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지의 패배가 더욱 뼈아픈 것은 밴픽적으로 아쉬운 모습이 두드러지며 패배했기 때문이다. 물론 LOL 프로게임의 수준에서 밴픽 역시 팀의 실력의 일환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좋은 경기력을 보이던 팀이 좋지 않은 밴픽을 진행하며 패배한 것은, 좋은 밴픽으로 패배한 경우에 비해 더 아쉬울 수 밖에 없다. 실제로 팬들은 물론이고 전문가들이나 심지어 직접 경기에 나선 선수들 역시 밴픽을 승부의 분수령이 갈린 포인트로 꼽았다. '야가오' 쩡치는 "밴픽에서 우리가 젠지보다 뛰어났다"고 직접적으로 밝혔고, 패배한 젠지의 '피넛' 한왕호 역시 티어정리에 대한 아쉬움을 강하게 드러냈다.
특히 젠지의 밴픽이 가장 문제가 된 세트는 1세트와 2세트다. 초반 기세가 중요한 상황에서 두 세트 연달아 밴픽에서 좋지 않은 모습이 보이면서 젠지의 승리 플랜 자체가 무너졌다.
1세트 젠지 밴픽의 핵심은 탑라인 견제다. 스위스 스테이지에서의 BLG 경기를 살펴볼 때, BLG의 승리플랜은 '빈' 천쩌빈임은 명확했다. 젠지는 폼이 좋은 '도란' 최현준을 믿고, '빈'에게 밴픽을 집중시켰다. 블루 진영에서 레넥톤을 밴하고 잭스 선픽을 진행해 스위스 스테이지에서 '빈'이 선호한 두 장의 카드를 모두 제거했다. 1세트에서는 대부분 양 팀 모두 준비한 구도에서 밴픽이 진행되기 때문에 준비된 전략이 얼마나 통하냐가 승부의 관건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탑에서의 밴픽 구도에 집중한 나머지 다른 라인에서의 밴픽 구도가 좋지 않게 형성됐다는 점이다. 레드 진영 1,2픽으로 상대가 가져간 칼리스타-레나타는 현재 롤드컵에서 1티어로 평가받는 픽이다. 또 미드에서 가져간 아지르 역시 오리아나를 상대로 2승 10패를 기록 중인, 불리한 상성의 픽이다. 정글인 렐 역시 초반에 자르반을 상대로 초반 주도권을 내주는 픽이다. 결국 승리 플랜이 탑으로 국한됐다는 뜻이다. 여기서 등장한 두 번째 문제는 3개의 밴과 선픽까지 진행한 탑에서 나온 '빈'의 아트록스가 최현준의 잭스를 상대로 예상보다 좋은 경기력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결국 1세트 젠지는 전라인에서 주도권을 내주고 휘둘리다가 '빈'의 슈퍼캐리를 막지 못하고 패배하고 만다.
그리고 진행된 2세트, 젠지는 통상적으로 선호되는 블루 진영이 아닌 레드 진영에서 밴픽을 진행했다. 레드 진영에서 진행된 밴픽에서 젠지는 럼블-자르반-오리아나-자야-레나타를 모두 상대에게 내줬다. 이 챔피언들은 모두 블루 진영 1픽으로도 등장할 만큼 선호되는픽이다. 더욱이 럼블-자르반-오리아나는 ap-ad 밸런스와 한타에서의 궁 시너지를 모두 갖춰 월즈에서 이미 '사기'에 가깝다고 판명된 조합이다. 심지어 대회 내내 op로 평가받던 자야는 두 번째 밴페이즈가 지나고 나서도 밴되지않아서 바텀에서도 자야-레나타가 완성됐다.
물론 젠지가 2세트에 구성한 조합도 나쁜 조합은 아니다. '피넛' 한왕호의 마오카이 역시 본인이 선호하고 또 잘 다루는 픽이고, 아펠리오스-아지르로 구성된 딜러 라인 역시 젠지가 선호하는 후반 게임에 적합한 챔피언이었다. 그러나 상대 조합에 비하면 현재 메타 상에서 어떤 한 라인도 좋다고 볼 순 없었다. 레드 진영의 선택 이유를 보여줘야 했던 픽인 5픽 밀리오 역시 경기 내내 레나타를 상대로 유의미한 강점을 보여주지 못했고, 픽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보기도 힘들었다.
그렇다면 젠지는 왜 이렇게 밴픽을 진행했을까? 선수들 및 코치진들의 인터뷰를 종합하면, 그 이유는 티어 정리에서의 실패로 귀결된다. 대표적으로 한왕호는 "스크림에서는 '쵸비' 정지훈이 아지르로 오리아나를 상대로 좋은 경기력을 보였다"고 밝혔다. 또 감독인 '스코어' 고동빈 역시 "1,2세트 모두 준비해왔던 조합이다. 난이도가 높긴 했다"고 밝혔다. 특히 이날 경기 전까지 대회 내내 폼이 좋지 않았던 '온' 러원에게 풀어준 레나타에게 라인전을 두 세트 연속 밀릴 것이라는 예측을 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물론 BLG가 잘한 부분 역시 빼놓을 수 없다. BLG는 아마도 추측컨데, 젠지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폭 넓은 픽을 준비해왔다. 가장 대표적인 픽은 역시 '빈'의 럼블이다. 프로 커리어 내내 럼블을 단 한 번도 활용하지 않았던 BLG의 '빈'은 이 날 경기 2세트에서 예상 외로 럼블을 꺼내며 준수한 활약을 펼쳤다. 1, 2세트 모두 잭스를 가져가거나 밴하면서 '빈' 견제에 힘을 쏟았던 젠지의 전략이 힘을 잃은 순간이기도 했다.
결국 1,2세트를 허무하게 내준 젠지는 밴픽에서의 방향성을 선회하며 동점까지 따라붙었지만, 마지막 세트에서 결정적인 실수가 나오면서 패배하고 말았다. LCK에 이어 세계 무대까지 정복하고 왕조를 선포할 기회 역시 다음 기회로 미뤄졌다.
허탁 기자 (taylor@dailyesport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