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지의 영웅담]의 첫 번째 주자는 최근 락스 게이밍에 입단한 철권의 '무릎' 배재민 선수입니다. 비인기 종목, 비소속팀 선수. 가시밭길을 걸어 최고의 자리에 오른 배재민 선수는 락스의 이름을 업고 인생 2막에 들어섰는데요. 배재민이 걸어온 길, 그리고 락스와 함께 갈 새로운 이야기를 함께 만나보시죠.<편집자주>
한국 철권하면 떠오르는 몇몇 선수가 있다. 대표적으로는 '무릎' 배재민. 배재민은 철권1부터 철권 시리즈를 즐긴 뼈대 굵은 선수로 국내외 다양한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특히 2010년 WCG 그랜드 파이널 철권 종목에서 우승하며 이름을 크게 날렸다.
한 종목의 최고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리그 오브 레전드나 오버워치의 경우 최고라는 타이틀을 차지하면 부와 명예가 동시에 따라온다. 그런데 배재민의 경우는 아니었다. 명예는 드높았지만 여전히 해외 대회조차 마음껏 출전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철권이 비인기 종목이고, 그를 지원해줄 소속팀 또한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배재민은 정상이 자리를 유지하며 기회를 기다렸다. 그리고 8월 초, 프로게임단 락스 게이밍에 입단했다. 팀 이름을 앞에 세우고, 팀의 유니폼을 입는 것은 배재민의 목표 중 하나였다. 배재민에게 소속팀은 물적, 심리적 안정감을 줬다.
이젠 락스 '무릎' 배재민으로 프로게이머 인생 2막을 시작한 배재민. 그의 굵고 길었던 이야기를 들어봤다.
◆제1장 - 오락실을 좋아하던 아이
배재민은 초등학교 시절 오락실에서 철권을 만났다. 철권인지도 모르고 마냥 빠져들었던 격투 게임. 철권1, 2까지는 단지 초등학생 구경꾼이었다. 철권을 플레이하는 형, 누나를 보며 게임에 대해 알아갔다.
중학교 때부터 철권3를 즐겼고, 철권5가 출시된 고등학교 시절에 프로게이머를 꿈꿨다. 스스로 철권에 재능이 있다고 느껴서가 아니라, 자신보다 잘 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깨달은 뒤였다. 그 때 느낀 경쟁심이 철권 프로게이머 배재민을 만들었다.
"고등학생 땐 스스로 잘 한다고 생각했어요. 제 고향이 경북인데 동네에서 저보다 잘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거든요(웃음). 그런데 대구에서 놀러온 철권 유저에게 제가 30연패를 당했어요. 내가 알고 있는 세계는 작았구나, 이런 세계가 있구나 싶더라고요. 이후로 많은 사람들을 알아갔고, 추천을 받아 서울에 있는 대회에 참가했어요. 그 때 잘하는 사람이 굉장히 많다는 것을 알게 됐고, 내가 우리 나라에서 제일 잘 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죠. 그래서 20살이 되자마자 본격적으로 시작했어요."
철권과 함께 성장해온 배재민은 점차 이름을 알려갔다. 그리고 2010 WCG를 기점으로 한순간에 철권계 스타가 됐다. 배재민 또한 WCG에서 우승했던 때를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었다.
"유명한 대회에서 우승하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어요. 그러다보니 WCG에서 우승했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네요. 다양한 종목에서 유명한 선수들이 대거 참가하는 종합 대회였잖아요. 저 사람이 그 사람이구나 하면서 신기해하기도 했죠(웃음). 철권이 처음으로 추가된 시즌이었는데 우승까지 하니 기분이 정말 좋았어요. 목에 메달을 걸어본다는 것이 이런 느낌이구나 싶었죠. 지금은 없어졌기에 의미가 더 큰 것 같아요."
배재민의 이력은 한 페이지에 담아내기 어려울 정도로 다채롭다. 꾸준함을 바탕으로 활동을 이어온 배재민의 무기는 연습. 연습 모드에서 기술을 연마하기도 하고, 대전을 통해 운영을 배우기도 한다. 경기를 복기하는 것은 기본이다. 하루에 8-9 시간씩 연습한다는 배재민. 최근엔 운동의 필요성도 느끼고 있어 헬스도 다니고, 건강 식품도 사서 먹고 있다고.
◆ 제2장 - 비소속팀, 비주류 종목 선수로 산다는 것
과거 철권에는 나진 엠파이어처럼 유명세를 타던 몇몇 팀이 있었다. 하지만 최고의 철권 프로게이머로 꼽혔던 배재민은 나진 소속이 아니었다. 그 때도, 10년 넘게 프로게이머로 활동할 때까지도 배재민을 받쳐주는 소속팀은 없었다.
"저도 왜 소속팀이 없었는지 모르겠어요. 큰 대회에서 입상해도 스카우트 제의가 안 오더라고요. 국내에선 PC 게임이 강세다보니까 아케이드 게임에는 신경쓰지 않는 것 같고, 본 고장인 일본은 일본 선수를 밀어주니까요. 이번에 테켄 월드 투어를 다니는데 많은 사람들이 '왜 무릎에게는 스폰서가 없냐, 이해를 못 하겠다' 하더라고요. 외국인들이 방송 채팅이나 댓글에서 피드백을 주니까 몇몇 해외 팀에게 연락은 왔는데 협상까지 이어지진 않았죠."
소속팀없이 선수 생활을 지속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말 그대로 혈혈단신. 대회 접수부터 준비, 참가까지 모두 스스로 해내야 했다. 가장 막막한 것은 해외 대회에 출전하는 것이다. 일회성 후원을 받아 출전한 적이 있지만 워낙 비용이 많이 들다 보니 손에 남는 것이 없었다. 대회에 나가서 유니폼을 입고, 팀의 이름을 달고 출전하는 선수들을 볼 때면 부러움이 배가 됐다.
"소속팀이 있는 선수들이 부러울 때가 많았어요. 과거 텍켄 크래시를 할 때, 나진 프로게임단이라고 하면서 소속 선수들이 나오는데 멋있더라고요. 이름 앞에 다른 수식어를 붙이고, 유니폼을 입고 경기를 치르는 모습이 부러웠죠."
"해외 대회에 출전할 때도 지원해줄 팀이 없다보니 어려움이 많았어요. 나가고 싶은데 못 나가고. 해외에 출전할 때, 워낙 비용이 많이 드니까 큰 대회에서 입상을 해도 남는 것이 없더라고요. 우승해도 본전인데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러다보니까 게임은 잘 하는데 이걸로 돈벌이가 안 되고, 주변에서는 그만하는 것이 낫지 않냐고 얘기하고…. 많은 고민을 했어요. 한국에서 메이저가 아닌 게임을 하는 선수들의 딜레마인 것 같아요."
메이저가 아닌 게임을 하는 선수들의 딜레마. 이것은 소속팀 없이 활동을 이어가던 배재민은 흔들고 또 흔들었다. 실제로 비인기 종목 선수들은 대회 수가 적다보니 개인 방송에 의존하게 된다. 그런데 개인 방송 또한 인기 종목에 밀리는 것이 현실이다. 주변 사람들도, 배재민 자신도 고민이 많았다.
"나이가 어느 정도 되니까 주변에서 압박이 들어오더라고요. '네 나이 때는 무엇을 해야 한다'는 식이죠. 고민을 하게 돼요. 철권과 해야하는 것을 모두 챙기지 못하는 상황도 오고요. 부모님도 안 좋아하시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모두 잘 돼 있고. 그런 현실적인 고민을 많이 했어요. 비인기 종목의 게이머라면 모두 같은 고민을 할 거예요. 게임을 하긴 하는데, 막상 얘기해보면 모두 한숨을 쉬죠."
◆ 제3장 - 락스 '무릎' 배재민으로 인생 2막
배재민은 고민의 끝에서 손을 잡아 줄 조력자를 만났다. 바로 락스 게이밍이다. 배재민은 7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EVO 2017에서 입상했고 이후 락스 게이밍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처음에는 '전화가 잘 못 온 것 아닌가'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공식 계정이 맞는지 아닌지도 수차례 확인했다고.
기대 반 설렘 반으로 락스 게이밍과 미팅을 했고, 입단이 확정됐다. 프로게이머 인생 첫 소속팀이었다. 배재민은 입단 발표 전 SNS에 "내 닉네임이 새겨진 옷을 입는 것을 예전부터 꿈꿨다"며 "생각이 현실이 되는 순간, 실감이 나지 않으면서도 그동안의 시간이 스쳐지나갔다"는 소감을 전했다. 그만큼 특별한 인연이었다.
"제 인생에서는 팀이 안 생길 줄 알았어요. 조금 있으면 30대 중반인데 나의 게임 인생에는 없나보다 생각했죠. 소속팀이 생기고, 확정됐을 때 너무 기뻤어요. 기다리면 이런 날도 오는구나 싶더라고요. 다시 시작하는 기분이에요."
인생 2막인 셈이다. '무릎'이라는 닉네임 앞에 '락스'를 붙이게 된 배재민은 조금 더 다부진 각오와 목표를 전했다.
"락스의 이름을 달고 출전한 첫 대회가 한국 월드 투어와 중국 대회였어요. 제가 경기하는 화면을 보고 있으니까 기분이 이상하더라고요. 팀과 나를 조금 더 알려야겠다 싶었죠. 이제 해외 경기를 치르는데 제약이 없으니까 이름을 알리고 싶어요. 그리고 에코 폭스 팀을 꺾고 싶어요."
"소속팀이 생기고 당당해졌어요. 예전에는 사람들이 '무릎님, 프로게이머인데 팀은 있으세요?'하면 '그냥 합니다'라고 얼버무렸거든요. 이젠 당당히 말할 수 있죠. 대회장 가면 시선이 다르다는 느낌도 들더라고요. 팀이 생기니 연습도 더 열심히 하게 되고요.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이 나에게도 팀에게도 좋으니까 노력할 생각이에요."
새로운 목표가 생긴 배재민은 나이라는 장벽도 훌쩍 뛰어 넘었다. 나이에 대한 부담감은 스스로 한계를 두는 것이고, 경기에 패배했을 때 댈 수 있는 핑계일 뿐이라는 생각이다. 배재민은 테니스 선수 로저 페더러의 사례를 들었다. 로저 페더러는 모두가 '퇴물'이라고 말했지만 2017 윔블던 테이스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편견을 뛰어 넘었다. 배재민은 "나이 많은 운동 선수들을 보면서 영감을 얻는다"며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비인기 종목, 비소속팀 선수로 살면서 배재민은 고민했고, 흔들렸다. 락스에 입단하며 새로운 활로를 찾았지만 이전부터 배재민을 지탱해준 것은 역시 팬이었다. 배재민은 인터뷰 말미, 팬에 대한 감사 인사를 전했다. 진심이 가득 담긴 감사였다.
"항상 응원해주시는 팬들에게 감사해요. 덕분에 힘을 많이 얻죠. 예전에는 팬이다 하면 '네, 감사합니다'했는데 지금은 마음에서 감사가 우러나와요. 원래 사람이 자기 테두리 안에 있는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하면서 살아가는데 저는 개인 방송 시청자분들과 소통하면서 살아간다는 느낌을 얻거든요. 항상 우승하라고 응원해주시고, 입단도 축하해주시고요. 정말 따뜻한 느낌이에요. 앞으로도 철권 프로게이머로 활동하면서 좋은 소식을 전해드릴 생각이에요. 열심히 해서 좋은 모습 보여드리겠습니다."
정리=이윤지 기자 (ingji@dailyesports.com)
사진=최은비 기자, 신정원 수습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