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텔레콤의 서머 시즌 활약을 보면 누가 봐도 우승은 SK텔레콤이 가져갔을 것이라 예상했을 것입니다. 선수 개개인의 능력치가 다른 팀보다 높았고 게임에서 보여지는 팀워크까지도 굉장히 훌륭했기 때문이죠. 여기에 식스맨으로 기용할 수 있는 자원까지 갖춘 상황이었기에 KT 롤스터가 아닌 다른 팀이 올라왔더라도 5전3선승제에서 SK텔레콤을 꺾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0대3이라는 스코어는 조금 아쉬움이 남습니다. 역대 서머 시즌 결승전이 모두 5세트 블라인드 모드까지 진행되는 징크스가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팬들 입장에서는 3대1 또는 3대2의 승부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SK텔레콤이 KT를 완파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분석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썸데이' 저격밴 적중
SK텔레콤이 결승전에서 준비한 콘셉트는 전체적으로 봤을 때 KT의 톱 라이너 '썸데이' 김찬호에 대한 저격으로 보입니다.
1세트에서 SK텔레콤은 쉔, 피즈, 룰루를 금지시켰는데요. 피즈와 룰루는 미드 라이너와 톱 라이너가 공통적으로 쓸 수 있습니다. KT에게 적용하자면 '나그네' 김상문과 '썸데이' 김찬호가 돌려 쓸 수 있다는 거죠. 하지만 김상문은 피즈와 룰루를 그다지 많이 쓰지는 않았습니다. 피즈는 한 번 써서 1패를 당했고 룰루는 세 번 써서 2승1패를 기록했죠. 룰루로 거둔 2승 중에 1승이 SK텔레콤과의 서머 시즌 2라운드에서 승리한 것이라는 점은 눈 여겨 볼 만 하지만요.
김찬호는 이번 서머 시즌과 포스트 시즌에서 피즈와 룰루로 재미를 봤습니다. 정규 시즌에서 피즈로 2승, 포스트 시즌에서는 1승을 따냈고 포스트 시즌에서는 룰루로 1승을 따낸 바 있죠. 다시 말해 SK텔레콤이 1세트에서 금지시킨 세 챔피언은 김찬호의 움직임을 제한하겠다는 의도였다고 보여집니다.
하지만 SK텔레콤의 의도는 1세트에서 제대로 통하지 않았습니다. KT가 르블랑과 바이를 고르면서 변수를 만들었기 때문이지요. 롤챔스 기준으로 르블랑은 1라운드 이후에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하향을 당하면서 아지르와 빅토르가 미드 라이너용 챔피언 중에 대세로 떠올랐고 굳이 르블랑을 고르지 않아도 됐기 때문인데요. 최근 외국 대회에 르블랑이 등장해 좋은 플레이를 보여준 점에 착안해 르블랑, 바이 조합을 KT가 고른 것으로 보입니다.
전략적인 챔피언 선택을 보여준 KT이지만 톱 라이너 김찬호에게는 다소 무난한 챔피언을 쥐어줬는데요. 바로 나르입니다. 톱 라이너용 챔피언으로 자주 쓰이긴 했지만 김찬호에게 나르는 그리 잘 맞지는 않아 보였는데요. 정규 시즌 2승1패, 포스트 시즌 1패로 아쉬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1세트에서 전략을 걸었던 KT는 초반에는 유리하게 풀어가는 듯했지만 중반 이후 전투에서 손발이 잘 맞지 않으면서 역전패를 당했습니다. 바이, 르블랑의 암살 조합이 제대로 싸움을 걸지 못했고 교전이 일어났을 때 SK텔레콤 장경환의 마오카이가 탱커의 위엄이 무엇인지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KT가 말파이트를 골랐으면 어땠을까라는 의견도 현장에서 나오긴 했는데요. 콘셉트를 더욱 강조한 챔피언들로 계속 전투를 유발하면서 SK텔레콤의 챔피언들을 하나씩 끊었어야 한다는 아쉬움이 담긴 목소리였습니다. 나르는 메가 나르로 변신했을 때에만 전투에서 효율을 높일 수 있고 분노 관리의 어려움 때문에 자주 전투를 벌일 수 없다는 한계가 있죠.
KT가 만약 전략 픽으로 1세트를 가져갔다면 KT의 의도대로 풀렸을 가능성이 큽니다. SK텔레콤이 다전제를 치를 때 패턴을 보면 상대의 전략 챔피언에 당했을 때에는 다음 세트부터 해당 챔피언을 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르블랑과 바이의 암살자 조합이 통했다면 SK텔레콤은 두 챔피언을 밴하느라 김찬호를 풀어줬을 가능성이 높았겠지요. 하지만 1세트를 가져가면서 KT가 더욱 위축된 밴픽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세트와 3세트에서도 김찬호에 대한 저격 밴은 여전했습니다. 2세트에서 아지르를 금지 목록에 넣기도 했지만 쉔과 룰루는 여전히 금지됐고 3세트에서 또 다시 아지르 대신 피즈를 밴 목록에 등재시키면서 김찬호가 갱플랭크를 고를 수밖에 없도록 강요했죠.
우승을 확정지은 뒤 가진 인터뷰에서 SK텔레콤 김정균 코치는 "김찬호보다 장경환의 챔피언 사용 폭이 넓다고 판단해 톱 라이너용 챔피언을 금지시키는 데 주력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페이커 잡아라' 메타의 부작용
SK텔레콤을 상대하는 팀들은 미드 라이너인 '페이커' 이상혁을 집중 공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상혁의 개인 기량이 워낙 출중하기 때문에 무난하게 성장하면 후반으로 갈수록 막지 못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지요. SK텔레콤과 대결하는 대부분의 팀들은 초반에 승부수를 띄웁니다. 이상혁에게 포커스가 맞춰지는 경우가 많죠.
2세트에서 KT는 '이상혁을 잡아라'라는 미션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듯했습니다. 7분 57초였죠. 중앙 늪 지역 수풀에 와드를 매설한 KT의 서포터 '피카부' 이종범의 쓰레쉬는 이상혁의 다이애나가 근처에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사형선고를 썼습니다. 이상혁이 걸려들자 곧바로 전투를 시도했죠. 옆에 '스코어' 고동빈의 렉사이가 있었고 라인에는 '나그네' 김상문의 빅토르가 미니언을 사냥하고 있었기에 순식간에 이상혁을 잡아낼 수 있다고 계산이 선 것이죠.
KT는 이상혁의 다이애나를 잡아내긴 했지만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이상혁이 실드를 쓰면서 직선으로 도망가기도 했고 '울프' 이재완의 케넨이 다가와서 공격했기에 속도를 내지 못했습니다.
SK텔레콤 선수들의 합류도 빨랐습니다. KT가 4명이 모여 이상혁을 추격하는 사이에 '마린' 장경환의 말파이트가 순간이동을 통해 합류해서 멈출 수 없는 힘을 4명에게 적중시키면서 체력을 빼놓았죠. 그리고 뒤쪽에서는 '뱅' 배준식의 시비르가 따라붙었고 '벵기' 배성웅의 엘리스까지도 위쪽에서 내려오면서 진흙탕 싸움을 벌였습니다. SK텔레콤은 체력이 거의 남지 않아서 포탑 쪽으로 도망치던 KT 선수들을 모두 잡아내면서 5킬을 따냈고 경기는 급속도로 기울었습니다.
이상혁이 만약 김상문의 빅토르가 쓴 혼돈의 폭풍에 맞아서 금세 잡혔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모여 있던 KT 선수들은 굳이 이상혁을 잡기 위해 뒤를 쫓지 않아도 됐을 것이고 장경환의 말파이트에 의해 4명이 공중을 띄워지는 일은 없었겠죠.
◆비기를 들고 나온 SK텔레콤
KT의 실수가 보이기도 했지만 SK텔레콤도 결승전에 대비한 준비를 제대로 해왔습니다. 그 예로 배성웅의 엘리스, 배준식의 애쉬, 이재완의 케넨을 들 수 있는데요. 배준식은 정규 시즌에서 한 번도 선보이지 않았던 애쉬 카드를 썼고 배성웅과 이재완은 거의 쓰지 않았던 엘리스와 케넨을 사용하면서도 안정감을 보여줬습니다.
엘리스는 7월말부터 롤챔스 정규 시즌에서 선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고치의 스턴 시간이 길어지면서 적중했을 때 효용성이 높아졌기 때문인데요. 배성웅은 정규 시즌에서 한 차례 엘리스를 쓰긴 했습니다만 주력으로는 이블린을 자주 보여주면서 KT의 밴을 유도했죠. 그리고 과감히 결승전에서 세 번 모두 꺼내들면서 변수를 만들었습니다. 포스트 시즌용으로 숨겨둔 셈이죠.
배준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서머 시즌 내내 이동기가 있는 원거리 딜러를 주로 썼던 배준식은 포스트 시즌 기간 동안 애쉬를 연마했고 안정적으로 활용했습니다. 라인전에서 다른 원거리 딜러 챔피언에게 뒤처지지 않는 화력을 보유하고 있고 궁극기인 마법의 수정화살을 통해 변수를 만들 수 있는 애쉬로 1, 3세트에 임하면서 동료들에게 도움을 줬죠.
케넨 서포터의 대명사로 불리는 이재완 또한 2, 3세트에서 케넨을 고르면서 승리에 공헌했습니다. 이동기를 통해 발 빠르게 합류하고 궁극기인 날카로운 소용돌이로 KT 선수들을 묶어 놓음으로써 교전에서 수월하게 승리하도록 제 역할을 해냈습니다.
KT가 KOO 타이거즈와의 플레이오프에서 3대2로 승리한 것이 SK텔레콤에게는 연구할 수 있는 표본을 다수 제공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KT 선수들이 잘 쓰는 챔피언은 무엇인지, 어떻게 해법을 마련할지 모두 알고 있었다고 생각되네요. 먼저 결승에 올라 있는 팀이 왜 유리한지 보여준 승부였다고 여겨집니다.
남윤성 기자 (thenam@dailyesport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