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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 정명훈 "이기기 위해 떠난다"

[피플] 정명훈 "이기기 위해 떠난다"
'쉴 곳을 찾아서 결국 또 난 여기까지 왔지
내 몸 하나 가눌 수도 없는
벌거벗은 마음과 가난한 모습으로'

전람회 2집에 있는 '이방인'이라는 노래의 도입부다. 제 몸 하나 뉘일 곳 없는, 어디를 가든 타향살이를 하는 것과 같은 심정을 담은 노랫말. 정명훈은 2014년 내내 이 가사와 같은 느낌을 받았다.

◆주장이었다
2014년 정명훈은 야심차게 출발했다. 스타크래프트2를 본격적으로 손에 잡은지 3년째. 무언가 이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SK텔레콤 T1의 주장까지 맡은 정명훈은 프로리그 미디어데이 자리에서 "주장 징크스를 깨는 첫 주장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이전까지 SK텔레콤에서 주장을 맡으면 프로리그에서 성적을 내지 못했다. 물 오른 실력을 보여주던 선수들까지도 쭉쭉 미끌어져 내려왔고 은퇴를 하거나 군에 입대했다. 정명훈은 선배들의 전철을 밟고 싶지 않았고 않을 자신도 있었다.

그렇지만 묘하게도 정명훈은 선배들과 같은 길을 걸었다. 출발은 나쁘지 않았다. 프로리그 시즌 내내 테란이 설 자리가 없다는 분석이 대세를 이뤘고 SK텔레콤은 프로토스와 저그를 주축으로 엔트리를 짰다. 정명훈은 1라운드 4주차에야 시즌 첫 경기를 치렀다. 결과는 패배.

2라운드에서는 '아웃복서'에서 세 번 출전해 세 번 모두 승리하며 살아났다. 그러나 팀 성적이 바닥을 치면서 정명훈의 활약은 빛을 보지 못했다. 주장이라는 자리에 있었기에 정명훈은 시원하게 웃지도 못했다. 2라운드 5주차에서 정명훈은 CJ 엔투스와의 에이스 결정전에 출전했다. 이길 경우 4강 안에 들 수 있는 자리였다. 정명훈은 졌고 마음 고생이 심해졌다.

"주장이 아니었다면 코칭 스태프에게 내보내달라고 졸랐을 거에요. 테란이 프로토스전도, 저그전도 이길 수 있다는 보장이 없던 시기였지만 잘하는 테란들은 승승장구했거든요. 진에어 조성주, KT 이영호와 전태양은 1라운드부터 다승 수위권이었어요. 그리고 자주 출전했죠. 제 실력이 부족하기도 했지만 방송 경기에서는 다를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주장 완장을 달고 있다 보니 선뜻 나서지를 못하겠더라고요. 동료들에게 기회를 내주다 보니 점점 뒤로 빠지더라고요."

3라운드에서 SK텔레콤은 라운드 정규 시즌 우승, 포스트 시즌 우승을 통해 반등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도 정명훈은 빠져 있었다. 1주차에 한 번 출전한 것이 고작이었다. 4라운드에서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최연성 감독이 1주차에서 MVP와 프라임을 상대로 두 번 연속 출전시키면서 기량을 테스트하려 했지만 정명훈은 만족시키지 못했다.

"2라운드를 마치고 나서 팀 발등에 불이 떨어졌잖아요. 1라운드 준우승을 했지만 2라운드에서 포스트 시즌조차 밟지 못했으니까 3, 4라운드가 너무나 중요해진 거에요. 저는 또 다시 침묵에 빠졌죠."

프로리그에서 부진했던 정명훈은 개인리그에서 실력을 보여주려 했다. 2014년 세 번 열린 코드A에 모두 이름을 올린 정명훈은 방송 경기에서 모두 기대 이하의 성적을 냈다. 시즌2에서 CJ 이제현을 꺾은 것이 승리의 전부였고 경기 내용 또한 최악이었다.

[피플] 정명훈 "이기기 위해 떠난다"

◆이기는 법을 잊었다
"바보가 된 것 같았어요. 초반에 유리하게 시작하면 어떻게 해야 승리로 마무리해야 하는지 척척 나와야 하는데 오히려 머리 속이 하얗게 변해 버려요. 불리한 경기는 시나브로 패배로 향하고 있고요."

야구 선수가 걸리는 특이병 가운데 스트라이크를 못 던지는 질환이 있다. '스티브 블래스 증후군'이라고 불리는 이 병은 스티브 블래스라는 투수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1960~70년대 초반까지 메이저리그를 호령하던 좌완투수인 스티브 블래스는 1972년엔 19승을 거두며 내셔널리그 사이영상 후보 2위까지 올라갔다.

이듬해인 1973년 갑자기 구위가 악화된 스티브 블래스는 3승9패, 방어율 9.85라는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 볼넷이 갑자기 늘어난 것이 성적 저하의 원인이었다. 1972년까지 5년 연속 두자리 승리를 기록하고 8년간 통산 100승을 거두며 전성기를 구가했던 투수는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못하는 병에 걸렸고 은퇴했다.

정명훈도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다. 이기는 방법을 잊어 버린 것. 냉혹한 승부의 세계에서 이겨야만 살아 남는 프로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선수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를 잊은 것이다.

"연습 경기나 래더에서는 승률이 괜찮거든요. 그런데 방송 경기만 치르면 백짓장이 되어 버려요. 문제가 뭔가 곰곰이 되짚어봤는데 무대 공포증 비슷한 것이 생긴 것 같아요. 그래서 SK텔레콤을 떠나기로 결정했죠."

정명훈은 2015년에 대비한 연봉 협상 자리에서 팀을 나가겠다고 말했다. 개인 성적이 좋지는 않았지만 팀이 프로리그 정규 시즌 1위에 준우승을 차지했으면 연봉 상승 요인은 충분히 있다. 주장으로서 기회를 동료들에게 돌린 것도 팀이 알고 있다. 정명훈은 과감하게 팀을 떠났다. 뛸 곳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돈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뛰고 싶다
8년 동안 몸 담았던 팀을 떠나 홀로서기에 나선다는 것은 모험이다. 이적이나 트레이드도 아니다. 스스로 새로운 팀을 찾아야 한다. 말이 통하는 한국 팀을 원하는 것도 아니다. 외국팀이어야 하고 정명훈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곳이어야 한다.

"스타크래프트:브루드워 시절 같았으면 제 몸 값이 조금 높았겠지만 스타크래프트2에서 정명훈은 가치가 높지 않잖아요. 그래도 몇몇 게임단에서 콜이 오긴 했어요."

정명훈의 조건은 심플하다. 많은 대회에 나설 수 있는 기반만 만들어주면 된다. 해외 대회에 자주 출전하는 선수들은 참가 신청보다 항공권을 마련하고 숙소를 정하는 것이 일이다. 소속팀에서 이 조건만 만족시켜 준다면 정명훈은 백의종군할 생각도 있다.

[피플] 정명훈 "이기기 위해 떠난다"

"당장 우승한다는 약속은 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2015년을 되돌아 볼 때 정명훈이라는 선수가 인상적인 성적을 냈구나라고 생각나는 활약은 할 자신이 있어요."

정명훈은 소속팀을 찾는 데 몸이 달아 있지는 않다. 2014 시즌 WCS 포인트를 주는 대회들이 대부분 마무리됐고 일러야 올 12월부터 2015 시즌에 대한 새롭게 체제가 갖춰질 것이기에 여유를 갖고 기다리고 있다. 죽어라 연습하면서.

17일 밤을 끝으로 숙소 생활을 정리하는 정명훈은 당분간 부산에서 기량을 갈고 닦을 것이라 했다. 이기는 법을 잊어버린 정명훈에게 9월부터 11월까지는 2015년 농사를 짓기 위해 밭을 뒤집는 시기다. 지난 8년보다 이 3개월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고향인 부산에 내려가 있기에 동료들과 떨어져서 연습하겠지만 홀로서기를 선언한 만큼 감내해야 하는 부분이다.

"팀을 떠나겠다고 밝히고 난 뒤 많은 사람들을 만났어요. 도와주겠다는 프로게이머 선후배들이 많더라고요. 소속팀은 아직 없지만 든든한 지원군을 얻었어요. 후회하지 않도록 여느 때보다 열심히 뛰겠습니다."

'이방인'의 후렴 부분에는 '수많은 세월 헤매이다가/세상 끝에서 지쳐 쓰러져도/후회는 없을 거라고'라는 부분이 있다.

정명훈의 새로운 도전에 후회가 없기를 기원한다.


[데일리e스포츠 남윤성 기자 thenam@dailyesport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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