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빛 스타즈 소속으로 스타리그 3회 연속 4강 진출이라는 대기록을 만들어냈던 박경락은 2008년 돌연 은퇴를 선언하고 팬들과의 이별을 고했다. 2008년 3월 한빛 숙소에서 나온 그는 5개월 가량 칩거 생활에 돌입했고 그를 원하는 팬들과 연락을 끊었다. 게이머로서 패배를 반복하는 모습에 스스로 실망했고 마우스를 놓았다.
“은퇴하겠다고 마음 먹었다가 되돌리기를 수 차례 했죠. 그러면서 심리치료도 받았고 예선을 통과하기도 했고 한빛 팀도 좋았다가 어려워지기도 했고요. 팀 사정이 어려운 상태에서 감독님이 가장 많이 배려해준 제가 흔들리니까 미안하더라고요. 그래서 선수를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박경락은 홀연히 나타나 무대 뒤로 들어갔다. 현란한 조명을 받으며 스타 플레이어로 이름을 날리던 그에게 무대 뒤는 낯설었다. 그렇지만 e스포츠와의 인연을 끊기에는 매몰찬 성격이 되지 않았고 온게임넷과 이재균 감독의 배려로 프로리그 옵저버를 맡았다.
”선수 시절 리플레이를 돌려보는 일과 시청자에게 경기 내용을 보여주는 옵저버는 차원이 달랐어요. 선수 때에는 제 멋대로 장면을 찍었거든요. 대충 흐름은 다 아니까 제가 보고 싶은 장면만 봤어요. 속도도 엄청나게 빨랐고요. 그런 습성을 갖고 있다가 옵저버라는 직업을 맡게 되니 당황스러웠죠. 무선 이어폰으로 PD님의 호통을 듣는 게 하루 일과에요.
◆삼지안 옵저버
박경락은 매주 화요일 온게임넷이 중계하는 프로리그의 옵저버를 담당하고 있다. 선배 옵저버가 있기에 아직 배우는 입장이다.
“처음 옵저버를 맡았을 때에는 유닛도 제대로 클릭하지 못하고 손 놀림이 분주했어요. 마치 제가 게임을 하듯 움직였죠. 주위에서 ‘삼지안 저그’ 시절로 옵저버를 하면 어떻게 하느냐라는 지적을 많이 들었어요.”
박경락은 옵저버로 성공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선수 시절 상대할 선수의 VOD를 보고 나면 더 경기가 안 풀린다는 징크스를 갖고 있었기에 VOD와는 전혀 관계가 없었던 박경락이었지만 이 일을 시작한 뒤로는 지겹도록 반복해서 본다고 했다. 전략이나 운영, 생산력에 신경쓰는 것보다 화면 전환 능력이나 전체적인 스토리 전개 등을 머리에 넣으려고 애를 썼다고.
“옵저버는 그림으로 시청자와 대화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PD가 전체적인 부분을 생각하는 것처럼 저는 경기하는 선수들의 생각을 화면 안에서 보여주는 거죠. 이 작업이 원활하게 되지 않으면 시청자들이 게임 채널을 보지 않게 됩니다. 개인적으로는 사명감을 갖고 일하고 있어요.”
◆“이제동-김택용 나오면 정신 없어요”
박경락은 선수 시절 상대의 혼을 빼는 드롭 공격으로 유명세를 얻었다. 테란과 프로토스를 만나면 사방에서 드롭을 시도했고 막고 나면 또 드롭 공격을 시도하면서 ‘경락 마사지’라는 별명을 얻었다. 경락 마사지를 받고 나면 멀쩡하던 사람도 온몸에 힘이 빠지기 때문에 붙은 별명이다. 이름도 때마침 박경락이어서 팬들은 이 별명을 애용했다.
또 다른 애칭은 ‘삼지안 저그’. 눈이 세 개 달린 종족을 그린 만화 ‘3X3 아이즈’를 인용한 별명이다. 눈이 하나 더 달린 것처럼 정확하게 파악하고 빈 틈을 파고 든다는 뜻이다.
삼지안을 갖고 있는 박경락도 옵저버로 전향한 뒤 두려워하는 선수들이 생겼다. 바로 화승 이제동과 SK텔레콤 김택용이다.
“이제동과 김택용의 경기를 옵저버하고 있으면 어느 곳을 클릭해야 할 지 잘 모르겠어요. 이제동은 ‘뮤탈리스크로 컨트롤을 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면 본진과 앞마당에서 병력이 나오고 럴커와 저글링 체제로 변해 있어요. 전투를 치르면서도 생산도 동시에 하고 체제 전환까지 됩니다. 김택용은 셔틀 활용 능력이 정말 대단해요. 대치 전선을 형성하면서 셔틀을 쓰는 것이 일반적인데 공격하고 수비하면서도 셔틀을 쓰더라고요. 제가 유명세를 얻었던 경락 마사지는 그들의 능력과 비길 것이 못 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은퇴하면 할 게 없다
박경락이 은퇴한 이후 가장 고민했던 일은 돈벌이다. 어렸을 때부터 게임만 하다 보니 사회 경험이 거의 없었다. 대학을 졸업한 것도 아니고 딱히 자격증도 얻은 게 없다. 자격증이라고는 운전 면허와 프로게이머 인증서가 전부다.
“막막했어요. 아는 건 게임, 그것도 스타크래프트밖에 없는데 맨 손으로 무언가를 이루려니까 깜깜하더라고요. 이재균 감독님이 저 대신에 일자리 알아봐 주신다고 고생 많이 하셨죠.”
이 감독이 사방으로 뛴 결과 박경락은 온게임넷 옵저버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요즘 은퇴한 선수들을 가끔 만나요. 나도현, 박영훈 등 한빛에서 함께 생활했던 선수들과 소주잔을 기울이며 옛날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공통점은 ‘그만 두고 나면 할 게 없다’는 거였어요. 도현이형은 요즘 노원에서 공익 생활을 하고 있고 박영훈은 그나마 일자리를 얻어 돈벌이를 하고 있죠. 은퇴 후에 할 것이 많아야 안정적인 생활을 보고서라도 후배들이 더 많이 들어올 텐데 고민이에요.”
◆웅진 창단 환영
박경락에게 웅진으로 재창단되고 나서 선수로 복귀할 생각이 없었냐고 물었더니 손사래를 친다. 후배들이 이미 자리를 차지한 상태에서 숟가락 더 놓는 일은 선배가 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란다. 코치직도 생각했지만 병역 문제가 발목을 잡고 있어 포기했다고.
“한빛보다 규모가 큰 기업이 들어와서 후배들이 좋은 성적을 낸다면 더 바랄 게 없어요. 안정적으로 선수 생활을 할 수 있고 미래에 대한 비전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환영할 일이죠. 부럽기도 하고요.”
◆기사 통해 만나요
박경락은 옵저버 일과 함께 기사 작성 업무를 통해 e스포츠 팬들과의 연결 고리를 넓혀갈 예정이다. 데일리e스포츠에서 새로 오픈한 ‘박경락의 핀포인트’라는 코너를 통해 프로게이머 시절 갖고 있던 열정을 쏟아 부을 계획이다.
“글솜씨가 없어서 수락 여부를 놓고 고민이 많았어요. 그렇지만 e스포츠 팬들에게 제가 가진 자그마한 지식을 드리고 싶어 코너 제의를 받아들였습니다. 경기를 보는 또 하나의 재미를 드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박경락의 핀포인트’ 1회는 오는 4일 열릴 바투 스타리그 결승전 SK텔레콤 정명훈과 화승 이제동의 경기를 마친 뒤에 처음으로 공개된다.
“프로게이머를 할 때보다 더 떨려요. 그렇지만 팬들을 만나는 계기가 생겼으니 기쁘기도 합니다. 박경락의 핀포인트 많이 사랑해주세요”
남윤성 기자 thenam@dailyesport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