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e스포츠협회는 지난해 가을, 전 협회장이었던 전병헌 정무수석의 보좌관이 저지른 비리로 인해 크게 흔들렸다. 이후 삼성과 CJ가 각각 리그 오브 레전드 게임단 매각과 해체를 결정하면서 한 번 더 타격을 입었고, 한바탕 홍역을 치른 협회는 주요 직원들이 떠나는 등 내부적으로 많은 변화를 겪었다. 외부에서는 힘을 잃은 협회의 역할이 재정립돼야하지 않겠냐는 의견도 나왔다.
일부 e스포츠 팬들 사이에서 "없어도 그만 아니냐"는 비난과 조롱을 받던 협회였지만 지난 5월과 6월 아시안게임 이슈를 맞이하면서 다시 존재감을 드러냈다. 협회 임직원들은 한국 e스포츠 대표팀의 아시안게임 시범종목 출전을 위해 실정에도 맞지 않는 대한체육회 가맹요건을 충족시키려 휴일까지 반납해가며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그러한 노력 덕에 극적으로 한국이 아시안게임에 참가할 수 있게 됐고, 협회는 이를 통해 오로지 협회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확실히 보여줬다.
지난 7개월의 시간은 협회에게 명백한 '위기'였다. 하지만 그간 쉽게 하지 못했던 체질 개선을 단행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현재 협회 사무총장 대행을 맡고 있는 김철학 국장 역시 "위기를 기회로 바꾸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말했다.
새롭게 거듭나기 위한 부활의 날갯짓을 시작한 협회는 잃어버린 신뢰를 되찾기 위해, 글로벌 무대에서 주도국 역할을 하기 위해 이전보다 더욱 소통이 원활하고 투명한 단체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앞으로의 10년을 준비하는 협회의 비전을, 김철학 국장과의 인터뷰를 통해 들어볼 수 있었다.
Q 지난해 협회장 이슈부터 올해 아시안게임 이슈까지 다양한 일들이 있었다. 폭풍우가 지나간 느낌인데, 최근 협회 분위기는 어떤가.
A 작년 사건 이후에 협회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기능적인 측면과 구조적 측면에서 변화가 필요하다 생각했다. 앞으로 글로벌 e스포츠가 급격히 변하고 산업적, 문화적으로 성장하는 가운데서 협회가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 것인가, 단순히 시류에 편승하는 것 말고 종주국으로서 주도해나갈 수 있으려면 협회가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현재는 필연적으로 많은 변화를 꾀하고 있는 과정이다.
협회가 e스포츠의 많은 주체들과 소통이 원활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소통이 부족했다. 협회의 의사 결정에 대해 외부에서 잘 모르는 것들이 많았다. 이런 것들이 협회 운영의 투명성과 연결됐고, 비리가 생긴 이유이기도 한 것 같다. 사업이나 정책 결정에 있어서도 더 많은 주체들의 총의를 담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들이 원활하지 않았다. 지금의 협회는 투명한 운영과 원활한 소통을 위해 변화하는 중이다.
그런 와중에 아시안게임에서 e스포츠가 시범 종목으로 채택되면서 국가대표 파견 문제가 있었고, 대응하느라 많이 힘들었다. 이번 일을 해결하면서 기존 스포츠계에서 바라보는 e스포츠에 대한 인식, 시도체육회의 까다로운 가맹요건 등 벽을 많이 느꼈다. 다행히 문화체육관광부나 대한체육회가 많은 지원을 해주고 관심을 가져줘서 선수들을 파견할 수 있게 됐고 한 고비를 넘겼다. 이게 끝이 아니고 계속 자격을 유지해야 한다. 정관 개정이나 규정에 맞는 제도 정비 등이 숙제로 남았다. 향후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에서 e스포츠가 정식 종목이 됐을 때를 대비해 이런 과정들이 반복되지 않게 잘 준비할 것이다.
Q 조금 지난 일이지만 협회의 핵심 사업이었던 스타크래프트2 프로리그가 폐지됐다. 이후 사업 방향에 어떤 변화가 있었나.
A 선수들에 대한 체계적인 등록 및 관리를 통해 직업군으로서 안정화할 수 있게 해나가는 것이 협회의 설립 취지였다. 그래서 프로게이머에 대한 등록제를 문체부에서 위임받아 하게 됐고, 등록 선수들에 대해 세제 혜택 등이 제공됐었다. 협회는 그렇게 출발했고 그런 등록 선수를 기반으로 스타리그와 프로리그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프로리그를 포기하면서 경기 단체 고유권한인 주최권이 많이 약해진 것이 사실이다. 협회만의 브랜드가 하나 사라져 안타깝게 생각한다.
Q 협회가 아마추어 e스포츠 육성 사업에 집중할 것이라 보는 시각도 있는데.
A 협회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줄어들어서 아마추어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그 반대인 것 같다. 협회가 앞으로 더 많은 역할들을 하려면 아마추어부터가 탄탄해야 한다. 지금까지 한국 e스포츠는 체계적 시스템과 탄탄한 저변을 바탕으로 성장했다기보다는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문화다. 과거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해 스타 선수가 필요했고, 이로 인해 역피라미드 구조로 성장했다. 바닥은 취약한데 프로 무대만 성장한 것이다. 스포츠로서 롱런하려면 동호인과 아마추어 풀이 탄탄해야 한다. 그래야 지속적으로 우수한 선수들을 발굴할 수 있다. 또 그들이 구매력을 갖춘 소비자와 e스포츠 팬덤으로서 시장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현재까지는 자연적으로 발생한 인프라에 의존했던 것이기에 제대로 관리했느냐는 측면에서는 반성해야할 부분들이 있다.
해외에선 "한국이 왜 모든 e스포츠 종목에서 잘하는 걸까"하는 의문을 갖지만 우리에겐 최고의 유스 시스템이 있다. 전국의 수많은 PC방을 유스 시스템이라 하는 것은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스타가 저절로 배출되는 현상에 너무 익숙해졌을 뿐이다. 이제는 선수 육성 시스템이 체계화될 필요가 있다. 역피라미드 구조를 바꿔야 한다. 이를 위해 법 제도와 행정적 서비스가 수반돼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인프라를 바탕으로 지속적인 성장을 꾀할 수 있을 것이다. 파트너사들과 균형 있는 관계를 가지는 것이 키포인트다.
대한체육회의 기조도 엘리트 스포츠 중심에서 생활 체육 쪽으로 변화했다. e스포츠도 생활 e스포츠로의 정착이 필요하다. 게임에 대한 인식도 바뀌어나갈 수 있게 해야 한다. 또 지금은 모든 e스포츠 이벤트가 서울에 집중돼있는데 지역적으로 균형 잡힌 발전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만 각 지역 거점을 바탕으로 지역 연고제 등을 추진할 때 의미가 있다.
Q 아마추어 e스포츠를 논할 때 대통령배 전국 아마추어 e스포츠 대회(KeG)를 빼놓을 수가 없다. 얘기를 듣고 보니 KeG 규모를 확대해야하는 것 아닌가 싶은데.
A KeG는 지난 2008년부터 문체부장관배로 시작해 10년 넘게 롱런하는 아마추어 최고 권위 대회가 됐다. KeG의 첫 번째 목적은 전국 단위 균형 발전을 위해 만든 것이다. 그렇게 만들려면 대회 목적이나 취지에 맞게 지역에서 e스포츠 인프라가 조성돼야 한다.
과거 대통령배 대회는 각 지자체에서 자체적으로 대표 선수 뽑고 지자체에서 하는 본선이 전국 결선을 위한 절차 성격이 강했다. 2015년부터 협회가 직접 주관하면서 변화에 중점을 둔 부분은 KeG가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뭔가를 남기길 바랐고, 누구나 쉽게 참여할 수 있게 했다. 또 최고 권위 대회지만 사람들이 잘 몰라 대회의 위상을 강화할 필요성을 느꼈다. 아마추어들의 경기지만 방송이 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대회를 통해 선수들이 얻어갈 수 있는 것이 있다고 봤다.
공인 PC 클럽을 거점으로 해 상시적으로 지역 예선을 열 수 있게 하고 지역 본선과 유기적인 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했다. 우승자에겐 IeSF 월드 챔피언십이나 KeSPA컵 참가 자격을 주거나 트라이아웃에 참가할 수 있게 했다. 이런 식으로 아마추어-프로의 등용문을 연계, 대회를 통해 프로게이머를 희망하는 친구들에게 실질적인 기회가 돌아가도록 했다. 뷰어십도 기대 이상으로 나왔다. 현재 전국에 공인 PC 클럽이 70여 곳 정도가 있는데 2020년까지 200개 수준으로 확대하는 것이 목표다.
Q 최근 들어 시장 내에서 종목사들의 입김이 세졌다. 이런 분위기가 협회 활동에 제한을 준다고 느끼는가.
A 그런 부분이 분명히 있지만 역할의 문제라 본다. 과거에 e스포츠의 파급력이 약했을 땐 종목사가 e스포츠를 바라보는 관점도 마케팅 이상은 아니었다. 새로운 사업 모델보다는 자사 게임의 마케팅 혹은 이용자들과의 소통 수단으로 생각했거나 무관심한 측면들이 많았다.
지금은 e스포츠에 대한 가치를 종목사들이 인지하고 있다. e스포츠가 자사 게임의 지속적인 성장이나 매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잘 알고 있다. 때문에 IP에 대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당연하다. e스포츠 시장이 커질수록 원저작권자가 자신의 권리를 활용해 의도에 맞게 체계화시키려는 것은 당연하다. 경직된 자세보다는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 협회는 경기 단체로서 e스포츠를 좀 더 체계화시켜 아마추어부터 프로까지 우수한 선수들이 나올 수 있도록 하고, 생활 e스포츠도 더 발전시키는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어느 한 종목이 독립된 리그로 성장하고 롱런하기 위해서는 종목사의 의지가 중요하다. 우리는 공인 종목 선정 기관으로서 신청을 통해 심의를 진행한다. 종목사가 신청하지 않으면 우리 임의대로 할 수가 없다. 심의를 하는데 있어 주요 잣대는 해당 종목의 생태계 안에 있는 선수들이 안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투자 계획이나 지속적인 대회 개최에 대한 의지가 있느냐 등이다. 초기 단계에는 종목사가 주도권을 잡고 싶어 한다. 하지만 우리가 지난 몇 년 간 해왔던 여러 종목들을 보면 종목사가 모든 것들 다 관리하기가 쉽지 않다.
게임단과 종목사가 바라는 점이 달라 갈등이 생길 때도 있다.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선 새로운 모멘텀이 필요한데, 중간 지대에서 밸런스를 맞춰줄 역할이 필요하다. 협회가 그런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본다. 협회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곳도 있고 아닌 곳도 있다. 이는 맞다, 틀리다를 가릴 문제는 아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과정으로 보면 선수와 협회, 게임단과 종목사, 방송사 간의 파트너십이 잘 이루어진 종목들이 롱런했다. 결과가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 않은 종목들은 수명이 짧거나 시장이 축소됐다.
Q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을 계기로 협회의 역할이 새롭게 추가된 것 같다. 멀리 내다보면 올림픽도 준비해야 할 것 같은데.
A 이번 아시안게임에 e스포츠가 시범 종목으로 들어간 것은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나 인도네시아 조직위원회의 e스포츠에 대한 이해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아시아e스포츠연맹(AeSF)이 만들어졌지만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면서 방송이나 일정 등 정해지지 않은 것들이 너무 많았다. 매일같이 AeSF와 연락하며 변동되는 사항들을 확인했다. AeSF에서 미처 준비하지 못한 것들을 역으로 우리가 챙기기도 했다.
AeSF도 아시안게임을 위해 급조해서 만들어진 성격이 있다. e스포츠 전문가도 그렇게 많지 않다. 협업 구조가 잘 만들어져야 하는데 이번에는 급박하게 진행돼 삐걱거리는 부분이 많았다. 우리는 그쪽 의사 결정만 기다리지 않고 질의를 통해 각종 사항들이 정비될 수 있게 요청하고 있다. 처음이니 겪을 수밖에 없는 과정인데 다음에는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좀 더 잘 준비할 수 있을 것 같다. 협회도 사전에 어떤 것들을 준비해야 하는지 좀 더 명확하게 알게 됐으니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대한체육회 가맹은 2018년에 한해 한시적인 것이니 자격을 유지하는 게 중요한 이슈다. 대한체육회 정관 규정에 맞게 개정해야할 것들이 많다. 기존 스포츠와 한국 e스포츠의 현실에 괴리가 있다. 그런 부분들을 최대한 잘 준비할 것이다. 충분한 시간을 갖고 우수한 성적을 낼 수 있는 지원 방안들까지 체계적으로 준비하겠다. 국가대표 마케팅이나 후원사 마케팅도 미리 준비할 수 있도록 할 생각이다. 이번 아시안게임은 우리한테도 좋은 경험이었지만 AeSF나 OCA,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도 좋은 경험이 될 것 같다.
이번에는 마케팅 규정 관련해서도 대한체육회나 OCA나 정비된 것들이 별로 없었다. 영업을 하면서 규정 확인도 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어 개인적으로는 아쉬운 부분이 많았다. 다음엔 우리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다양한 것들을 해보고 싶다.
Q 10년 후 협회의 모습은 어떨 것이라 예상하는가.
A 협회가 그동안 본연의 기능이라 할 수 있는 대회 주최자로서의 기능이나 선수 등록, 공인 자격 등 체계화해야할 것들이 축소되거나 취약해진 것 있다. 아마-프로 간의 균형 발전을 위한 시스템을 마련하고 선수와 팀의 권익 보호와 증대를 위해 정부와도 협업해야 한다. 본연의 기능을 하면서 정부와 함께 인프라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이런 것들이 중요하고 축소된 기능을 회복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오히려 더 강화하고 확대해나가서 한국 e스포츠를 대표하는 단체로서의 위상을 재정립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숙제다. 10년 뒤에는 대한체육회 단체로서 잘 정비된 단체가 돼있을 것이라 본다.
다른 스포츠에는 없지만 e스포츠에는 종목사가 존재한다. 종목사와 협업하는데 있어 어떤 것이 가장 이상적인지, 파트너십에 대한 정의가 명확하게 정착해있을 것이다.
또 하나 준비할 것은 정통 스포츠에 편입되면서 스포츠 외교도 중요해졌다. 이를 위한 인재 양성이 중요해질 것이다. 앞으로 시장에 필요한 인력들, 경기 감독관이나 토너먼트 매니저, 심판, 대회 오거나이저 등 다양한 인재들을 양성해 주도권을 잃지 않을 필요성이 있다.
Q 인터뷰를 마치며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A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위기를 기회로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엄청난 위기에 봉착했지만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많은 부분에서 신뢰를 잃었지만, 신뢰를 회복하려면 본연의 기능에 충실하고 확대해야 한다. 여러 주체의 총의를 담으려면 이사회 구조도 변해야 한다. 투명한 경영이 함께 수반되고, 그것을 통해 협회 역할을 재정립하고 결과물을 하나씩 만들어내고 주도국 역할을 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다면 다시 신뢰받는 조직으로 바뀔 수 있을 것이라 본다.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e스포츠에 대한 애정이 있는 사람들과 열심히 해나갈 계획이다. 정부와 종목사, 각 게임단들과 더 많이 소통하고 한국 e스포츠 발전을 위해 다양한 정책들을 만들고 실행해나가겠다.
정리=이시우 기자(siwoo@dailyesports.com)
사진=박운성 기자(photo@dailyesport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