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련의 과정을 겪은 이지훈 감독은 2015 시즌을 이렇게 표현했다. 다사다난했고 다이내믹했으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준 시즌이라고.
◆다사다난
Q 2015 시즌을 치르면서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었을 것 같습니다. 2014 시즌이 끝나면서 가장 많은 변화를 맞은 팀이 KT 롤스터인데요. 어땠나요.
A 중국발 엑소더스 파동의 시작이 KT 롤스터였어요. 재계약을 시작하려고 선수들이랑 이야기를 하려는데 이미 마음이 중국에 가 있었어요. '카카오' 이병권을 중심으로 팀을 운영하려 했는데 이병권이 중국에 가겠다고 하더라고요. '루키' 송의진까지 함께 간다고 하니까 굉장히 당황스러웠어요.
Q 2014년 롤드컵에 가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KT 애로우즈 선수들이 2015 시즌의 주축이 될 것이라 예상됐는데 두 명의 주력 선수가 빠지면서 난감했겠어요.
A 리그 오브 레전드 팀을 만들 때 일부러 애로우즈에는 나이가 어린 선수들을 배치했어요. 불리츠를 주력으로 삼고 1~2년 뒤에는 애로우즈가 더 성장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그리고 2014년 서머 시즌을 우승하면서 2015년에는 애로우즈 선수들을 중심으로 끌고 가려고 했죠. 그런데 주축 두 명이 떠나면서 상황이 묘해졌어요.
Q 그래서 택한 것이 '스코어' 고동빈의 정글러 전환이었나요.
A 맞아요. 새 정글러를 구해서 손발을 맞추기에는 무리가 있었어요. 그리고 2개 팀 체제에서 1개 팀으로 축소시켜야 하는 것도 제약으로 다가왔죠. 오창종 코치랑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고 있던 차에 고동빈이 솔로 랭크에서 정글러로도 제법 좋은 성과를 내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어요. 고동빈과 여러 차례 면담을 통해 포지션을 바꾸기로 했죠.
◆다이내믹
Q 스프링 시즌 성적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 같아요. 여러 선수가 떠나긴 했지만 그래도 KT 롤스터는 4강에 포함될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는데요.
A 이제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스프링 시즌은 성적을 크게 원하지는 않았어요. 중간만 가도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임했거든요. 5명의 손발이 맞지 않는 상황이었죠. 라이너들의 변동은 없었지만 그 사이를 잇는 윤활유 역할, 물갈퀴 역할을 해줄 선수들이 공식전에서 검증이 되지 않았잖아요. 2014 시즌부터 정글러와 서포터가 엄청나게 로밍을 다니고 성과를 내는 팀들이 성적이 좋았어요. 우리 팀의 고동빈은 정글러로 전향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픽서' 정재우 역시 공식전 경험이 거의 없었죠. 성적 욕심을 버리고 임했던 시즌이었어요.
Q 그래도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내려 놓기가 쉽지 않잖아요.
A 연패할 때에는 정말 속이 상했고 선수들에게 한 마디 하고 싶을 때도 많았어요. 하지만 시즌에 들어가기 전에 했던 약속이 있었기에 선수들에게는 파이팅 있게 경기하자는 이야기밖에 하지 않았어요.
Q 어떤 약속이었나요.
A 결과가 어떻든 최선의 플레이를 팬들에게 보여주면서 경기를 즐기자고 부탁했고 결과에 대해서는 감독이 책임지겠다고 했죠. 서머 시즌부터는 손발이 맞을테니 스프링 시즌에는 성적에 연연하지 말자고도 말했고요.
Q 그런 의미에서 선수들도 약속을 지켜준 셈이네요. 서머 시즌 성적이 엄청나게 좋았잖아요.
A 서머 시즌 두 가지 상승 요인이 있었죠. 고동빈의 정글러 변신이 안정기에 접어들었죠. 워낙 게임에 센스가 있는 선수여서 적응할 것이라고 생각은 했는데 스프링 시즌 막바지부터 물이 오르기 시작하더니 서머 시즌에는 최고의 플레이만 보여주는 거에요. 알아서 설계하면서 성과를 내니까 동료들도 믿고 따라오면서 팀 성적이 좋아졌죠.
Q 일각에서는 '피카부' 이종범의 영입이 신의 한 수였다는 평가도 있었어요. 이 감독님은 '피카부 효과'까지는 아니다라고 인터뷰하기도 했지만요.
A 이종범의 영입이 타오르는 KT의 상승세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죠. 로밍형 서포터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차에 이종범이 SK텔레콤 T1을 나왔고 삼고초려하면서 영입했어요. 로스터에 올라오고 나서 팀 성적이 승률 90%에 육박했으니 이종범과 다른 선수들이 잘 어울어진 것 같아요.
Q 2015년 KT 롤스터에게 가장 잊지 못할 순간은 롤드컵 진출이 아닌가 싶어요. 2012년부터 2014년까지는 대표 선발전 과정에서 떨어지면서 아쉬움을 안고 있었잖아요.
A 그렇죠. 사실 서머 시즌 결승에 오른 것도 기억에 남지만 SK텔레콤 T1이라는 팀이 너무나 셌어요.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고요. 대표 선발전에서 결승에 직행한 것이 우리 팀에게 좋은 기회가 됐던 것 같아요. 스프링 시즌에 5위를 하면서 포인트를 벌었던 것도 긍정적으로 작용했죠.
Q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요.
A 한국 대표 선발전 결승에서 진에어 그린윙스와 4세트를 치를 때 '썸데이' 김찬호가 말파이트를 골라서 궁극기인 멈출 수 없는 힘을 3명에게 적중시켰을 때가 생각나네요. 그 때 해설진이 "롤드컵을 가겠다는 KT 롤스터의 멈출 수 없는 힘이네요"라고 설명해줬는데 마음에 탁 와닿더라고요. 사실 톱 라이너들이 말파이트를 고르지 않으려고 해요. 할 게 별로 없거든요. 화력이 센 것도 아니고 궁극기 잘 못 쓰면 욕만 엄청나게 먹고요. 하지만 김찬호가 진에어의 조합을 보더니 말파이트를 하겠다고 먼저 나서더라고요. 그것만으로도 고마웠는데 궁극기로 대박을 터뜨려주니 더 고마웠죠.
Q 스타크래프트 때부터 감독을 해오면서 선수들에게 고마움을 느꼈던 적이 많은가요.
A 셀 수 없이 많죠. 감독과 코치가 아무리 계획을 잘 세우더라도 선수들이 경기에서 보여주지 못하면 팀이 지잖아요. 다 선수들 공이죠. 개인적으로는 선수들이 희생정신을 보여줄 때가 제일 고마워요. 이영호가 팔 부상을 안고도 경기에서 투쟁심을 보여줄 때나 김찬호처럼 돋보일 수 없는 챔피언으로 플레이하면서도 묵묵히 제 몫을 해줄 때 정말 고맙죠.
Q 처음 나가본 롤드컵 이야기를 해볼까요. 적응하기가 어렵지는 않았나요.
A 외국 대회가 처음은 아니었어요. 미국에서 열린 MLG나 폴란드에서 열린 IEM 월드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경험이 있잖아요. 준비하기가 어렵지는 않았어요.
Q 특별히 신경 써서 준비한 부분이 있다면.
A 음식이죠. 한국 선수들이 외국에 나가면 매콤한 음식을 원하는데 컵라면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어요. 특히 롤드컵은 장기 레이스여서 엄청나게 챙겨갔죠. 전기 쿠커를 따로 가져가서 선수들이 원할 때마다 김치 찌개를 손수 끓여줬죠. 참치 김치 찌개를 많이 해줬고 가끔은 소시지를 넣고 부대 찌개를 끓이기도 했어요. 엄청 잘 먹였죠(웃음).
Q 특별한 에피소드도 있었나요.
A 선수들이 호텔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어요. 밖에 나가서 구경을 하려고 나섰는데 선수들 3명이 안 나오더라고요. 프랑스에서 묵었던 호텔이 미로처럼 복잡했는데 길을 잃었던 거죠. 엄청 찾았어요. 그 뒤로는 감독, 코치, 사무국이 선수들 2명씩 맡기로 했죠.
Q 16강에서 죽음의 조인 D조에서 1위를 했음에도 롤드컵 8강에 머문 것도 아쉬웠을 것 같아요.
A 사실 죽음의 조라고는 했지만 우리 팀의 실력이 떨어진다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아요. 중국 LGD 게이밍이 외국 경기에 나서본 적이 없었기에 우리와 비슷한 상황이라고 생각됐고 다른 팀들보다는 우리가 한 수 위라는 자신감이 있었어요.
Q KOO 타이거즈와의 8강전에서 의외의 패배를 당했다고 생각하나요.
A 이번 롤드컵에서 한국 팀에게만 지지 않으면 우승이라고 생각했어요. 결국 8강에서 KOO 타이거즈에게 덜미를 잡히긴 했지만 우리가 이겼다면 결승까지 갔을 거에요. 그렇게 된다면 SK텔레콤과도 제대로 한 판 붙어볼 수 있었는데 조금 아쉽네요.
◆다시 시작
Q 롤드컵이 끝난 이후 '나그네' 김상문, '피카부' 이종범이 팀을 떠났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A 이종범은 외국 팀에서 뛰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롤드컵에서 영어 인터뷰가 대박을 치고 나서 영어권에서 이종범을 원하는 팀이 많다는 소문이 돌았고 그 쪽으로 마음을 잡을 것 같더라고요. 김상문이 팀을 떠난 것은 속사정이 있어요. 서머 시즌과 롤드컵에서 김상문이 돋보이지는 않았지만 팀플레이를 정말 잘해줬다고 생각하는데 여론은 그렇게 보지 않나 보더라고요. 팀이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김상문에 대한 악성 댓글이 엄청났어요. 경기가 끝나고 나서 상문이가 그걸 보고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재계약을 하자고 사무국이 이야기했는데 선수 생활 자체를 힘들어 하는 것 같더라고요. 무조건 쉬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다른 팀 미드 라이너들처럼 화려하진 않더라도 우리 팀 스타일에 잘 맞춰주는 선수였는데 안타까웠어요.
Q 김찬호, 고동빈, 노동현도 여러 팀에서 제안이 왔을 것 같은데요.
A 외국 팀에서 오퍼가 많이 왔죠. 큰 돈을 주겠다, 이적료를 후하게 쳐주겠다는 팀이 있었어요. 그래도 남아줘서 정말 고마워요. 사실 한국 선수들이 외국에 가면 정말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어요. 김찬호, 고동빈, 노동현도 마찬가지인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KT 롤스터에 남아서 더 많은 것을 이뤄보겠다고 결정해준 선수들에게 고맙죠. 팀에 대한 애정이 있고 동료들에게 대한 믿음이 있는 선수들이라고 생각해요. KT에서도 선수들이 그동안에 이룬 성과, 팀에 대한 기여도 등을 인정해서 1억 이상의 연봉을 챙겨줬어요.
Q '플라이' 송용준, '이그나' 이동근을 영입했습니다. 알차게 전력 보강을 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습니다.
A 송용준은 진에어 시절에 잠재력이 있는 선수라는 평가가 많았어요. 잘 키우면 차세대 한국을 대표하는 미드 라이너가 될 것이라고 했죠. 하지만 2015 시즌 중국으로 넘어갔고 공식전에 거의 뛰지 못했어요.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영입했죠. 이동근의 실력은 이미 롱주IM에서 뛴 서머 시즌에 다들 보셨을 거에요. 유럽으로 가려고 했지만 한국에서 더 활동해보고 싶다고 해서 영입했죠. 이 선수들도 중국, 유럽으로 갔다면 한국에서 뛸 때보다 연봉을 더 받을 수 있었지만 우리 팀에서 뛰고 싶다면서 찾아왔죠.
Q 이지훈이 SK텔레콤을 나오면서 KT에서 잡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돈 적도 있습니다.
A 이지훈에 대해서도 영입 의사가 없었던 것은 아니에요. 타진을 하고 있었는데 외국팀에서 수억 원을 부르면서 이미 몸값이 엄청나게 높아진 상황이었어요. 이지훈 한 명을 높은 값에 영입하느니 그동안 KT에서 함께 뛰면서 고생한 선수들에 대한 대우를 높여주는 것이 2016년을 위해 낫다고 판단했죠.
Q 2016 시즌에 세워 놓은 목표나 팀 운영 방안이 있다면.
A 아직 모든 팀들의 라인업이 밝혀지지는 않았습니다. CJ 엔투스나 롱주IM처럼 리빌딩 중인 팀들이 많아요. 그들의 전력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KT는 3강 안에 드는 팀이라는 인식을 확실히 심어주고 싶어요. 또 2016년에는 독기를 품은 팀이라고 평가를 받고 싶네요. 2015년에는 독기를 품을 힘도 없었던 것이 사실이에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2015년에는 좋다, 좋다, 잘하고 있다라면서 선수들이 지치지 않도록 끌고 갔지만 2016년에는 선수들의 잠재력을 독하게 터뜨리고 싶어요. 고동빈이 정글러로서 임무를 완벽히 숙지했고 김찬호의 개인 능력은 아직 더 발휘될 여지가 있거든요. 노동현의 피지컬 능력 또한 한국에서 정상급인 원거리 딜러고요. 송용준, 이동근의 잠재력이 더해진다면 KT는 독하게 이기는 팀이 될 것입니다.
남윤성 기자 (thenam@dailyesport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