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짠해졌습니다. 단순히 그 프로게이머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이야기 같았기 때문일까요. 아직은 어리지만 많은 일을 경험하며 성숙해진 한 선수의 이야기에서 인생을 보고, 사람을 보고, 꿈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일까요.
그는 말이 많지 않았습니다. 단답형이었죠. 사실 인터뷰를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상대가 단답형으로 말을 하게 되면 난감합니다. 하지만 이 선수의 인터뷰가 끝이 났을 때는 단답형 대답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편했습니다. 그의 답변에는 적어도 가식이 아닌 진심이 있었고 학습된 이야기가 아닌 진짜 그의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떻게든 게임을 잘하고 싶은, 그래서 최고의 선수가 되고 싶은 꿈이 누구보다도 강한 이 선수는 바로 한화생명e스포츠 탑 라이너 ‘트할’ 박권혁입니다. 따스한 햇빛이 내리쬐는 어느 봄 날,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곳에서 박권혁을 만나 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해 들어봤습니다.
◆이영호를 보며 스타1 프로게이머를 꿈 꿨던 아이
LoL 프로게이머 가운데 다른 종목의 프로게이머를 꿈 꿨던 선수는 많지 않습니다. 다른 종목이 e스포츠 중심이었을 때 대부분의 LoL 선수들은 어린 나이었기 때문입니다. 설사 어린 나이가 아니라 하더라도 대부분은 처음부터 LoL 프로게이머를 목표로 도전한 선수가 많습니다.
22살, 많지 않은 나이임에도‘트할’ 박권혁은 스타크래프트1 프로게이머가 되고 싶었다는 다소 충격(?)적인 이야기를 털어 놓았습니다. ‘택뱅리쌍’이라 불렸던 김택용, 이영호등을 보며 프로게이머에 대한 꿈을 꿨다고 합니다.
“원래부터 게임을 좋아했고 스타크래프트1은 꽤 어렸을 때부터 즐겨했어요. 그러다가 중학교 때 스타크래프트1 프로게이머가 돼야 겠다는 결심을 했고 꽤 열심히 연습했어요. 아마 LoL로 따지면 다이아 정도의 실력까지 올라갔을 거에요. 종족이 테란이었고 이영호 선수 플레이를 보면서 정말 열심히 연습했죠.”
하지만 그의 꿈은 몇, 몇 선수의 잘못된 선택 때문에 실현되지 못합니다. 스타크래프트1는 승부조작이라는 사건에 휘말렸고 이후로 하락세를 걸으면서 박권혁은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도전조차 해보지 못했기에 더욱 아쉬운 그의 첫번째 꿈이 사라진 것입니다.
“처음에는 진짜 속상했어요. 그런데 꿈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처럼 LoL이 눈에 훅 들어오더라고요. 사실 그때만 하더라도 LoL이 스타크래프트1처럼 리그를 할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냥 운명처럼 게임을 시작하게 됐어요. 그렇게 새로운 꿈이생긴 거죠.”
어렸을 때부터 공부와는 인연이 없다고 판단했던 ‘트할’ 박권혁은 자신이 좋아하는 게임을 직업으로 삼아야겠다고 일찌감치 진로를 정했다고 합니다. 어린 나이에도 그는 자신이 좋아하고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실행에 옮긴 거죠.
“프로게이머를 하겠다는 이야기를 처음 했을 때 부모님께서 당연히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그래서 방송을 하며 적지만 제가 번 돈을 보여드렸고 앞으로 어떻게 해나갈 것이라는 구체적인 계획을 들려 드렸어요. 그리고 티어를 올려 ‘대한민국에서상위 200명 안에 드는 사람이 됐다’고 말씀 드렸고 제 의지를 보신 부모님께서 그때부터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셨어요.”
부모님의 응원을 바탕으로 LoL 프로게이머로 꿈을 전향한 박권혁은 그때부터 엄청난 훈련에 돌입했습니다. 누군가가 강제로 시킨 것이 아니기에 때로는 마음이 흔들릴 때도 있었지만 꿈이 있었기에 그는 앞으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롤모델도 되고 싶은 사람도 ‘페이커’
팀에만 들어가면 장미빛 미래가 펼쳐질 것이라 기대했던 ‘트할’ 박권혁. 하지만 생각처럼 꽃길만 펼쳐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박권혁은 프로게이머가 되는 것도 힘들지만 그 안에서 최고가 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느끼게 됐습니다.
“일일이 나열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 다양한 경험을 했고 그것이 저를 힘들게도, 행복하게도 했지만 중요한 것은 현재의 저를 만드는데 지난 경험들이 많은 도움이 됐다는 거죠. 당시에는 힘들었어도 그 기억들이 도움이 될 때가 있더라고요.”
SK텔레콤 T1에 입단한 그는 전설의 선수 ‘페이커’ 이상혁을 만났습니다. 사실 많은 프로게이머들이 ‘페이커’를 꿈 꾸며 프로에 입문하죠. ‘트할’ 박권혁 역시 다르지 않았습니다. ‘페이커’는 모든 프로게이머들의 꿈이기 때문이죠.
‘트할’은 SK텔레콤 T1에서함께 지내면서 롤모델 역시 ‘페이커’ 이상혁이 됐다고 고백했습니다. 아무래도 같은 라인에서 최고의 선수를 롤모델로 정하는 경우가 많은데 ‘트할’ 박권혁은 이상혁의 평소 생활을 보며 그를 롤모델로 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최고의 위치에 가게 되면 어느 순간부터 다른 생각들을 하게 마련이거든요. 심지어 최고의 위치에 가지 않아도 프로게이머를 오래 하다 보면 다른 생각이 머리 속을 비집고 들어와요. 그런데 ‘페이커’ 이상혁 선수는 마치 어제 프로게이머가 된 것처럼 게임만 생각하고 게임만 몰두했어요. 자신이 잘 할 때나 그러지 못할 때나 게임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며 많이 배웠어요. 말이 쉽지 그런 삶을 살기란 정말 쉽지 않거든요.”
다른 생각이 들 때 박권혁은 ‘페이커’ 이상혁의 삶을 떠올린다고 합니다. 최고가 되고 싶다면 ‘페이커’ 이상혁보다 더 노력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채찍질 하는 것이죠. 앞으로 그가 프로게이머로서 가장 우선에 둬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페이커’ 이상혁 덕에 잘 알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냥 아는 것이랑 옆에서 보는 것은 다른 것 같아요. 선수들의 인터뷰를 보며 ‘페이커’ 이상혁 선수가 얼마나 열심히 하는 지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옆에서 본 것은 차원이 다른 ‘열심’ 이더라고요. 생각을 지우고 내가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에 집중하는 것, 힘들지만 따라가보려고 합니다. 옆에서 ‘페이커’ 이상혁 선수의 생활을 본 것만으로도 정말 좋은 공부였다고 생각해요.”
◆’트할’ 박권혁의 현재, 한화생명e스포츠
“그냥 제가 못한 거에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1라운드에서 맹활약하며 주목 받았던 ‘트할’ 박권혁이었지만 2라운드에서는 아쉬운 모습으로 이번 시즌을 마무리 해야 했습니다. 누가 뭐래도 본인이 가장 아쉬웠겠죠. 왜 그런 것인지 변명을 할 수도, 이유를 수도 없이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상남자’ 박권혁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바뀐 메타를 따라가지 못했던 것 같아요. 누군가는 메타를 빠르게 적응하기도 하지만 이번에 저는 좀 느렸던것 같습니다. 이번 시즌 결과가 너무나 아쉬워서 마음이 아프지만 변명의 여지가 없는 시즌이었기 때문에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오기도 해서 다음 시즌이 기대되기도 해요. 한화생명e스포츠에서 조금씩 성장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처음 팀에 들어 왔을 때부터 마치 10년간 함께 했다는 기분이 들 정도로 동료들과 잘 어울렸다는 박권혁. 술 한잔씩 기울이면서 서로에 대한 장단점을 피드백 해줄 때 박권혁은 프로게이머 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곤했습니다.
“혼자 고민하고 혼자 해결책을 찾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거든요. 동료들과 함께 문제점을 찾고 개선하려 노력하다 보면 함께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되고 든든한지 몰라요. 감독님과 코치님, 동료들과 모두 열심히 노력하고 있으니 다음 시즌에는 지금보다 더 나은 한화생명e스포츠가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이번 시즌 성적에 대해 더 이상의 질문은 무의미했습니다. 자신이 못했고, 뼈를 깎는 노력을 통해 더 나아지고 더 발전할 것이라 다짐하는 선수에게 ‘왜 못했는지’ 물어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다음 시즌 ‘트할’ 박권혁의 활약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입니다.
◆체력은 곧 국력, 남는 것은 내 몸!
‘트할’ 박권혁은 다양한 운동을 통해 체력을 기르는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는 체력을 기르는 것이 자신의 미래를 위해 중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게임을 오랫동안 열심히 하기 위해서라도, 앞으로 어떤 일을 하더라도 체력이 받쳐줘야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회적으로 제 나이는 젊지만 프로게이머로서 제 나이는 중견 정도라 생각해요. 확실히 컴퓨터 앞에 오래 앉아 있을수록 몸이 망가져간다는 것이 느껴져요. 운동을 통해 체력을 기르고 건강 관리를 해야 프로게이머 생활도 제대로 할 수 있겠더라고요. 미래도 중요하지만 현재를 위해서라도 운동은 빼놓지 않고 꾸준히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의 과거는 확고했고, 그의 현재는 발전하고 있으며, 그의 미래는 기대가 됐습니다. 누구보다 솔직한 그가 그렇다고 했으니 말입니다. 말을 꾸밀 줄도 모르고 없는 말을 지어 하지 못하지만 누구보다 진실한 ‘트할’ 박권혁, 그가 만들어 갈 한화생명e스포츠의 이야기가 더욱 궁금해 집니다.
이소라 기자 (sora@dailyesport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