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승찬은 자신의 프로게이머 인생을 용기와 자신감으로 개척해 갔다. 잘 나가던 선수에서 갑작스러운 코치 변신 그리고 또다시 선수로 복귀한 하승찬의 행보는 거침 없었다. 또한 누구도 걷지 않았던 길이다.
KT 롤스터 애로우 소속으로 리그 오브 레전드 챔피언스 코리아(이하 롤챔스) 2014 서머에서 우승을 차지한 하승찬은 돌연 휴식을 선언했다. 이후 코치라는 뜻을 발견해 레블즈 아나키와 함께 했다. 다시 선수로 복귀할 때도 망설임은 없었다. 롤챔스 무대에서 다시 기량을 뽐낼 자신이 있었고 실제로 KT 롤스터를 1라운드 2위로 올려놓는 공을 세웠다.
하승찬은 더 넓은 미래까지 꿈꾸고 있다. 해커를 하고 싶다는 그의 말을 듣자니 묘한 존경심까지 들었다. 하승찬이 프로게이머로 데뷔한 뒤 그려왔던 지도와 앞으로 그려나갈 새로운 길에 대해 함께 들어보자.
◆우승 후 돌연 은퇴 "쉬고 싶었다"
롤챔스 2014 서머에서 KT 롤스터 애로우가 우승을 차지했을 때 하승찬은 당시 21게임에 나와 3.80의 KDA를 기록하며 맹활약했다. 승승장구할 수 있는 시기였지만 하승찬은 쉬고 싶다며 팬들을 충격에 빠트렸다. 우승 후 선수 생활을 그만하겠다고 선택하는 선수는 많지 않기 때문이다.
"좀 쉬고 싶었어요. 롤챔스에서 우승하고 난 뒤 쉬고 싶은 마음이 더 강하더라고요. 아마추어 때부터 게임만 하고 살다보니 지친 상태였어요. 우승까지 하고 나니 좋은 성적에 대한 아쉬움이 안 남더라고요. 그만큼 힘들었던 것 같아요."
그에게 휴식은 집에서 쉬고, 영화를 보고, 친구를 만나는 것이 아니었다. 게임을 하는 것보다 보는 것을 좋아한다는 하승찬은 아마추어팀인 레블즈 아나키(이하 아나키)의 코치행을 선택했다. 제의가 온 것도 아니었다. 스스로 정글러 '리라' 남태유에게 연락했다. 재밌어보여서 시작하게 됐다는 코치직은 그에게 좋은 휴식이 됐다.
"다듬어지지 않은 아마추어 선수들과 같이 활동해보면 재밌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제가 먼저 아나키 쪽에 코치를 제의했었죠. 제가 게임에 대해 알고 있는 것도 많고, 평소에 게임할 때도 알려주면서 오더를 내리는 스타일이라 코치직도 어울릴 거라 생각했어요. 게다가 프로 경험이 없는 아마추어 선수들이었기 때문에 더 잘 가르칠 자신이 있었죠."
하승찬은 아나키에 대해 '재밌는 팀'이었다고 회상했다. 본인도 코치라는 입장보단 게임을 알려주는 친구같은 역할이었다고. 그래도 건성으로 임할 생각은 없었다. 하승찬은 아나키의 기본기를 가다듬으며 팀을 성장시켰다.
"기본을 다듬는 데 집중했어요. 제 경험을 토대로 알려줬죠. 아마추어팀이다보니 게임 내의 기본적인 라인 관리부터 선택과 금지 과정에 대한 전략, 연습하는 방법 등의 체계가 갖춰져 있지 않더라고요."
경기 부스 안에서 경기에 참여하는 것과 경기 부스 밖에서 경기를 지켜보는 것은 차이가 컸다. 때때로 직접 플레이를 하고 싶을 정도로 답답한 마음도 들었다. 그리고 그 때의 경험은 선수로 복귀하는 자신감을 주기도 했다.
"솔직히 말해서 많이 답답했어요(웃음). 특히 바로 전까지 선수 생활을 했기 때문인지 내가 선수였다면 더 잘했을 것 같다는 생각도 종종 들더라고요. 알려준 것을 고치지 않거나 그대로 행하지 않을 때 가장 힘들었던 것 같아요."
코치라는 이름으로 보낸 휴식 같지 않은 1년 간의 휴식 덕에 하승찬은 코칭 스태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KT 롤스터(이하 KT)에 복귀하고 나서 좀 더 '순한' 선수가 된 것도 그 이유다.
"코치를 해보고 나니 코칭스태프의 마음을 이해하게 됐어요. 선수는 자기 것만 신경쓰면 되는데 코칭 스태프는 선수의 모든 걸 조율해야 하잖아요. 그런 마음을 알게 알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좀 많이 순해진 것 같아요(웃음). "
◆ '코치'라는 대륙을 발견하고 회항한 친정팀
코치를 하면서 하승찬은 다시 선수 생활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되돌아와도 늦을 것 같지 않았다. 하승찬은 다시 경기에 뛰어도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 하나로 KT 복귀를 선택했다. 이 때도 먼저 용기를 낸 건 하승찬이었다. KT에 먼저 연락을 했고, 원래 한 팀이었던 듯 자연스럽게 합류했다.
"코치를 하면서 경기를 지켜보니 '저 정도는 나도 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복귀하고 싶다고 먼저 KT에 연락을 드렸어요. 좀 기다리라고 한 후에 오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바로 합류해서 연습을 시작했어요. 원래 있던 사람인 것처럼 어색함은 없었어요."
1년 만에 참여한 롤챔스도 친정팀만큼이나 편안했다. 자신의 1라운드 성적에 대해 "1년 만에 복귀한 것 치곤 나름 괜찮았던 것 같다"고 자평한 하승찬은 긴장도, 어려움도 없었다고 했다. 넘치는 자신감에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1년 만에 롤챔스에 선수로 참여했지만 이전과 크게 다른 점을 느끼진 못했어요. 별로 어려울 것도 없었고요. 리그 오브 레전드에서 서포터가 하는 챔피언이나 역할은 항상 비슷한 것 같아요. 그리고 이전부터 해 놓은게 많아서 쉽게 적응할 수 있었죠.
1년 동안 하승찬과 KT엔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하승찬은 코치라는 경험을 겪으며 한 층 더 성장했고, KT는 형제팀이 통합되면서 로스터가 바뀌었다. '스코어' 고동빈, '플라이' 송용준과 처음 맞춰본 호흡에 하승찬은 만족스럽다는 답변을 내놓았다.
"잘 맞는 편이예요. '스코어' 고동빈이 팀을 잘 이끌어주고 있고, '플라이' 송용준은 라인전에서 강하기 때문에 호흡 맞추는 것에는 문제가 없어요. 서로 원하는 플레이를 어느 정도 할 수 있는 경지는 도달한 것 같아요."
'코치의 눈'은 친정팀 KT도 꿰뚫어 봤다. 하승찬은 KT에 대해 평가해달라는 질문에 "기복이 있는 팀"이라 대답했다. 이것이 장점이 되기도, 단점이 되기도 한다고. 확실한 건 KT가 해결해나가야 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하승찬은 선수 개개인에 대한 평가도 아끼지 않았다. 선수들의 장단점을 읽는 능력은 코칭스태프 이상이었다.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선수인지 코칭스태프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하승찬의 눈은 매서웠다.
"'애로우' 노동현은 제가 못 보는 킬각이나 갱각을 날카롭게 잘 봐요. 단점이라면 오더하면 진다는 거죠. 이상한 오더를 많이 해서 동료들이 하지 말라고 얘기해요. '스코어' 고동빈은 부족한 것 없이 잘 해주고 있어요. 딱히 단점은 없는 것 같아요. '플라이' 송용준은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면 자신감있게 잘 하는데 다른 거 할 때 너무 멍 때리는 게 단점이예요. '썸데이' 김찬호는 브루저를 다룰 때만큼은 최고인 것 같아요. 하지만 캐리형 챔피언을 할 때 불안한 모습을 보이곤 해요. 이 부분을 보완하면 좋을 것 같아요. '이그나' 이동근은 피지컬도 뛰어나고 게임을 잘 해요. 말수가 적은 친구라 많이 친해지지 못한 게 아쉬워요."
◆ "롤드컵에 못 가면 은퇴할 생각"
롤챔스 1라운드에서 레블즈 아나키의 현신인 아프리카 프릭스를 만났을 땐 감회가 새로웠다. 물론 선수 개개인의 성향을 알다보니 경기를 풀어 나가는데 수월했다. 덕분에 '미키' 손영민의 볼멘소리를 듣기도 했다고.
"아프리카 프릭스와의 경기는 재미있었어요. '내가 가르쳤던 선수들한테 질 수 없다'는 생각으로 더 열심히 했죠. 경기 내내 '미키' 손영민을 저격하는 챔피언 금지했었는데 끝나고 손영민이 다른 팀들도 똑같이 따라서 저격한다고 구박을 좀 하더라고요. 아프리카 선수들의 특성을 아니까 상대하기가 수월했어요. 여기선 이렇게 하겠구나하는 게 눈에 보였죠."
KT가 1라운드에서 2위를 기록할 수 있었던 배경은 연습량과 노력이었다. 다만 진에어 그린윙스와의 경기는 아쉬움으로 남았다. 하승찬은 당시 자신의 실수로 교체됐던 뼈아픈 기억을 떠올리며 "2라운드에선 압박하면서 빠르게 끝내버릴 생각"이라고 말했다.
"2라운드에서는 당연히 1등 해야죠. 연습도 잘 되고 있고, 충분히 가능성이 있을 것 같아요. 물론 우리가 잘해야 하기도 하지만 락스가 좀만 못 해주면 1등도 가능할 것 같아요(웃음)."
월드 챔피언십에 대한 의욕은 누구보다 넘쳤다. KT가 창단 처음으로 리그 오브 레전드 월드 챔피언십(이하 롤드컵) 2015에 진출했을때 하승찬은 팀에 없었다. 아직 롤드컵 진출이 없는만큼 "롤드컵에 진출하지 못하면 은퇴할 생각"이라는 다짐을 밝혔다.
"무조건 롤드컵이예요. 한 번은 가봐야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롤드컵에 진출하면 NRG e스포츠와 붙어보고 싶어요. 선수로 복귀하기 전에 NRG e스포츠 코치로 갈 기회가 있었는데 영어가 부족하다보니 테스트에서 떨어졌어요. 그래서 제 존재감을 보여주고 싶기도 하고, 친한 '갱맘' 이창석이 있으니 한 번 붙어보고 싶어요."
문득 궁금해졌다. 자신의 인생을 적극적으로 개척하는 하승찬은 좀 더 먼 미래에 어떤 길을 걷고 있을까. 다시 코치로 돌아가진 않을까 물어본 질문에 돌아온 건 '해커'라는 뜻밖의 대답이었다.
"코치 자리가 있어서 코치를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안 된다면 다른 꿈도 갖고 있어요. '해커'가 하고 싶어요. 보안 프로그램쪽으로 공부하고 싶어요."
프로게이머에서 코치로, 다시 프로게이머로 돌아온 뒤 미래에는 해커가 되고 싶다는 하승찬. 종종 현실에 안주하고 싶은 사람들이 이 인터뷰를 들여다 본다면 도전에 대한 자신감이 생기지 않을까. 자신감과 용기를 갖고 자신의 뜻을 찾아 항해하는 하승찬의 바람은 사람을 움직이는 좋은 동력이 될 것이다.
이윤지 기자 (ingji@dailyesport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