Retirer’에 기원을 두고 있는데 다시를 뜻하는 ‘Re’와 끈다는 의미의 ‘Tirer’의 합성어이다. 일본서도 똑같이 영구결번이라고 말하는데 한문으로 결자의 약자인 ‘欠’자를 주로 쓰는 것만 다르다. 영어 뜻인 은퇴한 숫자를 영구결번으로 번역한 것은 숫자를 영원히 사용하지 않고 놔둔다는 것을 풀이한 것으로 해석된다. 영구결번이라는 말은 우리 보다 야구를 먼저 들여 온 일본에서 먼저 사용한 데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원래 야구선수 번호는 선수들을 구별하기 위해서 도입됐다. 1916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는 선수들 번호를 처음으로 도입했으나 별 주목을 끌지 못했다. 본격적으로 번호시스팀을 채택한 팀은 뉴욕 양키스이다. 뉴욕 양키스는 베이브 루스 3번, 루 게릭 4번 등으로 1번부터 8번까지 선수들 번호를 부여했다. 최초의 영구결번이 된 선수는 루 게릭이었다. 1939년 근육이 수축되는 희귀 질환을 알고 있던 루 게릭이 자신의 이름을 딴 ‘루 게릭병’으로 죽으면서 그의 번호 4번이 메이저리그 사상 처음으로 영구결번이 됐다. 미국 프로스포츠에서 영구결번을 처음으로 한 종목은 미식 축구였다. 1935년 미식 축구팀 뉴욕 자이언츠의 레이 플루허티의 1번이 첫 영구결번으로 결정됐다.
사실 영구결번은 프로구단들이 유명 선수가 은퇴한 이후 옷 등 기념품으로 판매수익을 올리기 위한 상업적인 목적으로 시작됐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현재는 거의 전 종목에 걸쳐 명예로운 제도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메이저리그에서는 150명 정도가 영구결번으로 대우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가운데는 선수가 대부분인데 감독과 일부 프런트도 포함돼 있다. 메이저리그에서 번호를 쓰기 이전의 스타들인 타이 콥 등 초기 선수들은 번호 없이 이름 배너 등을 통해 기리기도 한다.
한국프로야구서는 첫 번째 영구결번은 1986년 현역 선수로 주전경쟁에서 밀려 인생을 비관해 투신 자살로 세상을 떠난 OB 베어스 포수 김영신의 56번이다. 해태 타이거스 선동열은 1996년 일본 프로야구팀 주니치로 떠나면서 등번호 18번을 영구결번으로 남겼다. 프로야구 원년 최다승 투수 OB 박철순은 21번, 2011년 세상을 떠난 롯데 자이언츠 최동원은 11번, 국민타자 삼성 라이온스 이승엽은 36번이 각각 영구결번이 됐다. 일본프로야구는 영구결번보다는 등 번호 자체에 의미를 두며 번호를 물려받는 전통이 있다. 최고의 인기팀 요미우리 자이언츠 18번의 경우 후지타 모토지, 호리우치 츠네오 등으로 이어지다 2019년엔 투수 스가노 도모유키가 이어 받았다.
한국 스포츠에서는 프로야구 이외에 프로농구에서 영구결번이 많은 편이다. 프로농구서는 기아에서 뛰었던 김유택이 2000년 은퇴와 함께 자신의 등번호 14번이 처음으로 영구결번됐다. 여자농구에선 안산 신한은행의 전주원이 2011년 은퇴와 동시에 0번이 영구결번이 됐다.
축구와 배구 등은 포지션 별 번호를 제한하는 종목의 특성 상 영구결번이 프로야구보다는 활성화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프리미어리그 등 유럽 축구서는 유명 스타의 경우 영구결번으로 기념하기도 한다.
[김학수 마니아리포트 편집국장 kimbundang@maniarepor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