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이 됐지만 범인지 알려고 하지 않는 선수. 그래서인지 안쓰러운 마음이듭니다. 하지만 이제는 천하를 호령할 범으로 거듭나기 위해 스스로가 범임을 알아채야 하는 과정을 겪어가고 있는 선수가 바로 SK텔레콤 T1 어윤수입니다.
스타크래프트2(이하 스타2)로 프로리그와 개인리그 모두 종목 전환이 완료됐을 때 각 팀들 사이에서는 어윤수 경계 경보가 발령됐습니다. 어윤수는 스타2로 완벽하게 적응했고 내부 평가전 또는 래더에서 숱하게 1위를 차지하며 에이스로 거듭날 준비를 모두 마쳤습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어윤수는 개인리그와 프로리그에서 상반된 성적을 보였습니다. 래더나 연습실에서는 누구도 따를 자가 없다는 평가를 받던 어윤수였지만 개인리그에서는 실력을 어느 정도 발휘하며 두 번의 결승전에 진출에 성공한 반면 프로리그에서는 출전 기회조차 잘 잡지 못했습니다.
두 번 연속 WCS 결승에 오르면서 검증을 마친 어윤수는 천하를 호령하기만 하면 되는 범이 됐습니다. 그를 발목 잡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 '순혈 콩라인' 어윤수의 진솔한 이야기를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내가 콩라인이라니!"
대부분 선수들은 '콩라인'이라는 말에 몸서리를 칩니다. 최근 위상이 올라갔다고는 하지만 콩라인에 가입한다는 사실이 반갑지만은 않기 때문입니다. 불행 중(?) 다행히도 한국의 스타2 대회에서는 '콩라인' 가입 조건을 완벽하게 충족한 선수가 없어 이로 인해 좌절한 선수는 없었죠(이제동은 해외에서 활동하는 선수입니다).
스타2 리그가 5년째를 맞이하면서 '콩라인'의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선수가 나타났습니다. '콩라인' 가입에 가장 중요한 요건인 2회 연속 2등, 즉 준우승을 해야 한다는 '업적'을 달성한 선수가 등장한 것이지요. 2회 준우승을 한 선수가 있다고 하더라도 연속해서 달성한 기록이 아니라면 콩라인 가입은 잠시 미뤄둬야 합니다.
지금까지 2회 연속 결승전에 진출한 선수도 스타2에서는 손을 꼽을 정도입니다. 그만큼 스타2는 절대 강자가 없었다는 이야기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유독 '전통 콩라인'에 가입할 수 있는 선수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2회 연속 준우승을 기록한 선수가 나타나며 콩라인 신규 회원을 기다리던 팬들은 환호했습니다. 그 주인공은 '콩라인에 가입했다'이라는 이야기에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신기해하고 재미있어 하는 독특한 반응을 보였습니다.바로 어윤수였죠.
"아직도 신기해요. 제가 감히 낄 수도 없는 자리였던 콩라인에 가입한 거잖아요. 스타크래프트:브루드워 때부터 (정)명훈이형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어요. '콩라인'으로 주목도 많이 받았고 그만큼 개인리그 결승전도 자주 출전했고. 도랑치고 가재까지 잡는 효과를 누린 (정)명훈이형을 보면서 '나는 언제쯤 근처에라도 갈 수 있을까'라고 부러워했죠."
바라보며 부러워만 하던 자리에 자기 이름이 올라가 있다는 사실에 어윤수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 눈치였습니다. 물론 우승을 하지 못한 것이 서운하긴 하지만 돌이켜보면 콩라인을 우러러 보던 자신의 모습이 아닌 당당하게 콩라인 일원으로서 인터뷰에 임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범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자기 능력을 자각하지 못하고 콩라인 가입을 신기해 하면서 고양이에 만족하고 있었던 거죠. 스타 플레이어로 올라가길 원하는 사람에게는 바람직하지 않은 자세입니다. 어윤수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 어윤수가 넘어야 할 벽이자 산인 것입니다.
◆범이 되라
스타2 저그 가운데 최고의 실력을 가지고 있으며 뮤탈리스크 활용은 최고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어윤수가 아직까지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스스로가 범임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가 아직도 대단한 선수라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아무래도 프로리그에서 출전 기회를 잡고 있지 못하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요. 솔직히 답답한 마음도 들어요. 아직까지 껍질 안에 갖혀 있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계기가 있어서 이 껍질을 깰 수 있으면 좋겠어요."
실력이 상향평준화 된 시대에 2연속 결승 진출을 일궈낸 어윤수는 분명히 실력자입니다. 어윤수는 자기 위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음을 깨달았습니다. 충분히 자신감을 가지고 상대를 대해도 되는 선수라는 것을 느꼈죠. 고양이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범으로 성장하기 충분한 성장 동력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자만심은 사람을 망친다는 생각 때문에 겸손하자고 생각했던 것이 오히려 독이 된 느낌이에요. 두 번의 준우승. 남들이 보기에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충분히 톱 클래스 저그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제는 달라질 겁니다. 어윤수라는 이름만 봐도 붙기 꺼려지는 선수로 거듭나야죠. '순둥이' 어윤수랑은 안녕해야 할 것 같아요. 평소에는 밝지만 경기 안에서는 무자비한 폭군으로 거듭나고 싶습니다."
◆우상 이제동…주성욱 꼭 복수하고파
어윤수의 이제동 사랑은 프로게이머 사이에서도 유명합니다. 이제동을 너무나 좋아해 그의 플레이를 곧잘 따라 했고 이제동과 친하게 지낼 수 있도록 계기를 만들어주겠다면서 선배들이 전화 연결을 해주면 말 한 마디도 못 전하고 도망 다니기 일쑤였다고 합니다. 마치 아이돌을 좋아하는 소녀 팬처럼 어윤수는 그렇게 이제동에 대한 애정을 키워갔습니다.
"완벽하죠. 자기 관리, 프로게이머로서의 능력, 게임 실력, 외모, 팬서비스, 인맥 등 무엇 하나 부족하거나 나쁘다고 평가할 만한 것이 없어요. 누군가가 욕할 만한 것을 찾기 위해 눈을 부릅떠도 아마 없을 선수입니다."
어윤수는 이제동과 같은 선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꿉니다. 이제동의 우승 커리어뿐만 아니라 이미지, 평가 등 많은 부분들 닮고 싶습니다.
"지난 해 WCS 글로벌 파이널에서 이제동 선수를 만나 친해졌어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일줄 알았는데 우리랑 같은 세계에 살고 있더라고요(웃음). 우상으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이제동과 같은 선수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겁니다."
어윤수에게는 가슴 속 깊이 새겨두고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는 선수도 있습니다. 바로 KT 롤스터 주성욱입니다. 어윤수는 지난 결승전에서 이길 수 있는 상황에서 주성욱에게 역전당하고 난 뒤 아쉬움을 삼켜야 했습니다. 그리고 주성욱은 SK텔레콤 킬러로 거듭나며 승승장구하고 있죠. 자신이 날개를 달아준 것 같아 심히 기분이 좋지만은 않다고 하네요.
"반드시 이기고 싶어요. 어디에서 붙든 주성욱과 맞대결하게 된다면 이번에는 꼭 이길 겁니다. 희생양이 될 수는 없잖아요. SK텔레콤의 명예를 걸고서라도 주성욱은 반드시 이기고 싶어요. 이번 개인리그에서 반드시 높은 곳까지 올라 왔으면 좋겠어요. 저도 올라갈게요."
◆SKT 저그를 승리의 아이콘으로 만들겠다
SK텔레콤은 유독 저그와 인연이 없었습니다. SK텔레콤을 대표하는 선수를 꼽을 때 그동안 저그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윤수의 최종 목표는 저그 출신의 SK텔레콤 프랜차이즈 스타가 되는 것입니다.
"SK텔레콤은 임요환, 최연성, 정명훈, 김택용, 도재욱 등으로 이어지는 프랜차이즈 스타가 있잖아요. 성적을 내지 못한다 하더라도 팀의 대표 선수가 된다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제는 저그에서 프랜차이즈 스타가 나올 때가 됐어요(웃음). 그 주인공이 제가 돼야죠."
단순히 우승 몇 번이 아닌 팀을 대표하는 선수로 거듭나고 싶다는 의지를 전한 어윤수. 항상 웃는 모습이지만 그 안에는 수 백 개의 칼을 품고 최고의 선수가 되기 위해 어윤수는 오늘도 키보드를 두드립니다.
"범이 돼야죠. 이제는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 그런 범이 되기 위해 계속 노력할겁니다. 프로리그에서도 달라진 모습 보여 드릴게요. 많이 응원해 주실 거죠? 참! 최근 쌍꺼풀 수술 어디서 했냐고 물어보시는 분들이 많은데요. 그렇게 자연스럽나요(웃음)? 자꾸 물어보지 마세요. 어제 수술했는지 기억 안나요(웃음)."
[데일리e스포츠 이소라 기자 sora@dailyesport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