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찬희도 그런 테크트리를 탈 뻔했다. CJ 엔투스에 드래프트되면서 프로게이머 생활을 시작했지만 3년 동안 연습생으로만 있었다. 공식 대회에 한 차례 등장했지만 실수로 최단 시간 패배를 기록했고 그 시즌을 마친 뒤 은퇴했다.
군대갈 준비를 하던 윤찬희에게 패자부활전은 아프리카TV라는 채널을 통한 개인방송이었고 기적처럼 되살아났다. 최근에 열리고 있는 스베누 스타리그 시즌1과 시즌2를 통해 프로게이머 시절 못하단 열정을 불태우고 있는 윤찬희는 프로게이머가 아닌 사장님으로 두 번째 인생을 살아보려고 첫 발을 내딛었다.
◆데뷔전이 은퇴 경기
윤찬희의 프로게이머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어느 팀에 속했는지도 잘 모른다. CJ 엔투스를 떠난 적이 한 번도 없지만 제대로 보여진 적도 없기 때문이다. 2군에서 연습생으로 3년 동안 활동하던 윤찬희는 공식 무대에 한 번 모습을 드러냈지만 역대 최단 시간 패배로 기록되어 있다. 한 때 논란이 됐던 PPP 규정을 지키지 않아 몰수패를 당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날짜를 정확히 기억해요. 2011년 6월29일 박상우와의 경기였어요. 경기에 들어갔는데 세팅이 마무리되지 않아서 일꾼을 나누고 난 뒤에 옵션을 눌러 사운드 설정을 하려 했어요. 그런데 옵선이 눌러지지 않았고 마우스로 클릭한 자리가 포즈 버튼이 있던 곳이었죠. 'PPP'를 치고 옵션창을 건드려야 하는데 PPP 메시지 없이 포즈가 걸리니까 곧바로 실격패를 당했죠."
3년 동안 기다렸던 무대였다. 신상문, 조병세가 테란 에이스로 입지를 굳혔던 CJ는 정우용이 떠오르는 신인으로 각광을 받고 있었다. 시즌 막판이라 기회를 줬던 연습생 유영진까지도 놀라운 활약을 펼쳤고 윤찬희에게도 기회가 왔지만 본인의 실수로 날려 버렸다.
"숙소로 돌아오는데 아무 생각도 안 들었고 '은퇴'라는 두 글자만 떠올랐어요. 박상우 선수가 프로리그에서 두 자리 연패를 하고 있었기에 저도 데뷔전에서 이길 수 있다는 생각도 했는데 그 경기가 제 마지막 공식전이었던거죠."
윤찬희는 10-11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 프로게이머 타이틀을 달고 치른 첫 경기가 은퇴 경기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스스로도 불운의 아이콘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최악이었던 프로게이머 생활은 새드 엔딩이었다.
◆시대를 잘 만났다
윤찬희의 은퇴 타이밍은 어쩌면 신의 한 수였을지 모른다. 10-11 시즌을 마친 이후 스타크래프트:브루드워(이하 스타1) 선수들은 기로에 선다. 스타크래프트2를 병행해야 하는 시즌이 예고됐기 때문이다. 스타2를 통해 새로운 도약을 노리는 선수들도 있었지만 기존 주전들은 당황했고 스타1도 스타2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1년 뒤 대거 은퇴 사태가 벌어진 이유이기도 하다.
먼저 은퇴했던 윤찬희는 개인방송을 시작했다. 군에 가기 전 PC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윤찬희는 아프리카TV를 접했고 게임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생각에 발을 들여 놓았다. 스타1 개인방송에 대한 팬들의 반응은 열광적이었고 큰 이벤트를 하지 않아도 별풍선이 모였다.
개인방송 초창기에 윤찬희는 인정을 받지 못했다. 연습생으로 있던 시간이 길었기에 이름값이 떨어졌다. 하지만 길드전을 통해 실력이 있는 게이머였다고 스스로 증명했고 팬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프로게이머 때 연봉이 그리 많지 않았어요. 개인방송을 하는데 시청자들이 별풍선을 주기 시작하는데 연봉보다 훨씬 많았죠. 좋아하는 게임을 방송으로 보여줬을 뿐인데 수입까지 생기니까 일석이조였어요."
스타1으로 유명했던 프로게이머들이 스타2에 적응하지 못하고 하나둘 은퇴하자 아프리카TV에서 스타1 콘텐츠가 더욱 많아졌다. 여러 경기를 통해 윤찬희는 구성훈 등 A급 선수들을 격파하면서 인지도를 쌓았다. 비슷한 시기에 BJ로 활동하던 황효진(방송 아이디 소닉)을 통해 스타1 리그가 부활했고 2015년에는 온게임넷을 통해 스타1 리그가 다시 중계됐다. 윤찬희는 시즌1에서 4강, 시즌2에서 8강에 오르면서 '아프리카 이영호'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운이 따르는 것 같아요. 공식 리그가 사라지면서 다들 망했다고 했지만 저는 인터넷 개인방송을 통해 수입을 얻었고 그 인기를 통해 공식 리그가 다시 만들어졌잖아요. 프로게이머라는 타이틀이나 소속팀은 없지만 경기석에 앉아 대회를 치른다는 것만으로도 제게는 영광이었어요."
◆과자 사업을 택한 이유
개인 방송을 하면서 안정적인 수입원을 확보했지만 윤찬희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들었다. 프로게이머 시절보다야 확실히 많이 벌지만 언제까지 게임을 할 수 있을지, 게임으로 돈을 벌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뭔가 새로운 일을 하고 싶었는데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그럴 때마다 소닉형(윤찬희는 스베누 황효진 대표를 소닉형이라고 부를 정도로 친하다)에게 조언을 구했는데 자기 사업을 해보는 건 어떠냐고 제안하더라고요."
아이템을 고르던 윤찬희는 외국 과자를 온라인 판매하는 일이 눈에 들어왔다. 전직 프로게이머들이 게이밍 기어몰이나 패션몰을 내는 경우가 있었지만 윤찬희는 과자가 눈에 띄었다. 먹는 걸 좋아하기도 했고 개인 방송 후원사 중에 과자 유통사가 있었던 것도 인연이 됐다.
"개인 방송하면서 모았던 돈을 쏟아 부었죠. 인터넷 쇼핑몰이었기에 큰 돈이 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첫 사업이기에 신경 쓸 것이 많더라고요. 사이트 꾸리고 과자 사진 찍어 올리는 일 등을 다 제가 하다 보니까 정신 없었어요."
윤찬희가 운영하는 세계수입과자 전문 쇼핑몰인 허니앤칩(http://honeynchip.com)은 오픈한 지 150일이 채 되지 않았지만 1,000여 명이 넘는 회원을 보유하면서 안정적으로 수입을 내고 있다. 고객들의 주문과 반응을 사장인 윤찬희가 직접 챙기면서 댓글을 남겨주고 응대하며 인터넷 쇼핑몰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서비스를 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프로게이머를 했고 은퇴 이후에는 개인 방송을 하면서 인터넷 문화의 특성을 알고 있다는 점이 장점으로 작용한 것 같아요. 고객들이 반응을 보여주시면 바로 바로 대응하죠. 잘못한 점은 바로 사과하고 잘했다고 칭찬해 주시면 감사하다고 댓글을 달고요."
◆은퇴 프로게이머 모범 되고파
윤찬희의 목표는 은퇴한 프로게이머들에게 이렇게 사는 방법도 있다는 롤모델이 되는 것이다. 게임 업계, e스포츠 업계에 종사하지 않더라도 자기 일을 갖고 프로게이머로서의 경험을 발판 삼아 자부심을 키워가는 것이 은퇴자가 e스포츠 업계에 해줄 수 있는 공헌이라 생각한다.
"공식전 한 번 나와서 몰수패한 선수가 꺼내는 말로는 거창하다고 들으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프로게이머 시절에 배운 덕목들 덕에 지금의 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단체 생활을 하면서 예의를 지키고 팬들 대하듯 고객을 대하고 경쟁에서 살아 남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일 등은 프로게이머 시절에 배운 일이거든요."
윤찬희는 프로게이머 시절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 중에서 가장 어려웠다고 회상했다. 준프로게이머가 됐지만 어느 팀에 갈 수 있을지 모르는 불안감 속에 살았고 CJ에 들어와서는 1군에 들어가기 위해 부던히 노력했다. 첫 공식전은 몰수패로 마감되며 상실감도 컸다.
"나이가 많지는 않지만 제 또래가 경험할 수 없는 일들을 프로게이머 생활을 통해 배웠어요. 사업을 하면서 힘들다고 생각할 때면 옛 경험을 떠올리며 '그 때보다는 지금이 낫지'라고 생각하며 극복했죠."
윤찬희는 "프로게이머 때 정상에 서기 위해서 노력했던 것처럼 사회 생활을 한다면 원하는 일들을 이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저도 프로게이머 시절 최고의 자리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최선을 다했던 것처럼 사업도 해보려고요. 은퇴자들 중에 저를 보면서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사람이 있다면 성공한 삶이겠죠?"
남윤성 기자 (thenam@dailyesport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