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 특히 프로 단계 경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목표 설정이다. 운영이란 다음 단계에 어떤 이득을 어떻게 만들어낼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 날 경기에서 젠지는 불리한 상황에서도 빠르게 판단하고 행동해 이득을 만들어내면서 경기를 뒤짚어냈다.
젠지는 이날 초반 불리하게 시작했다. 강가 교전에서 '피넛' 한왕호의 카직스가 잡히면서 선취점을 내줬고, 심지어 드래곤 타이밍 이후 시야 헛점을 노린 상대 플레이에 당하면서 추가 킬까지 헌납했다. 이 상황에서 젠지는 상대보다 빠른 판단을 통해 카직스의 죽음을 만회했다.
부활한 카직스는 곧바로 탑쪽으로 동선을 잡았고, 바텀 역시 상대보다 빠르게 합류하면서 전령에 힘을 실었다. 반면 T1은 한 타이밍 늦게 전령으로 향하다 젠지가 전령을 가져가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결국 드래곤을 먹은 젠지가 정글이 죽었는데도 전령까지 가져가는 장면이 나온 것이다. 이 전령은 젠지가 초반 불리한 구도에서 골드 격차를 크게 벌어지지 않고 유지하는 것에 크게 기여했다.
이보다 더 결정적인 장면은 경기 중반 탑에서 두 차례 오리아나를 노렸던 장면이었다. '순간이동'이 상대보다 한 개 적은 젠지의 특성 상 전 라인에서 이득을 보는 것보다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상황. 젠지는 이 상황에서 최적의 플레이를 통해 이득을 만들었다.
젠지는 당시 미드 2차까지 파괴된 상황이었다. 미드 2차포탑이 밀린 팀은 일반적으로 상대보다 한 타이밍 느리게 움직일 수 밖에 없다. 상대에게 미드 푸시 주도권이 넘어가기 때문에, 그 라인을 받아야하는 상황이 나오기 때문이다. 프로 단계에서 미드 포탑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이유다.
젠지의 경기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나왔다. 상대 카이사가 먼저 미드를 미는 구도가 나왔고, 알리스타와 자르반이 강가 쪽에서 먼저 돌아다니면서 시야를 장악했다. 그러나 젠지는 그 상황에서도 빈 틈을 찾아냈다. 20분 40초 자르반이 아래로 살짝 내려가는 것이 포착되자마자, '쵸비' 정지훈의 아칼리가 단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e 스킬 '표창곡예'로 벽을 넘어 오리아나에게 돌진했다. 결국 정지훈의 플레이로 오리아나에게 데스를 안겨주면서, 상대 운영을 한 차례 막아냈다.
비슷한 장면은 잠시 후 똑같이 반복됐다. 22분 이번에도 상대에게 강가 주도권을 내준 상황에서 자르반이 아랫쪽으로 내려가는 것이 포착되자마자 탑에 있던 오리아나를 노리며 라칸이 벽을 넘었다. 이번엔 오리아나를 잡아내진 못했지만, 미드인 오리아나의 '점멸'을 빼는 것에 성공했고 심지어 합류 과정에서 한왕호가 생존해나가며 상대 원거리 딜러인 카이사의 '점멸'까지 빼냈다.
이 장면이 특히 의미 있었던 것은 그 다음 타이밍 한타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장면 덕분에 다음 드래곤 교전에서 상대 주력 딜러 라인의 '점멸'이 모두 빠진 상태로 한타가 열렸고, 그 상황에서 '딜라이트' 유환중의 라칸이 환상적인 이니시에이팅을 성공시키면서 대승을 거뒀다. 이후 바론 버프를 챙기면서 승부는 급격히 젠지에게 기울었다.
결국 경기를 역전시킨 것은 한타지만, 그 전까지 불리한 라인전 구도를 상쇄시키고 유리한 한타를 위한 구도를 만들어낸 것은 운영 상에서 있었던 젠지의 빠른 결정들이었다. 짚어낸 장면들 외에도 라인스왑이나 자그만한 운영 장면에서 젠지의 빠른 결정은 매순간 정답지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녹아웃 스테이지에 진출한 젠지가 앞으로도 이런 장면들을 많이 만들어내기를 기대해본다.
허탁 기자 (taylor@dailyesport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