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이지훈의 상황이 되면 이 상황을 쉽게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이다. 프로게이머라면 누구나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 싶고 더 많이 출전해서 더 많이 인정받고 더 많이 칭찬받고 싶은 것이 사실이다. 23이라는 프로게이머로서는 적지 않은 나이이기에 한 경기 한 경기가 아쉽다.
하지만 이지훈은 이 상황까지도 즐기려고 노력하고 있다.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에서 로빈 윌리엄스가 학생들에게 이야기했던 '카르페 디엠(Carpe Diem)'을 이지훈 버전으로 실행하고 있다. 현재 주어진 상황에 충실하고 성공까지 이끌어내려고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겠다는 각오로 살아가고 있다.
◆어쩌다 마주친 LoL
이지훈은 게임을 좋아하던 학생이었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전교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던 명석한 학생이었다. 하루 종일 앉아서 공부만 하던 스타일은 아니었다. 내성적이고 낯을 가리긴 해도 한 번 친해진 친구들과는 열심히 놀 줄 아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게임도 좋아해서 안 해본 게임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고등학교 때 심하게 놀았어요. 낮에는 적당히 놀면서 밤에 공부해서 성적내기는 싫었거든요. 공부를 등한시하다 보니 성적이 떨어졌고 좋은 대학에는 가지 못했죠."
정말 열심히 놀았다는 이지훈은 4년제 대학의 수학과에 진학했고 자연스레 '수포자(수학포기자)'의 길로 접어 들었다.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심화미적분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아 수학능력시험에서도 26번부터 30번까지 다 찍었다는 이지훈에게 대학 수학은 높은 벽이었다.
"대학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리그 오브 레전드라는 게임이 재미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북미 서버에서 조금 하다가 한국에서 정식 서비스되면서 정말 열심히 했죠."
주위에서 잘한다는 평가를 받기 시작하면서 이지훈은 학교를 휴학할 결심을 하고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2012년 GSG라는 이름의 팀에 들어갔고 이정현, 이관형, 최천주 등과 대회에 나오면서 본격적으로 프로게이머의 길을 걸었다.
◆SK텔레콤은 제2의 시작점
GSG라는 팀은 즐겁게 게임하는 팀이었다. 2012-13 시즌 NLB 윈터 시즌 결승전 5미드 전략은 팬들의 뇌리에 아직도 깊이 남아 있다. 특출난 실력보다는 게임이 좋다는 마음이 더 컸던 GSG 선수들은 공식 대회에 나오기 시작하면서 체계적인 지원에 대한 갈증이 생기기 시작했다.
"GSG에 있던 선수들 대부분이 MVP로 흡수됐어요. '푸만두' 이정현만 SK텔레콤 T1 2팀으로 갔죠. MVP 블루라는 이름으로 챔피언스(이하 롤챔스)를 뛰면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느꼈죠."
MVP에서 1년 정도 생활했을 때에 대한 이야기를 줄인 이지훈은 SK텔레콤 T1으로 넘어온 계기에 대해 설명했다. 2013년 월드 챔피언십(이하 롤드컵)에서 SK텔레콤 T1 K가 우승을 차지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 자리에 서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가졌던 이지훈은 그해 말 학업 복귀와 선수 생활 유지에 대해 큰 고민을 했다.
"LoL이 인기 있는 게임이긴 하지만 안정적으로 선수 생활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어요. 대학도 휴학하고 있던 터라 공부와 게임 중에 골라야 했죠. MVP를 나오고 나서 계속 고민을 하다가 마음이 공부하자는 쪽으로 51% 정도 넘어갈 때 혹시나 하는 마음에 SK텔레콤 김정균 코치에게 물어봤어요. 혹시 미드 라이너 뽑을 생각이 없냐고. 그랬더니 테스트하러 오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렇게 팀에 들어왔어요."
2013년 롤드컵 제패 이후 SK텔레콤은 2개 팀을 유지하는 것이 낫다고 결론을 내렸다. 세계 정상에 선 팀이 있지만 안정적인 연습 환경과 꾸준한 순위 유지를 위해서는 2개 팀이 답이라 생각했고 이지훈을 비롯, 장경환, 배준식, 이재완 등을 영입하면서 SK텔레콤 S를 만들었다.
SK텔레콤 S는 롤드컵 우승팀인 K의 명성에 가려 있었지만 서서히 성장하기 시작했다. 2014년 스프링 시즌 16강 탈락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서머 시즌에는 롤챔스 4강까지 올라가면서 저력을 발휘했다. 이지훈도 이 때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단일 팀 체제와 스프링 우승
SK텔레콤 S가 처음으로 K보다 더 나은 성적을 낸 2014년 서머 시즌이 끝나고 롤드컵 시즌이 돌아왔지만 SK텔레콤에는 신나는 일이 없었다. 두 팀 가운데 한 팀도 롤드컵에 나서지 못한 것. 이상혁이 속했던 K가 한국 대표 선발전 과정에서 순위 결정전에서 탈락한 뒤 최종 선발전에서도 나진 실드에게 패하면서 티켓을 놓치고 말았던 것.
작년 우승팀이 롤드컵에 나서지 못한 것만으로도 SK텔레콤 T1에게는 충격적인 일이었지만 또 한 번의 대격변이 일어냈다. 1, 2팀 체제를 유지할 수 없다고 라이엇게임즈가 결정을 내렸다.
"많은 선수들이 그 소식을 미리 듣고 한국을 떠났죠. SK텔레콤만 해도 채광진, 이정현, 조재환이 2105 시즌이 시작하기 전에 외국팀으로 갔고 스프링 시즌 시작 직전에는 정언영이 북미 팀으로 갔죠."
이지훈은 팀에 남아 있기로 했다. 학업으로 돌아가야 하나라고 흔들리던 자신에게 선수 생활을 계속할 수 있도록 붙잡아준 팀에게 고마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페이커' 이상혁이라는 세계 최고라고 평가되는 선수가 같은 포지션에 있었지만 기회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갈고 닦았다.
스프링 시즌 1라운드에서 SK텔레콤은 인위적으로 기회의 균등을 맞추려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이상혁과 이지훈을 세트별로 교차 출전시키면서 기회를 고르게 주려고 했다. 팀 성적이 4승3패에 머무르면서 SK텔레콤은 매치업 중심으로 엔트리를 짜기 시작했고 스프링 시즌 2라운드를 전승으로 마치면서 2위에 랭크됐다.
CJ와의 플레이오프에서 이지훈은 선발로 출전했지만 1세트에서 완패를 당하면서 이상혁에게 바통을 넘겼다. 이상혁도 컨디션이 좋지 않았는지 2세트에서 무너졌고 정글러로 배성웅이 들어오면서 SK텔레콤은 내리 세 세트를 따내면서 결승에 올랐다. 결승전에서 선발 출전한 이지훈은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 카시오페아로 플레이한 1세트에서 안정적인 경기력을 보여줬고 아지르를 택한 2세트에서는 GE 타이거즈 이서행을 상대로 솔로킬을 내기도 했다. 3세트에도 카시오페아로 9킬 1데스 10어시스트로 펄펄 날며 팀을 우승시켰다.
"많은 분들이 '이지훈 포텐 터졌다'라고 이야기하세요. 그날 경기가 잘 풀린 건 맞지만 그날을 위해 특별히 더 연습량을 늘리거나 마인드를 바꾼 건 없어요. 언제나처럼, 하던 대로 플레이했을 뿐이에요. 큰 경기나 작은 경기나 긴장하지 않는 편인데 오히려 상대 팀이 긴장하면서 제게 포커스가 맞춰진 것 같아요."
◆세계는 넓고 적수는 많다
롤챔스 스프링 우승은 이지훈에 대한 세간의 평가를 뒤집을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이상혁의 그늘에 가려서 2인자, 후보 선수라는 평가가 많았지만 정규 시즌 우승팀인 GE 타이거즈와의 결승에서 3대0 승리를 이끌어내고 MVP까지 선발됐기 때문.
그러나 이지훈에게는 더 중요한 계기였다. 미드 시즌 인비테이셔널(이하 MSI)에 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으면서 세계의 수준을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
"2012년부터 한국에서 롤챔스가 꾸준히 열렸고 2013년 SK텔레콤 K가 롤드컵에서 우승하고 나서 한국이 세계적인 트렌드를 끌고 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MSI에서 대결해보니까 실력이 상당히 좋더라고요."
MSI에 출전하기 전 이지훈은 '한국 선수들이 있는 팀만 잘할 것이고 한국 선수들의 기량만 뛰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국 선수들 뿐만 아니라 다른 선수들도 기대 이상의 실력을 보여줬다. 특히 솔로미드의 미드 라이너 '비억슨' 소렌 비어그의 실력은 기대 이상이었고 중국 대표로 나선 에드워드 게이밍의 중국 선수들도 한국 선수들을 능가하는 실력을 갖고 있었다.
에드워드 게이밍과의 결승전에서 2대3으로 패한 이후 이지훈은 웃었다. 한국에서 SK텔레콤 T1이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고 해서 세계 최고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도전할 거리가 생긴 것. LoL을 플레이하는 모든 이들의 꿈인 롤드컵에서 정상에 서겠다는 다짐을 하며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적지 않은 나이에 선수 생활을 하고 있고 이상혁과 경쟁을 해야 하는 등 생각이 많아질 수도 있지만 현재에 충실하려고 합니다. 주어진 상황에서 꾸준히, 최선을 다하다 보면 제가 만족하는 결과를 얻을 것이라 생각해요."
이지훈은 덧붙였다. "20대에 도전장을 던진 프로게이머의 세계에서 꼭 성공하고 싶어요. 프로게이머를 그만두고 난 뒤 제2의 인생을 시작할 때 어렸을 때 거둔 성공이 디딤돌이 될 것 같거든요."
프로게이머의 성공이 꼭 롤드컵 우승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국내 대회 싹쓸이, 전승 우승과 같은 것도 아닐 것이다. 이지훈이 만족할 만한 수준의, 주위 사람들이 인정해줄 만한 수준의 성과물일 것이다. 지금도 충분히 이지훈의 주위 사람들은 그를 인정하고 있으니 절반 이상의 성공은 거둔 것이 아닐까. 이지훈이 스스로 만족할 만한 남은 절반을 찾는 것이 진정한 성공이리라.
남윤성 기자 (thenam@dailyesport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