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한 것이라 생각이 들었지만 그 선수 이야기를 들어보니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자신의 커리어를 앞서는 한 선수가 현역으로 뛰고 있는 상황에서 아직까지는 '전설'이라 불리기에는 무언가 부족한 것 같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6번의 우승 기록이 있지만 8번의 우승 기록이 있는 문호준이 있기에 아직 더 많이 가야 한다고 자신을 채찍질 하는 그의 이름은 바로 '신황제' 유영혁입니다. 문호준이 잠시 다른 게임으로 외도하고 있는 동안에도 카트라이더 리그를 지켰던 유영혁은 '카트라이더 밖에 모르는 바보' 게이머 입니다.
향상 그 자리에 서있는 우직한 나무처럼 2007년부터 한결같이 카트라이더 리그와 함께 했던 유영혁. 12년의 게이머 생활 동안 카트라이더와 울고 웃었던 이야기를 지금부터 함께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고참 게이머를 넘어 노장 게이머로
올해 나이 23세지만 카트라이더 리그에서 유영혁은 '노장'이라 불립니다. 고참 게이머라고 불리기에는 12년이라는 세월을 다 담을 수 없기 때문인가 봅니다. 웬만한 게이머가 도전할 수조차 없는 기록입니다.
예전에는 그저 게임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유영혁이지만 지금 그는 더 멀리 바라보고 고민하는 '노장' 게이머가 됐습니다. 그래서인지 무뚝뚝하기만 하던 표정이 이제는 풍부해지고 밝아졌고 인터뷰에 단답형으로 대답하던 그가 요즘은 도발도 서슴지 않는 게이머가 됐죠.
"처음에는 '노잼 게이머'라는 인상이 강했어요. 예전 인터뷰를 보면 저도 너무 재미없는 것이 느껴지더라고요(웃음). 사실 예전에는 리그가 어떻게 되든, 동료들이 어떻게 되든, 게임이 어떻게 되든 제 할일 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 무척 강해서 그랬던 것 같아요."
지금은 성적도 성적이지만 리그를 어떻게 하면 더 재미있게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해요. 최근 (문)호준이와 서로 도발하는 인터뷰를 자주 했던 것도 리그 흥행에 도움이 될까 하는 마음에서였어요. 이제는 혼자만 생각하는 나이는 지난 것 같아요."
대답은 '네, 아니오'만 아는 줄 알았던 꼬맹이가 이제는 리그 흥행까지 고민할 정도로 훌쩍 자란 것을 보니 절로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평소 성격상 도발하고 앞에 나서서 이야기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알기에 더욱 그의 변화가 고맙기만 합니다.
"사실 엄청 내성적이에요. 아직도 리그보다는 인터뷰가 더 긴장되거든요. 남들 앞에 나서는 성격도 아니고 언변이 뛰어나지도 않아서 힘들 때가 많아요. 하지만 저나 (문)호준이, (전)대웅이형 등 고참 프로게이머들이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후배들도 그냥 게임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테죠."
오래된 게임 리그일수록 변화하지 않으면 지속적으로 열리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유영혁은 이번 시즌에도 도발 인터뷰 등 리그를 더욱 재미있게 만들 요소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문호준 등 리그에서 활약하는 선수들과 수시로 만나 다양한 의견을 주고 받는다고 합니다.
◆영원한 라이벌 문호준
모든 리그에서 라이벌이라는 존재는 리그를 보는 재미를 더할뿐더러 선수가 성장하는데도 큰 도움을 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영혁은 운이 좋은 게이머입니다. 최고의 선수인 문호준이 유영혁을 채찍질하고 있기 때문이죠.
사실 유영혁은 아직까지 문호준의 커리어를 넘어서지는 못했습니다. 우승 경력이나 수상 경력 등 문호준은 그야말로 '넘사벽' 프로게이머입니다. 하지만 문호준이 잠시 다른 게임으로 외도했을 때 유영혁은 문호준의 빈자리를 채우며 카트라이더 리그를 지키며 조금씩 문호준의 커리어를 따라갔죠.
"우승 경력만 놓고 본다면 이제 (문)호준이랑 저랑 1회 정도 차이 나더라고요. (문)호준이가 없을 때 제가 카트라이더 리그를 주름잡았죠(웃음). 그리고 (문)호준이가 돌아왔을 때도 제가 개인전이나 단체전에서 꽤 많이 우승했어요. 예전에는 감히 라이벌이라고 부르는 것이 미안할 정도였는데 이제는 많이 따라왔다고 생각해요."
유영혁은 라이벌로서 문호준을 어떻게 평가할까요? 유영혁은 "계산이 빠르고 영리한 선수"라고 대답했습니다. 경기력도 좋고 실력도 훌륭하지만 외적인 심리전에 능하고 상대를 흔드는 스킬이 뛰어나다는 것이 유영혁의 설명이었습니다.
"아마 11차 리그였을 거에요. 결승전에서 6라운드까지 제가 1위였거든요. 그날따라 주행이 정말 잘 돼서 우승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쉬는 시간에 (문)호준이가 슬쩍 오더니 '오늘 형 운이 정말 좋은 것 같아요'라고 한마디 툭 던지고 갔어요. 그 말에 저도 모르게 말렸던 것 같아요. 이후로 계속 실수를 연발했고 결국 우승은 호준이에게 돌아갔죠. 만약 그때 쉬는 시간이 없었다면 제가 우승했을 거에요(웃음)."
상대의 심리도 흔들 줄 아는 영리함은 배워야 할 요소라고 생각한 유영혁은 이후로 차분하고 말이 없던 스스로의 성격이 승부의 세계에서는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유영혁이 어느 순간부터 도발을 서슴지 않았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고 하네요.
◆끝나지 않은 유영혁의 도전
한 게임을 12년 동안 묵묵하게 해왔다면 이제는 지겨울 법도 하지만 유영혁은 아직 이룰 것이 많이 남아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카트라이더 리그는 이제 그에게 삶이자 인생이 돼 버린 모양입니다.
"예전에 카트라이더 리그가 잠시 휴식기를 가진 적이 있어요. 그때 알았죠. 제가 얼마나 리그를 사랑하는지를요. 예전에는 게임이 좋아서 리그에 참여한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반대였어요. 리그에 참여하는 것이 재미있어서 게임을 하고 있더라고요."
카트라이더 리그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는 없는 일이지만 유영혁은 열리는 동안에는 최선을 다하고 싶다는 소망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카트라이더 리그가 지속될 수 있도록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고 싶다는 각오도 밝혔습니다.
"이제 저는 후배들을 고민하고 걱정해야 할 위치인 것 같아요. 저희 팀 선수들뿐만 아니라 이제 막 카트라이더 리그에 참여한 신예들에게 리그는 꿈이자 도전이고 희망이에요. 그들에게 도전을 이어갈 수 있는 장을 지속적으로 마련해 주는 것이 우리들이 해야 할 역할이죠. 단순히 우승만을 위해 뛰는 것이 아니라 더 넓은 것을 보고 더 높은 곳을 향해 뛰어야죠."
이제는 훌쩍 자라버린 유영혁의 어깨에는 신예들과는 다른 역할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역할을 어떻게 하면 잘해낼 수 있을지 고민하는 유영혁의 모습에서 카트라이더 리그의 미래를 볼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더 많이 노력해서 팬들께 카트라이더 리그가 정말 재미있다는 것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앞으로도 많이 사랑해 주시고 선수들 응원도 많이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팬들의 응원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몰라요. 현장에도 많이 찾아와 주시고 방송 시청도 많이 해주세요. 항상 감사 드립니다."
글=이소라 기자 (sora@dailyesports.com)
사진=박운성 기자 (photo@dailyesport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