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만약 솔로 랭크라면, 당신이 지고 있는 팀이라면 어떤 선택을 내리겠는가. 20분 서렌인가, 넥서스가 터질 때까지 끝까지 버티는가.
이런 경기가 또 있을까 싶다. LCK에서도 명승부들이 종종 연출되곤 하지만 글로벌 골드 1만 차이를 뒤집고 역전하는 경기는 손에 꼽는다. 최근 있었던 LSPL 결승에서 말도 안되는 역전승이 나왔다. EDE가 YM을 상대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고 LPL행 티켓을 손에 넣은 것.
EDE는 중국 명문 에드워드 게이밍(EDG)의 2부 리그 팀이다. 한국 선수인 '배미' 강양현과 '로드' 윤한길이 뛰고 있는 팀이기도 하다. 하지만 손대영 코치가 EDE를 이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한국 LoL팬은 극소수다. 손대영 코치 본인이 팀에 자신의 영입을 알리지 말아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분명했다. CJ 엔투스에 몸담고 있던 시절 손대영 코치는 국내 팀 코칭 스태프 중 가장 많은 욕을 먹었던 코치다. 국내 최고 인기 팀 팬들은 한 번의 실수나 패배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리고 패배의 화살은 감독과 코치에게 돌아오기 일쑤였다.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신생팀과 다름없는 EDE를 맡았고, 결국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3개월 만에 2부 리그의 평범한 팀이었던 EDE를 1부 리그로 끌어올리고 금의환향한 손대영 코치를 만났다.
◆중국 밖에 없었다
"CJ를 나오는 선택을 한 것은 잘한 것 같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긴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후회는 없다."
CJ 엔투스가 대대적인 리빌딩을 감행하자 손대영 코치는 스스토 팀을 떠나는 것을 선택했다. 손대영 코치가 팀을 나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중국에서 7팀, 유럽에서 3팀, 브라질에서 1팀이 영입에 발벗고 나섰다. 아주부 시절, LCK 초창 기부터 선수들을 지도해왔던 노하우, CJ라는 명문팀을 이끌었던 커리어 덕분이다. 오랜 고민 끝에 손대영 코치가 택한 팀은 EDG다.
큰 액수를 부르며 베팅한 팀들을 마다하고 손대영 코치가 EDG를 택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손대영 코치는 예전부터 ' 폰' 허원석, '데프트' 김혁규를 눈여겨 보고 있었다. 비록 다른 팀에 속한 선수들이지만 언젠가 이들을 지도하며 팀을 이끌어보고 싶었다.
EDG가 내민 손을 잡고 중국으로 넘어간 손대영 코치, 하지만 처음부터 마음대로 되진 않았다. EDG의 구단주가 손대영 코치에게 EDE를 맡아달라고 부탁한 것. EDG 구단주 '에드워드'에게는 EDE를 이끌어줄 선장이 필요했다.
"EDG에서 '폰', '데프트'를 데리고 게임을 해보고 싶다고 솔직하게 얘기를 했다. 하지만 EDE를 LPL로 올려주면 안되겠냐고 부탁을 하더라. 수락을 하고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하지만 팀에는 발표를 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창피했거든."
중국에 가서 2부 리그에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네가 못해서 2부 리그 밖에 못갔지'라는 식의 말을 듣는 게 두려웠다. 한 때 팀원으로 데리고 있던 '빠른별' 정민성이 EDG 코치라는 점에서 자존심도 상했다. 그래서 손대영 코치는 EDE를 우승시킨 다음,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고 나서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무섭게 따라붙는 중국
분위기가 다소 무겁다. 그래서 잠시 분위기 전환겸 중국의 LoL e스포츠 시장은 어떤지 물었다. 한국에서 4년 동안 지도자 생활을 했던 손대영 코치가 중국에 있었던 기간은 4개월 정도다. 하지만 그 4개월 동안 손대영 코치는 한국과는 확연히 다른 중국 LoL 시장 분위기를 몸소 느꼈다.
"중국은 선수들이 게임에만 전념할 수 있는 시스템이 구축돼 있다. 감독, 코치 뿐만 아니라 운전 기사, 숙소에서 빨래 , 청소, 음식을 해주는 이모님들도 다 따로 있다. 심지어 연습 시간이 되면 매니저가 각 선수들 자리에 로그인까지 해 놓는다. 선수는 밥을 먹고 자리에 앉아 시작 버튼만 누르면 되는 것이다."
또 중국은 분석가가 따로 있다. 상대팀 선수들의 KDA나, 챔피언 픽률 등을 항상 체크하며 코치와 함께 작전을 짠다. 한국이 e스포츠 종주국으로 불리고, 체계화된 시스템을 갖춘 e스포츠 선진국이지만 벌써 중국도 이만큼이나 따라왔다. 사실 놀랄 일도 아니다. 중국 팀들이 LoL e스포츠에 어마어마하게 투자를 하고 있는 사실은 e스포츠 팬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으니 말이다.
"EDG는 선수들에게 투자도 많이 하지만 구단주의 애정도 남다르다. 구단주는 서울의 구 하나 정도의 땅을 갖고 있는 엄청난 부자다. 그런 사람이 EDG 성적이 좋지 않으면 하던 일을 멈추고 게이밍 하우스로 달려온다. 그리고 같이 스크림을 보면서 회의를 한다. 또 중요한 경기는 빼놓지 않고 직관을 한다. 어느 구단주가 그렇게 하겠나. 그런 걸 보면서 투자 뿐만 아니라 애정도 상당하다는 걸 느꼈다."
다만 중국으로 건너간 여느 한국 선수나 코치들처럼, 손대영 코치도 중국 음식에 정을 붙이는 데는 실패했다. 4개월 새 살도 10Kg이나 빠졌다.
"중국 음식은 맛이 오묘하다. 그래서 숙소 주변 한국 식당에서 시켜먹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EDG는 다른 팀들에 비해 그나마 낫다. 게이밍 하우스 식당에서 무조건 한국 반찬을 2개씩 해준다. 나는 살이 빠졌지만 (정)민성이는 살이 쪘다 (웃음)."
◆위기, 극복 그리고 우승
손대영 코치가 EDE에 부임하고 나서 첫 경기는 패배했다. 두 번째 경기는 이겼지만 내리 2연패를 당하면서 1승3패를 기록했다. 선수들에게도 인정을 받지 못했다. EDE 선수들에게 손대영 코치는 단지 중국인 보다 게임에 대해 잘 아는 한국인, 딱 그 정도였다. 중국에서의 시작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처음에는 솔직히 리그 수준을 무시했다. LPL에서도 2부 리그인데 한국식으로 밴픽을 하면 다 이기지 않겠냐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 일단 팀원들이 한국식 밴픽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리그의 경기 스타일도 한국과는 너무나 달랐다. 가자마자 한국에 돌아올 생각까지 들더라. 진짜 짐까지 쌌다."
하지만 패배는 승리의 어머니라고 했던가. 패배를 거치면서 손대영 코치는 EDE 선수들의 스타일을 파악했다. 팀 조합에 CC가 많을수록 대규모 전투에서 승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EDE는 팀 단위 전투에서 강한 면모를 보였다. 그래서 CC가 많은 조합을 하면서 승률을 높여가기 시작했다.
선수들을 지도하는 과정은 녹록치 않았다. 대부분 '중국 선수들은 코치들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라고 알려져 있는데, 진짜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연습을 하지 않겠다고 버티는 선수도 많다. 일단 구단 측에서 코칭 스태프 보다는 선수를 더 중히 여기는 중국 스타일 탓이다. 그래서 손대영 코치는 경쟁 체제를 만들었다.
"중국 선수들이 가장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게 있다. '내가 없으면 이 팀이 돌아가지 않는다'라고 생각한다. 중국은 선수들이 사장과도 친구를 먹는다. 위쪽과 친분이 두텁다보니 자기를 내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강하고, 그러면서 자기 내키는대로 하는 거다. 그래서 나는 '안하겠다'라고 말하는 선수에게 '하지마'라고 했다(웃음)."
원거리 딜러를 맡고 있는 '진쟈오'였다. 하지 않겠다고 강짜를 부리는 '진쟈오'에게 손대영 코치는 보란 듯 다른 선수를 찾아서 그 자리에 앉혔다. 그랬더니 잘못했다고 고개를 숙이는 게 아닌가. '진쟈오'는 실력이 늘지 않자 스스로에게 화가 났던 거다. '드레이븐 장인'으로 불렸던 '진쟈오'지만, 그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손대영 코치는 일단 '진쟈오'에게 멀리서도 CS를 챙길 수 있는 이즈리얼, 코르키만 연습하게 했다. 그리고는 궁극기만 잘 써줘도 1인분을 하는 미스 포츈을 시켰다. 그러면서 '진쟈오'는 MVP까지 타면서 자신감까지 생겼다. 그 이후부터는 루시안, 칼리스타까지 챔피언 폭을 넓혔다.
"불안한 라인은 무조건 백업을 뒀다. 그랬더니 기존에 있던 선수도 실력이 오르더라. 선수들에게는 누가 더 잘해서 선발로 기용하는 게 아니라 상대팀을 보고 라인업을 짜는 거라고 얘기했다. EDE 정글러는 한 명은 공격적, 다른 한 명은 수비적인 스타일인데 두 선수 모두 이번 시즌 굉장한 활약을 해줬다."
손대영 코치는 선수들에게 하나 하나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한국식으로. 또 EDE가 이길 수 있는 조합을 상당히 많이 찾아냈다. 그랬더니 스크림 승률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대회에서 연승을 이어간 것은 물론이다.
팀에서 손대영 코치를 바라보는 눈빛도 달라졌다. 구단주를 비롯해 경영진이 선수들에게 '무조건 저 사람(손대영)만 믿고 하면 이길 수 있다'고 말한 것은 물론 선수들도 손대영 코치를 믿고 따랐다. 손대영 코치도 믿음을 받자 더 열심히 했다.
1승3패라는 초라한 성적은 어느새 25승5패, 리그 1위가 돼 있었다. 또 EDE는 이번 시즌 'LSPL 최초 16연승'이라는 전무한 업적까지 쌓았다.
◆오뚝이 정신으로 따낸 LPL행 티켓
LSPL 1위를 따내고 포스트 시즌 결승에서 만난 팀은 YM.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는 'PDD' 리우 모우가 구단주로 있는 팀이다. 출발은 순조로웠다. 내리 두 세트를 따내면서 LPL행 티켓이 눈 앞에 왔다. 하지만 YM도 결승에 올라온 만큼 저력이 있는 팀. 2대0으로 앞서고 있던 스코어는 금세 2대2가 됐다.
"1세트를 지니까 'PDD'가 직접 밴픽을 하더라. 그래서 기도했다. '샤이'야, 형을 도와다오(웃음)."
5세트 전황은 상당히 불리했다. YM은 기세를 타고 있었고, EDE는 벼랑 끝에 몰렸다. 심리적으로도 YM이 우세한데, 경기가 초반부터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YM이 초반부터 탑 라인을 후벼파면서 격차를 계속 벌린 것이다. 팀의 에이스 '어메이징J'가 집중 공략 당하면서 EDE는 처음부터 힘들게 경기를 풀어나갔다. 문득 손대영 코치의 머리 속에는 아주부, CJ 시절 겪었던 '승승패패패'의 악몽이 떠올랐다.
"결승전만 가면 이렇게 무기력하게 지나, 내가 재수가 없나,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솔직히 경기를 보면서 이기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더 컸다."
그럴만도 한 게, EDE는 경기 내내 YM에게 끌려다녔다. 글로벌 골드는 항상 7000 이상으로 뒤쳐져 있었고, YM은 좀처럼 틈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EDE는 포기하지 않았다. 조금씩 조금씩 버티면서 레벨과 아이템 격차를 좁혀나갔다. 그리고 대규모 전투에서 이득을 보면서 따라붙기 시작했다.
그러다 기회가 왔다. '배미' 강양현의 라이즈가 바론을 치던 상대에게 뛰어들어 엘리스를 끊어냈다. 그리고 다른 선수 들의 백업이 이뤄지면서 에이스를 띄우고 바론을 챙겼다. 상황을 엇비슷하게 만든 EDE는 48분경 YM의 정글러 엘리스를 끊어내고 바론을 챙기면서 억제기 2개를 파괴했다.
그리고 상대 정글에서 펼쳐진 마지막 전투. EDE의 서포터인 탐 켄치가 YM 5명에게 얻어맞았지만 살아나왔고, 곧바로 라이즈, 그레이브즈, 시비르의 공격이 불을 뿜었다. 순식간에 에이스가 떴다. 선수들은 물론 해설진, 관중들 모두 흥분의 도가니였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경기가 끝난 후 '어메이징J'의 인터뷰다. '어메이징J'는 격양된 목소리로 "우리 팀에는 손대영이라는 훌륭한 코치가 있다. 그가 그랬다. 아무리 차이가 나도 괜찮다. 포기만 하지 않으면 이길 수 있는 기회는 반드시 온다. 그래서 내가 초반에 계속 죽어도 상관없다, 우리는 전투를 잘하기 때문에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 코치님을 항상 믿었다"고 말하며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어메이징J'가 인터뷰를 하는데 들리는 단어는 '메이콴시'(괜찮다) 밖에 없었다. 나중에 무슨 말을 했는지 전해 듣긴 했지만 '어메이징J'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가슴으로 알겠더라. 정말 감동적이었다. 내 코치 인생에서 절대 잊을 수 없는 경기다. 이길 수 없는 경기를 이겨준 선수들에게 정말 고맙다."
▲'어메이징J'의 인터뷰 부분
◆이제는 롤드컵
중국에서 제2의 코치 인생을 시작한 손대영 코치. EDE의 LPL행이라는 첫 번째 목표는 이뤘다. 그의 다음 스텝은 롤드컵이다. 중국 2부 리그에서 이제 막 1부로 올라온 팀이 중국의 내로라하는 팀들을 꺾고 롤드컵에 진출한다? 사실 쉽게 생각하기 힘든 일이다.
하지만 손대영 코치와 EDE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었다. 포기하지 않는 오뚝이 정신으로 글로벌 골드 1만 차이를 뒤집고 LSPL을 제패한 EDE에게 어떤 상대가 무서우랴. 손대영 코치와 EDE 선수들은 서로에 대한 신뢰로 똘똘 뭉쳤다. EDE의 서머 시즌이 기대되는 이유다.
"(강)양현이나 (윤)한길이나 한국에서 주목을 받지 못했던 선수들이다. 이 친구들은 안보이는 곳에서 열심히 하고 있었고, 지금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 중국 친구들도 실력이 많이 늘었고. 우리 선수들에게 많은 응원과 관심 부탁드린다."
LPL 서머 시즌은 손대영 코치에게 새로운 도전이다. 이를 악물고 EDE를 우승시킨 만큼 자신감은 충만하다. '오뚝이' 손대영 코치의 눈은 이제 LPL 우승컵에 가 있다.
"한국을 떠나 중국으로 넘어간 것, 한국 팬들과도 소통을 못하게 된 부분은 개인적으로 아쉽다. 한국에서 롤드컵까지 가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코치를 그만 두고 싶지는 않았다. 롤드컵이라는 꿈을 위해 중국으로 온 이상 더 열심히 할 일만 남았다."
글, 사진=강성길 기자 (gill@dailygam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