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벌어지는 리그에 관심이 많은 사람일지라도 LPL 경기를 챙겨보기만으로도 벅차다. 한국보다 2개 팀이나 더 많고 방식도 다소 복잡하다. 이런 상황에서 하부 리그인 LSPL까지 신경 쓰는 일은 너무나도 어렵다. 16개 팀이 두 번의 풀리그를 치르면서 팀당 30 경기를 소화해야 하는 강행군이기 때문이다.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윤한길은 큰 성과를 냈다. 소속팀인 에드워드 e스포츠(이하 EDE)가 LSPL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1부 리그인 LPL 승격을 확정지었기 때문. CJ 엔투스에서 코치를 하던 손대영 코치가 합류했고 한국인 미드 라이너인 '배미' 강양현이 함께 이뤄낸 성과였다. 한국에서 좌절감을 맛본 뒤 중국으로 넘어온 윤한길이 거둔 첫 성과였다.
◆중국만이 살 길이었다
"한국에서 수 차례 롤챔스 무대에 도전했는데 번번이 마지막 고비에서 무너졌어요. 팀들의 재정 상황이 좋은 편이 아니어서 챔피언스에 올라가지 못하면 해산하더라고요. 한국에서는 러브콜이 오지 않았고 중국에서 같이 해보자는 제의가 와서 지역을 바꿨죠."
윤한길은 에일리언웨어 소속으로 프로게이머를 시작했다. 프로게이머, 해설자를 역임했던 김동수가 만든 리그 오브 레전드 팀이라서 화제를 모았던 에일리언웨어는 롤챔스에 올라오지 못하면서 자연스레 해체됐다. 두 번째 팀인 제닉스 스톰 또한 승강전에서 모두 떨어지면서 선수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이 과정에서 윤한길은 에드워드 게이밍(이하 EDG)과 연결됐다. 실력 있는 서포터를 원하던 EDG에 공개 테스트 신청을 했고 통과하면서 정식 멤버가 됐다. 하지만 LPL에서 뛸 기회는 없었다. EDG에 이미 미드 라이너로 '폰' 허원석, 원거리 딜러로 '데프트' 김혁규가 자리하고 있었기에 한국인 선수가 더 이상 끼어들 수는 없었다.
"2015년 5월 중순에 중국에 들어갔는데 12월까지 연습 상대가 되어주는 것을 제외하고는 할 것이 없었어요. 중간에 대회를 하나 나가긴 했는데 그것마저 탈락하면서 꼬였죠."
윤한길은 EDG의 하부 팀인 EDE 소속으로 2016년을 시작했다. 한국 선수들이 EDG로 속속 영입되는 것을 보면서 중국에서도 2부 인생을 살아야 하는가라는 자괴감이 빠지기도 했지만 손대영 코치, 강양현과 함께 의기투합하면서 이겨냈다.
"LSPL이 2부 리그이고 EDE가 EDG의 2부 팀이기는 하지만 승강전을 잘 치르면 1부가 될 수도 있잖아요. 한국에서도 하부 리그에서만 뛰었는데 중국에서는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시작은 그리 좋지 않았다. 초반부터 1승3패를 당하면서 하위권으로 처졌다. 이대로 포기할 수도 있었지만 1부 리그에서 뛰고 싶은 간절함은 팀을 바꿔 놓았다. 손대영 코치의 강경한 코칭 스타일도 통하기 시작하면서 EDE의 성적은 점차 나아졌고 25승5패, 정규 시즌 1위로 스프링 시즌을 마쳤다. 포스트 시즌에서도 영 미라클스와 매 세트 어려운 경기를 치렀지만 3대2로 승리하면서 LPL 직행 티켓을 따냈다.
"중국에 와서 1년 동안 고생한 보람을 얻었어요. 하부 리그에서만 뛰다가 사라지는 선수가 되기는 싫었는데 1년만에 메인 무대로 올라가는 성과를 냈네요. 앞으로 더 잘해야하지만 1차 목표를 이룬 것에 대해서는 만족합니다."
◆어메이징한 'AmajingJ'
중국에서 겪은 에피소드를 이야기해달라는 요청에 윤한길은 주저주저했다. 공개해도 되는 이야기인지 판단이 서지 않아서라고. 어렵게 용기를 낸 윤한길은 톱 라이너인 'AmajingJ' 석웨이호에 대한 에피소드를 꺼냈다.
석웨이호는 한국 팬들에게도 알려진 선수다. EDG 소속으로 2015년 월드 챔피언십에 출전하면서 눈에 익었고 SK텔레콤 T1과 16강에서 한 조에 조합되면서 경계 대상으로 꼽히기도 했다. 월드 챔피언십에서 부진했던 석웨이호는 EDG의 하부 팀인 EDE로 내려가면서 윤한길과 한 팀에서 뛰었다.
"석웨이호와의 첫 만남부터 인상적이었어요. 자기 소개를 하는데 '승강의 달인'이라고 말하더라고요. 무슨 뜻인가 했는데 이 선수가 하부 리그에서 상부 리그를 올려 놓은 팀이 엄청 많았어요. 그래서 자기와 같이 뛰면 2부 팀은 무조건 LPL에 갈 수 있다고 자신있어 하더라고요. 이번 시즌 결과만 놓고 보면 우리 팀도 'AmajingJ'가 운전하는 '버스'를 탔죠."
석웨이호는 괴짜였다. 좋은 실력을 갖췄지만 경기에 몰입하면 기분을 주체하지 못하는 스타일이라고. 공식 대회에서 비속어를 쓰는 일은 있어서 안되지만 석웨이호는 지고 있던 경기를 역전할 때면 비속어를 써서 손대영 코치로부터 지적받을 때가 많다고.
"아직 벌금이나 출전 정지 등 공식 제재를 받은 적은 없는데 내부에서도 위험하다 싶을 정도로 줄타기를 하더라고요. 한국 선수들도 중국에서 생활한 지 꽤 되다 보니 비속어 여부를 알 수 있는데 위험한 상황이 몇 번 있었어요. 어쨌든 실력이 좋은 선수라 우리 팀은 LPL에 올라갔네요."
EDG에 대한 이야기도 해줬다. 중국 안에서 EDG의 별명이 '한국인 미드 수집가'라고. 2015 시즌을 앞두고 'Pawn' 허원석을 영입하면서 재미를 본 EDG는 그 뒤로 미드 라이너는 무조건 한국인을 영입하는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다. 2016 시즌을 시작하기 전에 'Athena' 강하운을 데려 갔고 얼마 전에는 'Scout' 이예찬까지 받아들이면서 한국인 미드 라이너만 3명이다. 여기에 하부 팀인 EDE에도 'Baeme' 강양현이 미드 라이너를 보고 있기 때문에 1, 2부 통합해 4명의 미드 라이너가 모두 한국인이다.
◆'마타' 조세형과의 대결 기대된다
EDG에 합류했을 때 윤한길은 'Deft' 김혁규와 한 팀에서 뛸 수 있다는 생각에 벅찼지만 그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세계에서 가장 피지컬 능력이 뛰어난 원거리 딜러로 알려져 있는 김혁규와 호흡을 맞춰 대회에 뛰고 싶었지만 용병 인원 제한 때문에 물거품이 됐다.
2016년 EDE에서 뛰면서 윤한길은 생각이 바뀌었다. 훌륭한 원거리 딜러를 만나는 일이야 말로 서포터가 인정받고 빛날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겼지만 지금은 그 생각을 바꿨다고. "리그 초반에는 'Jinjiao' 시에진샨과 호흡이 맞지 않아서 어려움을 겪었는데 서로 맞춰가는 과정에서 동반 상승하더라고요. 잘하는 원거리 딜러 옆에서 눈에 드는 것보다 서로 성장하면서 탄탄한 호흡을 맞추는 것이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서포터를 맡고 있는 윤한길에게 왜 서포터가 됐느냐고 물었다. 간단했다. '마타' 조세형의 플레이를 보면서 감탄해서 따라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한 마디로 조세형이 롤모델이었다.
"정말 대단한 선수라고 생각해요. 상대의 수를 미리 읽고 움직이는 플레이는 발군이죠. 로밍형 서포터를 만든 원조이기도 하고 라인전에서도 스킬을 적절하게 쓰면서 원거리 딜러를 편하게 만들어주죠."
2016년 서머부터 LPL에서 뛰는 윤한길은 조세형이 속한 로열클럽 네버 기브업과의 대결이 가장 기대된다고. 롤모델로만 바라보던 '우상'을 현실에서 맞닥뜨리면 어떤 기분일지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다고.
"김혁규, 조세형이 뛰고 있는 리그에서 제가 뛴다는 것이 아직은 실감이 나지 않아요. 메이저 무대에서 첫 시즌을 치르기에 부족한 점이 많겠지만 그래도 한 걸음씩 걷다 보면 길이 만들어지겠죠. 제 아이디인 'Road(길)'처럼요."
글=남윤성 기자 (thenam@dailyesports.com)
사진=박운성 기자 (photo@@dailyesport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