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월드챔피언십을 시작하기 전만 하더라도, T1의 우승을 점치는 이는 많지 않았다. 해외에선 그랜드 슬램을 노리는 징동 게이밍과 징동게이밍과 비등한 전력을 갖췄다고 평가받은 리닝 게이밍이 버티고 있었다. 국내에서도 LCK 서머 결승전에서 T1을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젠지가 1번 시드로 더 유력한 우승후보로 꼽혔다. '페이커' 이상혁이 서머 시즌 손목 부상을 겪으면서 폼에 대한 우려가 있었고, 팀적인 합도 정점에서 내려온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월즈 초반엔 불안한 모습도 보였다. 전력상 우위라고 평가받은 팀 리퀴드와의 첫 경기에서도 '표식' 홍창현의 플레이에 다소 고전하면서 기대받은 만큼의 경기력을 보여주지 못했고, 다음 라운드에선 젠지를 만나 초반 우위를 점하고도 역전패를 허용했다. 팀적으로 미드-정글의 호흡이 잘 맞지 않는 모습도 노출됐고, 바텀 역시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다는 평가가 이어졌다.
그러나 이 경기 패배 이후부터 T1의 반전드라마가 시작됐다. T1은 클라우드 9과의 다음 라운드에서 22분 만에 상대 넥서스를 터뜨리는 압도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예열을 마친 뒤, 중국의 BLG-LNG-JDG-WBG를 차례로 모두 잡아내면서 우승까지 직행했다. 8강에서 kt 롤스터와 젠지가 모두 탈락하면서 홈그라운드 LCK의 유일한 희망이 된 상황에서 이뤄낸 성과라서 더욱 값진 성과였다.
T1이 우승드라마를 써낼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메타를 본인들의 힘으로 바꿔냈다는 점이다. 스위스 스테이지 초반 자야를 중심으로 원거리 딜러의 캐리력을 중시하는 메타가 소위 '대세'였지만, T1이 바드를 시작으로 세나-애쉬 등 다양한 챔피언을 활용해 주도권을 강하게 쥐고 게임을 흔들자 다른 팀들 역시 T1을 따라왔다. 결국 토너먼트 단계가 진행될수록 메타는 바뀌었고, '서커스단'이라고 불리는 T1의 강점을 잘 활용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다. 바텀에서 다양한 픽이 나올 수 있는 구도가 형성되자, '케리아' 류민석의 넓은 챔피언 풀이 빛을 발했고 이는 T1을 레드 진영에서도 블루 진영에서만큼 무서운 팀으로 변모시켰다.
T1의 우승에는 '톰' 임재현 감독대행을 주축으로 한 우수한 밴픽 역시 큰 힘이 됐다. 큰 무대에서 밴픽이 의아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경험이 많았던 T1이지만, 이번엔 오히려 밴픽이 T1의 강점이 됐다. 임재현 감독대행은 4강에서 '미싱' 러우원펑의 라칸을 고정 밴하는 등 상대방의 무기는 철저하게 밴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간 상대의 픽을 카운터치는 것에 전념했던 T1의 대전략이 수정된 것이다. 거기에 결승전에서 상대가 아트록스를 뽑자 요네를 바로 픽하는 것처럼, 필요한 순간엔 선수들의 기량을 믿고 과감한 픽을 보여주기도 했다.
물론 당연히 선수들의 기량 역시 뛰어났다. 이상혁은 오랜 선수 경험에서 나온 메이지 구도에 대한 이해도를 잘 보여주면서 라인전 단계부터 팀을 이끌었다. 또 위기의 순간엔 과감한 결단력을 보이면서 팀을 위기에서 구해내기도 했다. '오너' 문현준은 매 경기 훌륭한 동선을 보이면서 동시에 소규모 교전에 선봉장 역할을 톡톡히 수행해 대회 최고의 정글러로 자리매김했다. '제우스' 최우제는 탑 라인전에서 '빈' 천쩌빈과 '더샤이' 강승록을 모두 꺾으며 본인이 최고의 라이너임을 여실히 증명했고, 파이널 MVP의 주인공이 됐다. '구마유시' 이민형과 '케리아' 류민석으로 구성된 봇듀오는 단순히 넓은 챔피언폭을 보여줬을 뿐 아니라, 라인전과 후반 교전 모두에서 집중력을 보이면서 T1의 독보적인 무기였다.
5번의 준우승 끝에 트로피를 거머쥔 T1. 언더독에서 우승까지 달리면서 그간의 아쉬움을 모두 씻어내버린 T1의 2023년 서사는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남을 것이다.
허탁 기자 (taylor@dailyesports.com)