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VP LoL팀의 서포터 '맥스' 정종빈에게 1년이라는 시간은 신생아가 성장하는 시간에 비견할 만하다. 선배들의 뒤꽁무니를 좇던 CJ 엔투스의 새내기는 바다 건너에 잠시 다녀 오더니 이젠 어딘 내놔도 손색없는 의연한 선배가 됐다. 새로 프로에 발을 디딘 MVP 동료들을 상대로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이름을 드높일 수 있는 대회가 더 생겼으면 좋겠다"라는 의견을 내놓을 정도로 생각이 깊어졌다.
1년 3개월 동안 정종빈은 극과 극을 체험했다. 챔피언스 코리아(이하 챔피언스)의 입문자였고 한 세트 출전을 위해 무수한 밤을 샜다. 외국 대회에서는 이방인이었고 외로움을 홀로 감내해야 했으며 챌린저스 코리아(이하 챌린저스)로 돌아와서는 팀을 이끌어가는 리더의 엯할을 해내고 있다.
다양한 리그에서 여러 역할을 소화해 온 정종빈은 무엇을 배웠고 경험들은 그를 어떤 맛이 나는 프로게이머로 숙성시켰을까.
◆'CJ에서 조금 더 잘했더라면'
정종빈에게 있어 CJ 엔투스 시절은 얻은 게 많은 만큼 아쉬움도 많은 시간이었다. 팀에 합류하며 야심차게 프로 생활을 시작했지만 원하던 성과를 내지 못했기 때문. CJ 엔투스에 입단했을 때 느꼈던 만족감이 독이 됐다고 표현했다.
"입단했을 때 더없이 만족스러웠어요. 그런데 그 만족이 독이 됐던 것 같네요. 입단한 후에 더 열심히 해야 하는데 들어갔다는 사실 자체로 만족해서 안일했고 소홀히 했던 것 같아요."
정종빈은 CJ 엔투스에서 6번 출전했으나 전패했다. 그 때 남은 1승에 대한 미련은 아직도 꿈에 나온다고. 가장 기억나는 건 챔피언스 스프링 2015 프리시즌 진에어 그린윙스와의 대결이었다.
"급작스러웠죠. 경기장으로 출발하기 전까지도 나간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어요. 이전부터 '헬퍼' 권영재랑 '트릭' 김강윤과 함께 데뷔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경기장에 도착하니 경기에 나설 준비를 하라고 오더가 떨어졌어요. 준비가 부족했어요. 바로 호흡을 맞추는 바람에 더 당황했죠.
이루지 못한 1승은 아쉬움으로 남았지만 얻은 것은 분명했다. 대선배들에게서 조언을 들었고 숙소 생활이라는 경험은 프로게이머를 지속하는데 큰 힘이 됐다. 홀로 게임을 하는 경우가 많는 지망생들에게 숙소 경험은 큰 힘이 될 거라고.
"숙소 생활을 하면서 인간 관계에 대해서 뭔가 깨달았어요. 게이머라는 직업은 집에서 혼자 뭔가를 하잖아요. 그런데 프로게임단에 들어오고 나서 합숙하게 되면 그 때는 반드시 소통을 해야 해요. 제가 필요한 것을 이야기해야 남들이 알아주고 남들이 하는 이야기를 잘 들어야 적응도 빨라지죠. "
CJ 엔투스의 서포터는 1세대 프로게이머인 '매드라이프' 홍민기. 레전드 선수와 함께 지내면서 보고 들은 것들은 모두 뼈가 되고 살이 됐다. 정종빈에게 선배들이 조언을 많이 해줬냐 묻자 역시 홍민기의 이름이 가장 먼저 나왔다.
"홍민기 선배가 조언을 많이 해줬죠. 실수한 점을 잘 짚어주더라고요. '고스트' 장용준과 같이 물어본 기억이 나요. 스킬 샷이 빗나가면 다 알려주시고 '이럴 때는 이렇게 판단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조언도 아끼지 않으셨죠. 저도 알고 있는 내용이 있으면 같이 알려주면서 공유를 많이 했지만 제가 더 많이 배웠죠."
◆소통의 한계를 느낀 가시 베어스 생활
CJ 엔투스에서의 생활도 좋았지만 안주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새로운 도전을 갈구했고 경쟁력을 갖고 싶었다. 해외로 눈을 돌렸다. 보다 기량을 펼칠 수 있는 곳을 원했기에 대만 마스터즈 시리즈의 가시 베어스(Gash Bears)를 선택했다.
CJ에서 나온 뒤 급하게 고른 팀이었기에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선수 생활을 계속할 수 있고 외국의 문물도 배울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급하게 선택한 해외 진출은 삐걱거렸다. 의사소통이 안 되니 연습부터 여가 생활까지 제한이 생겼다. 정종빈은 해외 생활을 하면서 "영어의 필요성을 많이 느꼈다"고 말했다.
"의사소통 문제가 가장 컸어요. 숙소와 연습실의 거리가 멀었는데 길을 모르니까 대만 동료들이 집에 갈 때 같이 가야해서 연습을 더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어요. 종종 연습실에서 밤을 샐 때도 있었는데 나를 제외한 모든 선수가 흡연을 해서 고통스럽기도 했죠(웃음)."
관광은 고사하고 여가를 즐길 시간도 없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연습실 건물 안에 있는 피트니스 클럽에서 운동을 하는 게 고작이었다고. 그렇게 연습과 경기에 매달렸지만 성적이 좋진 않았다. 의사 '불통'은 경기력에도 영향을 미쳤고, 가시 베어스는 승강전에서 탈락했다.
"가령 모르가나 서포터를 할 때에 '막아줄 수 있다'고 말하고 싶은데 그런 대화가 안 됐어요. 상대 팀에 리산드라 같은 챔피언이 있을 때도 E스킬 얼음갈퀴 길을 깔고 들어올 때는 거리를 주라고 말해야 하는데 말이 안 통하니까 해줄 수가 없더라고요."
승강전에서 탈락한 뒤 가시 베어스는 정종빈에게 남아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정종빈은 7개월 동안 대회가 없다는 사실에 과감하게 팀을 떠났다. 새 팀을 찾아 나선 정종빈은 누군가로부터 귓속말을 받았다.
◆MVP를 한국 최정상으로 만들겠다
MVP의 정글러 '비욘드' 김규석으로부터 '서포터 자리가 빌 것 같은데 생각이 있냐'고 연락이 왔다. 정종빈은 망설였다. 외국 팀에서 다시 제안이 온 상태였기에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 때 발목을 잡은 건 의사소통 문제였다. 준비없이 다시 해외로 진출하는 실수를 번복하고 싶지 않았다.
"당시 페인 게이밍 등 여러 팀에서 제안이 온 상태라 고민했어요. 그런데 가시 베어스에서 느꼈던 소통 문제가 떠올랐고 한국행을 선택했죠. 소통이 안 되는 해외에서 한국으로 오니까 좋더라고요(웃음). 아마 가시 베어스를 겪지 않은 상태였다면 MVP가 아닌 또 다른 외국팀으로 이적했을 것 같아요."
챔피언스가 아닌 챌린저스에서 리그를 뛰고 있지만 불만은 없다. 오히려 초심을 찾은 기분이다. 장난기 넘치는 MVP의 분위기는 마음에 쏙 들었다. 정종빈은 MVP에서의 생활이 즐겁고 재밌다고 말했다.
"MVP에 처음 합류했을 때 분위기가 참 좋은 팀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서로 엉덩이를 때리고 다니면서 친하게 지내더라고요(웃음). 그런 분위기가 나하고도 잘 맞았던 것 같아요. 적응력이 좋은 편이라 CJ 엔투스에서만큼 지금도 재밌게 활동하고 있죠."
사람은 선 위치에 따라 시야가 달라진다고 했다. 새내기가 아닌 베테랑으로 팀에 합류하니 보이는 것들이 달라졌다. 동료들의 실수와 바로 잡아야 할 점, 필요한 조언들이 눈에 띄었다. 동료들에 대한 성향과 기량에 대해 완벽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김규석과 원거리 딜러 '마하' 오현식은 A급 이상의 선수라고 생각해요. 톱 라이너 '애드' 강건모와 미드 라이너 '이안' 안준형 또한 가능성이 충분하죠. 두 선수는 경기 안에서 성장했을 때 교전을 압도적으로 끌고 가는 경기력을 보여줍니다. 이번 챌린저스에선 그 모습이 나오지 않앗지만 조만간 보여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조언도 아끼지 않는다. 경험이 부족한 선수들에게 선배의 도움은 한 줄기 빛과 같다. 특히 챔피언스와 해외 경험이 두루 있는 정종빈의 경우는 더 특별하다.
"아는 선에선 무조건 다 알려줘요. 그래야 팀이 성장할 수 있거든요. 아직은 동료들이 대회에서 긴장을 많이 해서 긴장 풀라고 농담을 많이 하면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고 있어요. 외국 진출에 대해서는 말리고 싶네요. 외롭고 많이 힘들더라고요. 차라리 한국 팀에 남아서 더 열심히 하는 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정종빈이 생각하는 현재 MVP 전력은 챌린저스 1위다. 챔피언스에 견줘 봐도 7~8위는 노려볼 수 있다는 생각이다. 정종빈은 올해는 승강전을 통과를, 내년엔 챔피언스 3~4위를 목표로 삼고 있다.
"MVP의 현재 전력은 챌린저스 1위입니다. 주관적으로도, 객관적으로도 1위에요(웃음). 호흡을 맞춘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다른 팀보다 성적도 잘 나오고 있는 걸 보면 맞는 것 같아요. 성장 속도도 빠르죠. 처음엔 조언을 많이 해주면서 플레이했는데 이제 개개인의 생각들도 나오니까 선택지가 많아졌고 그러다보니 시너지 효과도 점점 나오고 있어요."
정종빈은 챌린저스 리그의 오프라인 경기나 인큐베이팅 시스템에 대해서도 의견을 내놓았다. 긍정적이라는 반응이었지만 보다 대회가 늘어났으면 좋겠다는 소망도 얘기했다.
"오프라인 대회는 선수들에게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요. 신인 선수들이 공식 경기를 치르고 인터뷰를 경험할 수 있다는 건 메리트죠. 숙소 제공 또한 긍정적이죠. 보이스 채팅으로만 연습하는 것보다 옆에서 같이 생활하며 플레이하는 것의 차이는 엄청나게 큽니다. 챌린저스급은 아니더라도 대회가 하나쯤은 더 생겼으면 하는 바람이 있죠. 그래야 팀과 선수들이 이름을 더 드높일 수 있으니까요."
인터뷰를 마칠 때가 되니 '참 사람을 좋아하고, 배려가 많은 사람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묻자 추운 날씨에 응원하러 오는 팬들을 걱정하면서도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았으니까.
더욱이 생각나는 건 나중에 날라 온 그의 문자였다. 기사에 한 문장을 더 실어달라는 것이었는데 과거 CJ 엔투스 동료들과의 약속이었다.
"'트릭' (김)강윤이형, '헬퍼' (권)영재형, 강현종 감독님, 정제승, 손대영 코치님이랑 약속을 했어요. 서로 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하고 리그가 끝난 후 여유가 있을 때 일산 부대찌개 집에서 만나기로 했죠. 그 때 CJ 엔투스 1팀 형들도 와줬으면 좋겠네요."
이윤지 기자 (ingji@dailyesport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